커버스토리   모이면 즐거운 이름, 친구

어른이 된 주인공들은 과거 친구의 향수에 빠져 있지 않다.
권력과 명예, 부와 안정, 눈앞의 현실(이익)이 중요하다.
홀로 있는 삶을 조장하는 현대 사회에서

친구와의 우정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가 드물어지는 이유다.

 


힘이 들 때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나는 사람, 나를 위해서 멀리서 찾아와주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친구와 나누던 모든 것들을 ‘혼자’ 해결한다. 특히 직장인들은 친구를 만나는 일상도 사치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종일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혼밥, 혼영, 혼술 등 혼자 하는 삶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며,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은 우리를 ‘홀로’ 있게 하는 데 익숙하게 만들었다. 무엇이든 혼자 해결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에서 친구는 마치 유물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는 대중문화 속에 드러나는 친구의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친구’는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존재이거나 주요 정보를 알려주는 존재, 감초 같은 역할로 소비된 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친구는 영화 끝까지 등장하지 못하고 중반부가 되면 잊히거나 사라지고, 관객들은 자연스레 주인공들의 서사에만 몰입하게  된다. 

물론 영화 속 친구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 시기도 있었다.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의 ‘친구’는 단순히 영화적 재미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독재정권 하에서 친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막막한 현실을 어찌 버텨야 하는지 1970년대 대학을 다니는 두 친구를 통해 포착한다. 1970년대, 좌절과 무기력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두 친구에게서 시대의 청춘들이 안고 있었을 고민과 방황을 감지할 수 있다.

우정과 의리, 그리고 여성의 연대
왜 오늘날 영화나 드라마에서 함께 있으면 즐거운 존재, 나를 위해 발 벗고 일을 해결해주는 친구가 찬밥 취급을 당하는 걸까? 2000년대 초반 “친구 아이가!”식의 막무가내 우정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아마도 「친구」(곽경택, 2002)에 등장하는 네 명의 친구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조폭영화이지만 죽음의 순간까지도 우정과 의리를 어필하며 죽음마저도 미화하는데, 마치 친구이기 때문에 그의 광기를 용서한다는 듯 동수는 죽음의 순간 “고마해라, 마이 뭇다 아이가”라는 대사를 던진다. 친구이기에 살인마저도 묵인·용서할 수 있다는 식의 이 대사는 이후 많은 비판을 받지만, 이 영화가 보여준 우정과 의리는 ‘남성다움’의 대명사처럼 무수한 아류들을 만들어냈다.
우정을 남성들의 세계에서나 있음 직한 일로 묘사하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 간의 우정을 그린 영화가 발붙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여성들 간의 우정을 다룬 작품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손꼽자면 아마도 「써니」(강형철, 2011)를 떠올릴 것이다. 일곱 명의 친구들은 언제까지 함께 하자는 맹세로 ‘써니’를 결성하고 학교 축제 때 선보일 공연을 준비하지만 축제 당일, 뜻밖의 사고로 뿔뿔이 흩어지고 그로부터 25년이 흐른다. ‘나미’는 돈 잘 버는 남편, 예쁜 딸을 둔 주부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 어쩐지 삶이 무료하고 공허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미는 죽음을 앞둔 ‘춘화’를 만나면서 써니 멤버들을 수소문하게 된다. 그런데 「써니」 속 친구들은 삶에 찌들어 과거 우정을 소환하기를 두려워한다. 우정이 밥(돈)을 주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일 때 누구보다 빛났음을 기억한 그녀들은 하나둘 다시 모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한둘 친구만 돋보이는 방식이 아니라 일곱 친구의 서사를 조화롭게 풀어내면서 그녀들만의 우정과 연대를 그린다. 그러나 영화 속 친구들의 우정이 죽음을 앞둔 춘화로 인해 일시적으로 만났다는 점, 과거에 얽매여 살 수 없기에 다시 현실로 돌아갔을 때 이 친구들의 우정이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그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함께여서 찬란했던 그 시절의 친구  
스무 살, 인생의 과도기이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다. 이러한 고민을 담고 있는 「고양이를 부탁해」(정재은, 2001)는 우정을 기리는 어떤 특별한 사건도 없지만, 친구들 간의 감정적인 교류를 섬세하게 선보여 인상적이다. 여고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은 스무살이 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지영이 길 잃은 새끼 고양이를 만나고, 갑작스레 그녀의 집이 붕괴되면서 다섯 명의 친구들이 지영의 고양이를 돌아가며 키우게 된다. 친구들은 고양이로 다시 연결됐지만, 이들이 처한 현실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스무살, 어른이 된다는 건 쉽게 위로받을 수 없으며, 친구와 어울리는 것도 버거운 시기다. 미래로 향해가야 하는 친구들은 삶의 모양이 달라지면서 조금씩 어색해지고 불편한 사이가 될 것이다. 그러다 결국 「써니」의 친구들처럼 ‘과거’의 기억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스무살이 있다.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세 친구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다룬 청춘물 「스물」(이병헌, 2015)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은 백수, 재수생, 대학생이 됐지만, 미래에 대한 고민보다 눈앞의 시간만 즐겁게 보내고 싶다. 하지만 이들도 남들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의 무게를 느낀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지만 가난한 형편에 꿈이 좌절당하거나, 눈앞으로 다가온 군대 문제,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어 바둥거리는 친구에게 즐거움은 사치다. 영화는 유쾌한 방식으로 친구들의 서사를 풀어내지만, 영화속 친구들은 서로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지는 않는다. 즐거움은 함께 나누지만 슬픔은 공유할 수 없는 존재가 친구처럼 보인다.
  
우정이 불가능한 시대?
대중가요에서 친구와 관련된 노래들을 살펴보면 생사를 함께 하거나, 가슴 뭉클한 우정의 순간을 다루거나, 암울한 시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구와 함께 노래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친구상이 재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영화나 드라마 속 친구는 극적 효과를 주는 장치의 하나로 기능하면서, 주인공의 서사를 보조하는 주변적 요소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친구’를 주제로 삼은 영화에서조200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으로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주간, 영화잡지 크리틱b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영화평론집『삼켜져야 할 말들』이 있다.차 친구들은 연대하지 못하고 ‘각자’ 문제를 해결하기 바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제 친구는 대면보다는 페북 친구(SNS)의 ‘좋아요’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분위기가 득세하고 있다. 이런 세태에서 대중문화 속 친구의 이미지가 변화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어른이 된 주인공들은 과거 기억 속 동네·학교 친구의 향수에 빠져 있지 않다. 권력과 명예, 부와 안정, 가족이나 자기 자신 등 눈앞의 현실(이익)이 중요하다. 생활의 문제가 더 시급한 시대, 홀로 있는 삶을 조장하는 현대 사회에서 친구와의 우정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가 드물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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