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번씩 명함을 가져봤을 것이다. 명함은 나를 알리고 관계를 이어주는 좋은 도구다. 그런데 정작 나란 존재가 명함 속 직함 하나로 규정될 수 있을까. 요즘 시대엔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활약하는 재능 넘치는 분들도 많다. 우린 이미 누군가의 자녀이자 배우자, 그리고 부모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람들은 다양한 관계 속에 여러 일과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나 역시도 여러 호칭으로 불려왔다. 그간 사회생활 속에선 ‘변호사’로 많이 불렸다. 예쁜 딸아이가 커가며 ‘유민 아빠’란 호칭에도 익숙해졌다. 전공 분야의 학위를 취득한 후론 ‘박사’라 불러주는 분들도 제법 생겼다. 조그만 국제법연구소 간판을 걸고 스스로 ‘대표’란 직함을 쓰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지금 국제법 분야의 연구와 자문, 약간의 강의 등을 하며 지낸다. 지금의 나를 규정한다면 독립연구자의 길을 가는 국제공법 법률가이자 딸아이의 아빠, 그리고 한 여인의 남편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그럼 지금의 내가 앞으로도 나의 전부일까. 그간 갈증도 없지 않았다. 한국의 국제현실 속에 외국어, 특히 일본어를 잘 모른다는 건 연구자로서 적지 않은 장애였다. 한·일간 국제법 현안을 공부하려면 한국뿐 아니라 일본 자료도 충실히 살피고 양측 입장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마흔 줄이 다 돼 히라가나를 익히기 시작한 게 불과 몇 년 전, 이렇게 시작된 일본어 공부는 방송대 대학원 진학으로 이끌었다.
작년 1학기 대학원 일본언어문화학과에 개설된 「번역과 문화」 수업을 들었다. 학기가 끝날 무렵 일한(日韓) 번역의 매력에 눈을 뜬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 문학에도 친해지고 일본어와 국어에 대한 이해도 넓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결실이랄까, 현재 이경수, 강상규 교수님을 중심으로 올 3월 출간을 목표로 진행 중인 일본문화와 역사에 관한 교양서의 필진으로도 참여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은 일본 문학이라는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란 제목으로도 출간)을 제대로 읽어본 게 바로 얼마 전이다. 그런 필자가 여러 전문가들과의 공동작업에 참여해 글을 싣는다는 걸 몇 해 전이면 상상이나 했겠는가.
위 교양서 작업에서 나는 일본어 초심자의 번역 이야기를 다뤘다. 초심자라 주눅 들지 말고 일한 번역에 도전해 보자는 게 요지다. 외국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국어를 잘해야 번역도 잘할 수 있다. 곧 한국어 전문가인 우리는 누구나 일한 번역, 나아가 각종 외국어 번역에 도전해 볼 수 있단 얘기다. 그런데 우리 인생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우린 누구나 가보지 못한 길 앞에 초심자다. 그러나 또 짧지 않은 세월을 열심히 살아온 인생 전문가 아닌가. 내가 지금 어떻게 불리든 나의 전부는 아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나’란 존재가 그 잠재력을 모두 발휘하기엔 세상은 너무나 넓고 우리 생은 그리 길지 않다.
새로운 도전에 두려워 말고 열린 마음을 가져보자. 또 다른 나를 발견할 기회가 어느 틈에 찾아올지 모른다. 주제넘은 망상일지 모르나 필자 역시 수년 후 일한 번역전문가란 직함이 더 어울릴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을까. 건강하게 오래 살고 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