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우 건국대 교수·신문방송학과 - 프랑스 파리5대학 사회과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에는 디지털 기술적 대상(technological object)에 대한 철학적·사회학적 작업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저·역서로는 『저널리즘 핸드북』(공역), 『민주주의, 증언, 인문학: 민주주의는 증언에서 시작된다』(공저) 등이 있다.
미디어 연구의 ‘20세기’란 어떤 의미일까 묻는 일은 조금 새삼스럽다. 인류의 기술 문명이 미디어를 낳았지만, 점차 우리 스스로가 미디어에 포획되고 지배됐던 시대가 바로 20세기였기 때문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기술에 대한 물음(Die Frage nach der Technik)」(하이데거가 1953년 11월 8일 뮌헨공과대에서 했던 강연 논문)에서 인류 문명에 대한 ‘닦달(Ge-stell)’로서의 기술의 대표적인 사례로 당대의 미디어를 거론한다. 그 자체가 곧 인류가 직면한 존재론적 재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인들의 경고에 대중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각종 전자 미디어는 놀라운 속도로 대중들의 호기심을 사로잡았고, 또 그것의 영향력에 대한 대중들과 엘리트들의 공포도 함께 커져만 갔다. 20세기 미디어 문명은 인류가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술들의 향연이었고, 그로 인해 현실 그 자체와 경험의 양식이 새롭게 탄생했다.
기술과 근대성의 결합에서 출현
미디어 연구는 바로 이러한 기술과 근대성의 결합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출현했다. 그것은 새로운 기술 현상의 탐구였으며, 또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질서에서 탄생한 근대성의 독특한 경험에 대한 탐구였다. 그렇기에 아무런 지적 상속도 없이 시작된, 그야말로 ‘맨땅에서’ 시작한 학문이었다. 하지만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기술·소비 문명 ‘유토피아’를 구축하는 유수한 대학들은 장차 그것이 현대인들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영역에 걸쳐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를 너무 잘 알았으며, 이 문제를 종합적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접근해 나갔다.
수십 년 동안 이들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질문―‘과연 미디어는 효과가 있는가’―을 던졌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다양하게 답변해 왔다. 라디오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는가? 영화가 대중들의 전쟁 참가를 더 많이 이끌어 낼 수 있는가? 신문이나 방송이 유권자의 투표 행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금연 광고의 메시지를 어떻게 구성하면 더 많은 금연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TV를 많이 보면 정말로 바보가 되는가? 게임에 더 많이 몰입한 사람이 정말로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큰가? 등등. 비판적 미디어 연구는 이 문제를 정반대의 관점에서, 즉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했지만, 문제 틀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대중들을 미디어―메시지의 이데올로기―효과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
놀랍게도, 지난 20세기 미디어 연구가 내린 결론은 결국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미디어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 어떤 효과도 절대적인 것으로 확정되고 검증되지는 않았다. 효과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아쉽게도 그 ‘때’와 ‘장소’를 정확히 특정하는 것은 연구자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다만 무수히 많은 가능성과 새로움에 대한 관찰이 질문을 대체했다. 그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20세기 미디어 연구의 화려했던 한 시대의 표상이었다. 그 사이에 언론사, 방송사, 혹은 다양한 영역의 ‘콘텐츠 기업’은 부지기수로 늘어갔으며, 이들은 뭔가 뻔한 ‘나인투파이브’의 삶을 기피하는 젊은 구직자들의 열광적인 숭배의 대상이 됐다. 국내에서도 신문방송학과가 개설된 학교는 전국 약 160개 대학으로 늘어났으며, 그 숫자는 가히 전 세계 ‘톱 3’의 수준이었다. 일견 위기를 거론하기에는, 미디어 연구는 어쩌면 너무도 화려했던 한 시대를 보냈다.
미디어를 ‘도구화’ 했던 20세기
그것은 과연 ‘테크놀로지의 땅에 핀 푸른 꽃’(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재해석한 영화미학자 미리엄 한센의 논문 제목이다. 여기서 ‘푸른 꽃’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 노발리스의 작품에서 온 것이다)이었을까? 아쉽게도 우리가 기억하는 20세기는 기술과 미디어를 극단적으로 ‘도구화’시키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근대성의 주요 양상들에 체계적으로 결합시켰던 시대였다.
초창기의 전자 미디어 기술은 곧장 그것의 경제적, 정치적 가능성을 간파한 제국주의의 귀중한 도구였다. 따라서 그것은 제국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의 토대이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추동한 사회통합적 이념 창출과 정치 선전의 수단이었다. 라디오와 TV, 영화는 대중들의 문화적 인식과 행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우려스러운 도구이면서, 또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프로파간다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1970년대 자본주의의 축적 위기를 해결했던 것은 새로운 정보통신 혁명이었고, 이는 신자유주의적·금융자본주의적 통치성을 출현시킨 모태였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속의 한국이 찾아냈던 돌파구 역시 ‘초고속인터넷’이었지 않은가?
21세기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미디어의 시대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이란 무엇인가? 21세기의 디지털 미디어는 20세기의 미디어와 달리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그것에 대한 정답을 아직은 알지 못한다. 단지 디지털이 보다 민주적이고 대중 참여적일 수 있는 미디어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또 미디어라는 표상 체계 전체를 뒤흔드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경험 양식을 이미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았는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전혀 근거 없지는 않다는 점만은 분명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기술의 본질에 대한 오랜 경고들이 여전히 필요하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가 가져다 준 변화도 놀랍지만, 상업적인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를 통해 서로 접속돼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소셜’하다고 부른다면, 도대체 ‘소셜’의 의미가 과연 어떻게 변해 버린 것일까? 그러한 새로운 변화들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지적 자원이나 유산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것이 바로 21세기 미디어 연구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물음일 것이다.
21세기 미디어 연구에 던져진 질문들
몇 가지 대답은 시도해볼 만할 것이다. 첫째, 새로운 도전은 곳곳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빅데이터와 알고리즘, 인공지능의 시대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지극히 과거의 습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의 환경은 단지 새로운 자본주의나 비즈니스 성장의 동력 문제를 넘어서, 미디어 연구가 자신의 학문적 입지 자체를 새로 설정해야 하는 상황을 창출한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이는 미디어 연구가 오랫동안 던졌던 질문들, 이를 위해 동원한 정교한 사회과학 연구방법론들의 정당성 자체가 훼손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 인공지능의 시대는 우리의 질문에 대해 과학적 방법론으로 ‘추론’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냥 데이터가 정답을 보여준다고 믿게끔 만드는 시대다. 그럼에도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스스로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혹은 ‘아직은 못 한다’). 미디어 연구는 지금부터 무엇을 질문해야 할까? 그리고 질문의 능력을 어디에서 확보하고 또 길러 나갈 수 있을까?
둘째, 생각보다 우리는 디지털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디지털이라는 기술적 대상에 대해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역량은 지금까지와는 전적으로 다른 지적 태도를 요구한다. 미디어는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을 둘러싼 일종의 환경이 됐지만, 그것이 갖는 도구로서의 속성, 도구와 환경 그리고 인간의 관계에 대한 보다 수준 높은 통찰은 여전히 부족하다.
셋째, 디지털 시대의 초연결 사회 자체가 낳고 있는 새로운 현상들에 대한 지적·정치적 관심은 여전히 깊어져야 한다. 플랫폼이 지배하는 미디어 환경이 기존 언론이나 뉴스의 정당성, 진실성이라는 문제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 모두가 항상 접속된 환경에서 빠른 속도로 전파되는 정보들의 가치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저널리스트는 이런 환경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일을 하는 존재인가, 혹은 할 수 있는 존재인가? 미디어 중심적인 삶의 관습들이 우리의 경험 구조를 어떻게 바꾸는가? 우리는 제주도 여행을 즐기는가, ‘#제주도 여행’을 즐기는가?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창출해 내는 정치의 모습은 무엇이며, 앞으로 그것은 더 나아질 수 있는가?
분명히 기존의 미디어 연구의 성과들이 대답하기 몹시 곤란한 사태들이 눈앞에 점점 더 다양하게 펼쳐지기 시작하고 있다. 또 이 문제들은 기존의 미디어 연구의 전제 자체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한 편으로는 매우 당혹스럽지만, 또 그만큼 지적 도전의 흥미를 자극한다. 21세기의 미디어 연구를 재구성하는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디지털화된 새로운 사회적 경험의 구조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탐색일 것이다. 잊혀진 자원들, 혹은 잘못 이해된 자원들이 새롭게 발굴되고 소개될 필요가 있다.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에 대하여 끈질기게 관찰하는 눈이 함께 필요하다. 미디어 연구는 20세기에도 그랬듯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의 공적인 삶의 중요한 차원을 탐색하는 학문적 활동임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가 가져다 준 변화도 놀랍지만, 상업적인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를 통해 서로 접속돼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소셜’하다고 부른다면, 도대체 ‘소셜’의 의미가 과연 어떻게 변해 버린 것일까? 그러한 새로운 변화들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지적 자원이나 유산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것이 바로 21세기 미디어 연구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물음일 것이다.
기술과 근대성의 결합에서 출현
미디어 연구는 바로 이러한 기술과 근대성의 결합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출현했다. 그것은 새로운 기술 현상의 탐구였으며, 또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질서에서 탄생한 근대성의 독특한 경험에 대한 탐구였다. 그렇기에 아무런 지적 상속도 없이 시작된, 그야말로 ‘맨땅에서’ 시작한 학문이었다. 하지만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기술·소비 문명 ‘유토피아’를 구축하는 유수한 대학들은 장차 그것이 현대인들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영역에 걸쳐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를 너무 잘 알았으며, 이 문제를 종합적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접근해 나갔다.
수십 년 동안 이들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질문―‘과연 미디어는 효과가 있는가’―을 던졌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다양하게 답변해 왔다. 라디오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는가? 영화가 대중들의 전쟁 참가를 더 많이 이끌어 낼 수 있는가? 신문이나 방송이 유권자의 투표 행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금연 광고의 메시지를 어떻게 구성하면 더 많은 금연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TV를 많이 보면 정말로 바보가 되는가? 게임에 더 많이 몰입한 사람이 정말로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큰가? 등등. 비판적 미디어 연구는 이 문제를 정반대의 관점에서, 즉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했지만, 문제 틀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대중들을 미디어―메시지의 이데올로기―효과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
놀랍게도, 지난 20세기 미디어 연구가 내린 결론은 결국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미디어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 어떤 효과도 절대적인 것으로 확정되고 검증되지는 않았다. 효과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아쉽게도 그 ‘때’와 ‘장소’를 정확히 특정하는 것은 연구자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다만 무수히 많은 가능성과 새로움에 대한 관찰이 질문을 대체했다. 그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20세기 미디어 연구의 화려했던 한 시대의 표상이었다. 그 사이에 언론사, 방송사, 혹은 다양한 영역의 ‘콘텐츠 기업’은 부지기수로 늘어갔으며, 이들은 뭔가 뻔한 ‘나인투파이브’의 삶을 기피하는 젊은 구직자들의 열광적인 숭배의 대상이 됐다. 국내에서도 신문방송학과가 개설된 학교는 전국 약 160개 대학으로 늘어났으며, 그 숫자는 가히 전 세계 ‘톱 3’의 수준이었다. 일견 위기를 거론하기에는, 미디어 연구는 어쩌면 너무도 화려했던 한 시대를 보냈다.
미디어를 ‘도구화’ 했던 20세기
그것은 과연 ‘테크놀로지의 땅에 핀 푸른 꽃’(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재해석한 영화미학자 미리엄 한센의 논문 제목이다. 여기서 ‘푸른 꽃’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 노발리스의 작품에서 온 것이다)이었을까? 아쉽게도 우리가 기억하는 20세기는 기술과 미디어를 극단적으로 ‘도구화’시키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근대성의 주요 양상들에 체계적으로 결합시켰던 시대였다.
초창기의 전자 미디어 기술은 곧장 그것의 경제적, 정치적 가능성을 간파한 제국주의의 귀중한 도구였다. 따라서 그것은 제국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의 토대이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추동한 사회통합적 이념 창출과 정치 선전의 수단이었다. 라디오와 TV, 영화는 대중들의 문화적 인식과 행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우려스러운 도구이면서, 또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프로파간다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1970년대 자본주의의 축적 위기를 해결했던 것은 새로운 정보통신 혁명이었고, 이는 신자유주의적·금융자본주의적 통치성을 출현시킨 모태였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속의 한국이 찾아냈던 돌파구 역시 ‘초고속인터넷’이었지 않은가?
21세기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미디어의 시대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이란 무엇인가? 21세기의 디지털 미디어는 20세기의 미디어와 달리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그것에 대한 정답을 아직은 알지 못한다. 단지 디지털이 보다 민주적이고 대중 참여적일 수 있는 미디어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또 미디어라는 표상 체계 전체를 뒤흔드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경험 양식을 이미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았는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전혀 근거 없지는 않다는 점만은 분명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기술의 본질에 대한 오랜 경고들이 여전히 필요하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가 가져다 준 변화도 놀랍지만, 상업적인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를 통해 서로 접속돼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소셜’하다고 부른다면, 도대체 ‘소셜’의 의미가 과연 어떻게 변해 버린 것일까? 그러한 새로운 변화들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지적 자원이나 유산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것이 바로 21세기 미디어 연구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물음일 것이다.
21세기 미디어 연구에 던져진 질문들
몇 가지 대답은 시도해볼 만할 것이다. 첫째, 새로운 도전은 곳곳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빅데이터와 알고리즘, 인공지능의 시대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지극히 과거의 습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의 환경은 단지 새로운 자본주의나 비즈니스 성장의 동력 문제를 넘어서, 미디어 연구가 자신의 학문적 입지 자체를 새로 설정해야 하는 상황을 창출한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이는 미디어 연구가 오랫동안 던졌던 질문들, 이를 위해 동원한 정교한 사회과학 연구방법론들의 정당성 자체가 훼손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 인공지능의 시대는 우리의 질문에 대해 과학적 방법론으로 ‘추론’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냥 데이터가 정답을 보여준다고 믿게끔 만드는 시대다. 그럼에도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스스로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혹은 ‘아직은 못 한다’). 미디어 연구는 지금부터 무엇을 질문해야 할까? 그리고 질문의 능력을 어디에서 확보하고 또 길러 나갈 수 있을까?
둘째, 생각보다 우리는 디지털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디지털이라는 기술적 대상에 대해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역량은 지금까지와는 전적으로 다른 지적 태도를 요구한다. 미디어는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을 둘러싼 일종의 환경이 됐지만, 그것이 갖는 도구로서의 속성, 도구와 환경 그리고 인간의 관계에 대한 보다 수준 높은 통찰은 여전히 부족하다.
셋째, 디지털 시대의 초연결 사회 자체가 낳고 있는 새로운 현상들에 대한 지적·정치적 관심은 여전히 깊어져야 한다. 플랫폼이 지배하는 미디어 환경이 기존 언론이나 뉴스의 정당성, 진실성이라는 문제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 모두가 항상 접속된 환경에서 빠른 속도로 전파되는 정보들의 가치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저널리스트는 이런 환경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일을 하는 존재인가, 혹은 할 수 있는 존재인가? 미디어 중심적인 삶의 관습들이 우리의 경험 구조를 어떻게 바꾸는가? 우리는 제주도 여행을 즐기는가, ‘#제주도 여행’을 즐기는가?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창출해 내는 정치의 모습은 무엇이며, 앞으로 그것은 더 나아질 수 있는가?
분명히 기존의 미디어 연구의 성과들이 대답하기 몹시 곤란한 사태들이 눈앞에 점점 더 다양하게 펼쳐지기 시작하고 있다. 또 이 문제들은 기존의 미디어 연구의 전제 자체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한 편으로는 매우 당혹스럽지만, 또 그만큼 지적 도전의 흥미를 자극한다. 21세기의 미디어 연구를 재구성하는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디지털화된 새로운 사회적 경험의 구조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탐색일 것이다. 잊혀진 자원들, 혹은 잘못 이해된 자원들이 새롭게 발굴되고 소개될 필요가 있다.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에 대하여 끈질기게 관찰하는 눈이 함께 필요하다. 미디어 연구는 20세기에도 그랬듯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의 공적인 삶의 중요한 차원을 탐색하는 학문적 활동임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가 가져다 준 변화도 놀랍지만, 상업적인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를 통해 서로 접속돼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소셜’하다고 부른다면, 도대체 ‘소셜’의 의미가 과연 어떻게 변해 버린 것일까? 그러한 새로운 변화들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지적 자원이나 유산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것이 바로 21세기 미디어 연구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물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