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권에 바탕을 둔 선배시민 담론, 기존 노인담론 한계 극복 가능성 충분”
선배시민조례가 왜 필요한지 성찰 새로운 노인상을 추구하는 선배시민 운동의 성패는 철학과 이 철학을 아는 시민력에 달려 선배시민학회(회장 유범상 방송대 교수)가 지난 11월 21일 방송대 대학본부 열린관 강당에서 회원 및 관계자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선배시민조례, 그 이후’라는 주제로 2024년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발표에는 전용호 교수(인천대), 김미숙 도의원(경기도 의회), 신명희 관장(성남시 중원노인종합복지관)이 나섰고,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는 이태수 교수(인하대, 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가 좌장을 맡아 진행했다. 유범상 학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빵은 시민의 권리로 얻어야 하고, 장미는 공동체의 일에 참여함으로써 획득해야 한다”면서, 이제 “노인은 시민으로서 권리를 알고 이 권리를 관철하기 위해 시민력을 가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우리 학회는 그동안 이론과 광장을 만들어 왔다. 오늘은 한국의 시민권과 노년의 인간다운 삶을 향해 급한 걸음을 재촉해온 우리들이 잠시 멈춰 서서 성찰하는 날이다”라고 말했다. 대항담론으로 자리매김한 선배시민담론 첫 발제자로 나선 전용호 교수는 발표문 「노인의 사회참여와 한국 사회의 변화: 선배시민을 중심으로」에서 한국 노인들의 여가와 사회참여 현실을 소개하고, 선배시민 담론이 현재 노인담론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 교수는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고용률은 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34.5%로 가장 높다”면서, “대부분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경제활동들이며,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비율이 4.9%에 불과해 한국 노인들은 스스로 일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노동’의 상태에 놓여 있다”라고 진단했다. 또한 “노인이 되면 여가시간이 증가하면서 시간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건강하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자원봉사활동은 2.5%, 정치단체 활동은 1.3%에 불과하고 대부분 친목단체나 동호회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선배시민 담론은 ‘활동적·성공적 노화론’과 ‘고령화 위기론’을 대체할 수 있는 대항담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면서 “베이비부머 세대를 비롯한 노인세대의 증가에 대응해서 한국의 정치와 노인의 삶, 사회복지의 현장 등에 긍정적인 의미 있는 변화를 낳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진단했다. 이어 「고령사회, 선배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미래」를 발표한 두 번째 발제자 김미숙 의원은 “경기도 선배시민 지원 조례는 고령사회의 주체적인 구성원으로서 선배시민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들의 사회 참여를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라고 말하면서, “선배시민이 잠재력을 발휘하고,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조례의 성공적인 시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각 지자체의 내년 예산에 선배시민 지원 조례 시행에 필요한 예산이 편성돼야 하는데, 유권자인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자체 의회 의원들을 설득하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라고 귀뜸했다.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신명희 관장은 「사회복지실천의 확장, 선배시민」을 통해 “노인복지 현장에서는 조례 제정의 전과 후가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라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이제 노인복지관은 케어센터가 아니라 커뮤니티센터다. 노인에 대한 관점이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돌봄의 주체로 바뀌면서 노인을 시민이라 부르고, 실천 공간이 복지관에서 마을이나 지역사회로 확장됐으며, 사업 내용이 서비스 제공에서 대화와 토론으로, 사회복지사의 역할이 서비스 전달자에서 교육가나 조직가로 바뀌었다”라고 말했다. “선배시민 조례, 정치적 실적주의 경계해야”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는 이태수 교수가 좌장을 맡아 진행했다. 지정토론자 없이 자유롭게 진행됐다. 플로어에서는 공군자 선배시민협회 부회장 등 총 여섯 명이 질문과 소감을 개진했다. 선배시민 담론의 확장성과 실천방안, 각 지자체의 선배시민 지원 조례 제정이 선배시민 운동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정치적 실적주의로 흐르는 것에 대한 우려, 지원 조례가 실현되기 위한 예산 확보 방안 등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이 교수는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사회운동이 공공 영역으로 들어가 예산지원을 받게 되면 반대급부를 치러야 한다. 사업화되면서 감시와 통제를 당하고 의존적이 되는 것을 많이 보아 왔다”라고 우려하면서, “선배시민 조례가 꼭 필요한 것인지, 어떤 조례가 필요한 건지, 그걸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순수 운동으로 남을 것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이어진 폐회사에서 유범상 학회장은 “이태수 교수의 경고를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하면서, “새로운 노인상을 추구하는 선배시민 운동의 성패는 철학과 이 철학을 아는 시민력에 달려 있는데, 시민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선배시민 운동에서 ‘철학은 엄격하게 실천은 유연하게’라는 태도가 중요하다. 선배시민학회가 철학을 보다 더 견고하게 세우고 선배시민협회가 튼튼하게 조직된다면, 조례 제정은 한국의 노년의 삶을 안전하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230호 최익현 2024-11-25 10:33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2·8독립운동의 청년정신
2월 8일은 단순한 ‘시간표’가 아니다. 101년 전 일본 도쿄에서 조선유학생들이 앞장서 ‘독립선언’을 외쳤던 역사의 시간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이들의 외침은 이후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구현됐다. 그러나 영원한 청년정신이 담긴 2·8독립선언은 3·1만세운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됐다.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이 2·8독립선언의 의미를 짚었다. 아래의사진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최승만(崔承萬) 사진첩(5)』에 수록된 것으로, 1919년 2·8독립선언의 주역 7인이 1920년 3월 26일 도쿄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출감한 직후 찍은 기념사진이다. 2·8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총 11명의 주동자 중 7명의 학생이 가운데 열에 나란히 앉아 있다. 맨 왼쪽부터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이다. 사진에 는 먼저 출감한 김상덕과 이종근, 2·8독립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간 이광수와 최근우가 빠져있다. 앞줄 왼쪽부터 최원순, ○○○, 최승만, 장영규이고, 삼열의 왼쪽부터 ○○○, 변희용, 강종섭, 이봉수, ○○○이다. 변희용, 최승만, 강종섭 등은 1919년 2월 12일 히비야공원 2차 시위, 2월 24일 히비야공원 3차 시위를 기도했다. 일제 측 자료에 의하면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는 200여명의 유학생이, 2차 시위 때에는 100여명, 3차 시위 때에는 150여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또 하나 이 사진에서 눈에 띄는 복장은 최팔용이 입은 흰색 두루마기이다. 출감 당시의 옷은 거사 당일의 복장이다. 조선청년독립단의 대표 최팔용은 이 날 아침 일본 땅 도쿄에서 두루마기의 옷깃을 여미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쿄 유학생들이 세 차례나 굴하지 않고 시위운동을 결행했던 이유, 나아가 김마리아 등 여러 유학생들이 조선으로 건너가 각자의 방식으로 3·1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절실하게 했던 것일까? 이것을 알 수 있는 단서가 2·8독립선언서에 담겨 있다. 2·8독립선언에 담긴 민주주의 정신 2·8독립선언서에는 “오족(우리 민족)은 일본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 폭력 하에 오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하였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때에 당연히 바로잡을 것을 세계에 구할 권리가 있다”고 밝히고 독립 이후의 조선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 신국가를 건설”할 것을 천명했다. 우리는 이 선언서에서 무엇보다 일제로부터 독립 후에 만들 신국가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임을 선언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가운데 최초로 공개적으로 ‘민주주의’가 천명됐기 때문이다. 2·8독립운동의 시작을 1918년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 종식 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선언에서 촉발됐다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근인(近因)에 불과하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8월 한국강제병합의 과정에서 조선의 청년들은 대한제국이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했다. 1906년경 당시의 계몽잡지에는 “국가는 국민 모두의 공동체이니, 군주 한 사람의 사유물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이미 제창되고 있었다(「국가의 본의」, <대한자강회월보> 3호, 1906.9.25). 일제강점을 전후해 국외로 망명한 신채호, 박용만, 안창호, 김규식 등의 인사와 일본에 유학한 조소앙, 신익희 등의 청년들은 전제정치에 대한 대안으로 공화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17년 7월 상해에서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국권이 피탈되어 순종이 주권을 포기함으로써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계승되었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일본에 유학하던 유학생 사이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모색이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 도쿄에는 진보적인 정치사상가 도쿄제국대학 교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가 망국민이 된 조선 청년의 처지를 동정하고 민주주의 정치사상을 피력하며 한인유학생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조선 유학생들은 1914년 도쿄 간다(神田)에 완공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자주 모임을 갖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야 할 청년의 사명에 대해 고민했다. 그들은 민주주의 정치제도에 공감하며 토론했으며, 요시노 사쿠조 교수를 초청해 민주주의 관련 강의를 청취했다. 1915년 와세다대학 유학생이던 장덕수와 최팔용, 김도연 등은 중국 유학생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아동맹당을 조직해 활동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국제사회의 새 지도자로 미국이 부상한 것이다. 당시 유학생들에게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민주주의를 국가이념으로 세워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나라였다. 그런 미국의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기치 위에서 민족자결주의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원리를 제창하고 나선 것이다. 도쿄유학생들은 와세다대학 선배인 조소앙, 장덕수 등이 상하이에서 김규식, 여운형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특사 파견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미국에서도 외교사절을 파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들이 파리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일 때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전(全) 조선인의 거족적인 독립의 함성이 절실히 요청되는 상황이었다. 누가 먼저 이를 시작할 것인가? 도쿄 유학생들이 나선 것이다. 그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발기하고 그 명의로 조선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선언서, 결의문을 작성해 일본 중의원·귀족원 의원, 일본 주재 외교관, 각종 신문사 및 지식인들에게 발송하고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왜 이런 방법을 선택한 것일까? 혹자는 지식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타협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이라고도 하지만, 이것은 근대 일본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정당내각인 하라 다카시(原敬) 내각을 상대로 가장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질식돼 데모크라시를 ‘민본주의’로밖에 번역할 수 없었던 당시 일본 사회에서 도쿄유학생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선언은 일본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에게도 큰 충격 끼쳐 2·8독립운동에 참여한 유학생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지역의 3·1운동을 견인했으며, 그 중 50여명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20년 4월 11일에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본 유학생 출신 조소앙, 신익희 등이 주도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임시헌장을 채택했다.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인 이동녕은 제1회 회의 개회사에서 “이 때야말로 내 생애에서 가장 보람을 안겨주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이제 군주제를 부활하려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이 나라에 민주제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속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2·8독립운동에서 선언된 민주주의 국가 건설의 꿈은 이렇게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정신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구현됐다.
38호 윤소영 2020-02-07 10:52
‘유싸이키아(Eupsychia)’를 향한 위대한 지적 모험
심리학은 현존하는 인문사회계열의 학문들 중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인 19세기 후반에 탄생했다. 특이하게도 심리학에는 생년(生年)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생리학자인 빌헬름 분트가 라이프치히대에 심리학 실험실을 만들었던 1879년이다. 분트는 인간의 감각 경험은 물리학적인 현상과는 다르다고 믿었다. 인간이 무지개를 지각하는 심리적인 현상과 분광기가 보여주는 빛의 스펙트럼 현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인간의 직접적인 경험을 실험적 방법을 통해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실험심리학의 효시다. 이처럼 심리학이 19세기에 탄생했다고 해서 그 이전에는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탐구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원전 4~5세기 무렵 서양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가 성격유형론을 제안한 것이 그 좋은 예다. 이렇게 심리학적인 관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다양한 이론들을 고려한다면, 심리학의 역사는 전통적인 ‘문사철(文史哲)’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8호 2019-08-02 16:14
디지털화된 새로운 사회적 경험 구조에 대한 탐색
미디어 연구의 ‘20세기’란 어떤 의미일까 묻는 일은 조금 새삼스럽다. 인류의 기술 문명이 미디어를 낳았지만, 점차 우리 스스로가 미디어에 포획되고 지배됐던 시대가 바로 20세기였기 때문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기술에 대한 물음(Die Frage nach der Technik)」(하이데거가 1953년 11월 8일 뮌헨공과대에서 했던 강연 논문)에서 인류 문명에 대한 ‘닦달(Ge-stell)’로서의 기술의 대표적인 사례로 당대의 미디어를 거론한다. 그 자체가 곧 인류가 직면한 존재론적 재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인들의 경고에 대중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각종 전자 미디어는 놀라운 속도로 대중들의 호기심을 사로잡았고, 또 그것의 영향력에 대한 대중들과 엘리트들의 공포도 함께 커져만 갔다. 20세기 미디어 문명은 인류가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술들의 향연이었고, 그로 인해 현실 그 자체와 경험의 양식이 새롭게 탄생했다. 기술과 근대성의 결합에서 출현 미디어 연구는 바로 이러한 기술과 근대성의 결합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출현했다. 그것은 새로운 기술 현상의 탐구였으며, 또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질서에서 탄생한 근대성의 독특한 경험에 대한 탐구였다. 그렇기에 아무런 지적 상속도 없이 시작된, 그야말로 ‘맨땅에서’ 시작한 학문이었다. 하지만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기술·소비 문명 ‘유토피아’를 구축하는 유수한 대학들은 장차 그것이 현대인들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영역에 걸쳐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를 너무 잘 알았으며, 이 문제를 종합적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접근해 나갔다. 수십 년 동안 이들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질문―‘과연 미디어는 효과가 있는가’―을 던졌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다양하게 답변해 왔다. 라디오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는가? 영화가 대중들의 전쟁 참가를 더 많이 이끌어 낼 수 있는가? 신문이나 방송이 유권자의 투표 행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금연 광고의 메시지를 어떻게 구성하면 더 많은 금연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TV를 많이 보면 정말로 바보가 되는가? 게임에 더 많이 몰입한 사람이 정말로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큰가? 등등. 비판적 미디어 연구는 이 문제를 정반대의 관점에서, 즉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했지만, 문제 틀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대중들을 미디어―메시지의 이데올로기―효과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 놀랍게도, 지난 20세기 미디어 연구가 내린 결론은 결국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미디어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 어떤 효과도 절대적인 것으로 확정되고 검증되지는 않았다. 효과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아쉽게도 그 ‘때’와 ‘장소’를 정확히 특정하는 것은 연구자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다만 무수히 많은 가능성과 새로움에 대한 관찰이 질문을 대체했다. 그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20세기 미디어 연구의 화려했던 한 시대의 표상이었다. 그 사이에 언론사, 방송사, 혹은 다양한 영역의 ‘콘텐츠 기업’은 부지기수로 늘어갔으며, 이들은 뭔가 뻔한 ‘나인투파이브’의 삶을 기피하는 젊은 구직자들의 열광적인 숭배의 대상이 됐다. 국내에서도 신문방송학과가 개설된 학교는 전국 약 160개 대학으로 늘어났으며, 그 숫자는 가히 전 세계 ‘톱 3’의 수준이었다. 일견 위기를 거론하기에는, 미디어 연구는 어쩌면 너무도 화려했던 한 시대를 보냈다. 미디어를 ‘도구화’ 했던 20세기 그것은 과연 ‘테크놀로지의 땅에 핀 푸른 꽃’(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재해석한 영화미학자 미리엄 한센의 논문 제목이다. 여기서 ‘푸른 꽃’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 노발리스의 작품에서 온 것이다)이었을까? 아쉽게도 우리가 기억하는 20세기는 기술과 미디어를 극단적으로 ‘도구화’시키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근대성의 주요 양상들에 체계적으로 결합시켰던 시대였다. 초창기의 전자 미디어 기술은 곧장 그것의 경제적, 정치적 가능성을 간파한 제국주의의 귀중한 도구였다. 따라서 그것은 제국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의 토대이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추동한 사회통합적 이념 창출과 정치 선전의 수단이었다. 라디오와 TV, 영화는 대중들의 문화적 인식과 행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우려스러운 도구이면서, 또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프로파간다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1970년대 자본주의의 축적 위기를 해결했던 것은 새로운 정보통신 혁명이었고, 이는 신자유주의적·금융자본주의적 통치성을 출현시킨 모태였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속의 한국이 찾아냈던 돌파구 역시 ‘초고속인터넷’이었지 않은가? 21세기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미디어의 시대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이란 무엇인가? 21세기의 디지털 미디어는 20세기의 미디어와 달리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그것에 대한 정답을 아직은 알지 못한다. 단지 디지털이 보다 민주적이고 대중 참여적일 수 있는 미디어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또 미디어라는 표상 체계 전체를 뒤흔드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경험 양식을 이미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았는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전혀 근거 없지는 않다는 점만은 분명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기술의 본질에 대한 오랜 경고들이 여전히 필요하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가 가져다 준 변화도 놀랍지만, 상업적인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를 통해 서로 접속돼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소셜’하다고 부른다면, 도대체 ‘소셜’의 의미가 과연 어떻게 변해 버린 것일까? 그러한 새로운 변화들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지적 자원이나 유산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것이 바로 21세기 미디어 연구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물음일 것이다. 21세기 미디어 연구에 던져진 질문들 몇 가지 대답은 시도해볼 만할 것이다. 첫째, 새로운 도전은 곳곳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빅데이터와 알고리즘, 인공지능의 시대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지극히 과거의 습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의 환경은 단지 새로운 자본주의나 비즈니스 성장의 동력 문제를 넘어서, 미디어 연구가 자신의 학문적 입지 자체를 새로 설정해야 하는 상황을 창출한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이는 미디어 연구가 오랫동안 던졌던 질문들, 이를 위해 동원한 정교한 사회과학 연구방법론들의 정당성 자체가 훼손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 인공지능의 시대는 우리의 질문에 대해 과학적 방법론으로 ‘추론’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냥 데이터가 정답을 보여준다고 믿게끔 만드는 시대다. 그럼에도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스스로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혹은 ‘아직은 못 한다’). 미디어 연구는 지금부터 무엇을 질문해야 할까? 그리고 질문의 능력을 어디에서 확보하고 또 길러 나갈 수 있을까? 둘째, 생각보다 우리는 디지털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디지털이라는 기술적 대상에 대해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역량은 지금까지와는 전적으로 다른 지적 태도를 요구한다. 미디어는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을 둘러싼 일종의 환경이 됐지만, 그것이 갖는 도구로서의 속성, 도구와 환경 그리고 인간의 관계에 대한 보다 수준 높은 통찰은 여전히 부족하다. 셋째, 디지털 시대의 초연결 사회 자체가 낳고 있는 새로운 현상들에 대한 지적·정치적 관심은 여전히 깊어져야 한다. 플랫폼이 지배하는 미디어 환경이 기존 언론이나 뉴스의 정당성, 진실성이라는 문제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 모두가 항상 접속된 환경에서 빠른 속도로 전파되는 정보들의 가치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저널리스트는 이런 환경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일을 하는 존재인가, 혹은 할 수 있는 존재인가? 미디어 중심적인 삶의 관습들이 우리의 경험 구조를 어떻게 바꾸는가? 우리는 제주도 여행을 즐기는가, ‘#제주도 여행’을 즐기는가?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창출해 내는 정치의 모습은 무엇이며, 앞으로 그것은 더 나아질 수 있는가? 분명히 기존의 미디어 연구의 성과들이 대답하기 몹시 곤란한 사태들이 눈앞에 점점 더 다양하게 펼쳐지기 시작하고 있다. 또 이 문제들은 기존의 미디어 연구의 전제 자체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한 편으로는 매우 당혹스럽지만, 또 그만큼 지적 도전의 흥미를 자극한다. 21세기의 미디어 연구를 재구성하는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디지털화된 새로운 사회적 경험의 구조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탐색일 것이다. 잊혀진 자원들, 혹은 잘못 이해된 자원들이 새롭게 발굴되고 소개될 필요가 있다.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에 대하여 끈질기게 관찰하는 눈이 함께 필요하다. 미디어 연구는 20세기에도 그랬듯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의 공적인 삶의 중요한 차원을 탐색하는 학문적 활동임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가 가져다 준 변화도 놀랍지만, 상업적인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를 통해 서로 접속돼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소셜’하다고 부른다면, 도대체 ‘소셜’의 의미가 과연 어떻게 변해 버린 것일까? 그러한 새로운 변화들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지적 자원이나 유산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것이 바로 21세기 미디어 연구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물음일 것이다.
17호 2019-07-26 17:43
미디어 연구를 이해하는 주요 저술들
윌버 슈람, 『언론학의 기원』(1994): 근대적 제도로서의 ‘언론학(매스 커뮤니케이션 연구)’이 확립돼 나갔던 과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 슈람은 말년에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학문 분야가 싹터서 자리 잡아가는 과정, 즉 ‘학사(學史)’를 구상하고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그 생전에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했고, 그의 후학들이 이 원고를 발견해 미완성 부분을 채워 넣어 책으로 펴냈다. 존 톰슨, 『미디어와 현대성』(1995):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왜 근대성(모더니티)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자리잡게 됐는지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분석.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비판이론의 유연한 확장을 통해 미디어를 사회이론 속에 적극적으로 통합하려는 야심찬 시도다. 아르망 마틀라르, 『커뮤니케이션: 전쟁, 진보, 문화』(1991): 20세기 매스미디어 연구 속에 내재돼 있던 시대정신에 대한 비판적 탐구. 매스미디어와 상대적으로 배타적이었던 커뮤니케이션의 개념을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차원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다.
17호 2019-07-26 17:45
포스트휴먼의 시대, 새로운 신학은 어떤 모습일까?
서구의 학문은 신학에서 출발했다. 철학에서 문학 또 자연과학에서 사회학까지 신학의 개념들과 세계관에 뿌리를 두지 않은 학문은 없다. 신학과의 대화와 대립 또는 긍정과 부정을 반복해온 역사는 서구 학문의 한 부분이고 따라서 신학의 역사는 모든 학문의 역사의 한 부분이다. 19세기 서구사회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신학은 학문의 중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지만, 신학에 대한 이해 없이 서구 학문의 역사나 추구해온 가치의 깊이를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신이 모든 사유의 중심이던 시대가 지나고 계몽주의와 함께 인간의 이성이 진리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시대가 등장하면서 세상에 대한 신학의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인 설명은 설득력을 잃기 시작했다. 인간의 이성을 믿었던 근대라는 시대 역시도 20세기에 와서는 그 한계를 드러냈다. 이성이 배제된 인간 이해의 공백을 메울 대상으로 떠오른 개념은 한때 무의식이었고 언어였고 타자였다. 그마저도 21세기 포스트휴먼이라는 인간의 경계와 의미를 되묻게 하는 인공지능과 사이보그로 진화된 인간이 등장하는 시대가 예고되면서 무의미해질 위기에 처해 있다. 근대 서구 신학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 근대 서구사회의 세속화 근대는 서구사회의 세속화를 의미했다. 그때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교회와 신학의 권위는 정당성을 스스로 증명하도록 요구받았다. 18세기 이후 교회는 국가권력과 결탁이 아닌 양심에 이끌린 믿음의 공동체란 인식이 자리잡았고, 신학은 대학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나나기 시작했다. 신학이 어떤 학문이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학문인지에 대한 안팎의 오해는 신학의 정체성 위기를 낳았다. 신학의 공공성은 교회와의 관계, 즉 교회의 믿음을 시대에 맞게 정립하는 기능으로 국한시키는 경향도 나타났다. 학문이 과학성을 담보해야 근대 대학의 학문으로 인정받던 시기에 신학도 그 학문성을 조직신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 증명하기도 했다. 세상에 대한 신학적인 진단과 분석이 무의미해지던 19세기에 등장한 진화론과 사회주의는 신학의 위기를 가중시켰다. 이런 정체성의 위기는 근대사회에 대한 신학의 입장 정리를 요구했고, 그 결과 신학은 세상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입장과 이런 변화를 세속화로 규정하고 저항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입장으로 나눠지게 됐다. 20세기 신학은, 인간 이성의 힘으로 세상의 평화와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19세기 유럽의 희망이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으로 깨지면서 시작됐다. 그 희망이, 서구가 식민주의 지배를 통해서 갖게 된 우월의식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은 20세기 신학의 방향 설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와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된 유럽의 전체주의는 신학이 세상의 정치와 억압의 구조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만들었다. 신학을 초월의 진공상태가 아니라 정치와 갈등의 현실 속에서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20세기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 합의를 말할 수 있다.
16호 2019-07-14 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