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은 단순한 ‘시간표’가 아니다. 101년 전 일본 도쿄에서 조선유학생들이 앞장서 ‘독립선언’을 외쳤던 역사의 시간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이들의 외침은 이후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구현됐다. 그러나 영원한 청년정신이 담긴 2·8독립선언은 3·1만세운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됐다.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이 2·8독립선언의 의미를 짚었다. 아래의사진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최승만(崔承萬) 사진첩(5)』에 수록된 것으로, 1919년 2·8독립선언의 주역 7인이 1920년 3월 26일 도쿄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출감한 직후 찍은 기념사진이다. 2·8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총 11명의 주동자 중 7명의 학생이 가운데 열에 나란히 앉아 있다. 맨 왼쪽부터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이다. 사진에 는 먼저 출감한 김상덕과 이종근, 2·8독립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간 이광수와 최근우가 빠져있다. 앞줄 왼쪽부터 최원순, ○○○, 최승만, 장영규이고, 삼열의 왼쪽부터 ○○○, 변희용, 강종섭, 이봉수, ○○○이다. 변희용, 최승만, 강종섭 등은 1919년 2월 12일 히비야공원 2차 시위, 2월 24일 히비야공원 3차 시위를 기도했다. 일제 측 자료에 의하면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는 200여명의 유학생이, 2차 시위 때에는 100여명, 3차 시위 때에는 150여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또 하나 이 사진에서 눈에 띄는 복장은 최팔용이 입은 흰색 두루마기이다. 출감 당시의 옷은 거사 당일의 복장이다. 조선청년독립단의 대표 최팔용은 이 날 아침 일본 땅 도쿄에서 두루마기의 옷깃을 여미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쿄 유학생들이 세 차례나 굴하지 않고 시위운동을 결행했던 이유, 나아가 김마리아 등 여러 유학생들이 조선으로 건너가 각자의 방식으로 3·1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절실하게 했던 것일까? 이것을 알 수 있는 단서가 2·8독립선언서에 담겨 있다.2·8독립선언에 담긴 민주주의 정신2·8독립선언서에는 “오족(우리 민족)은 일본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 폭력 하에 오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하였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때에 당연히 바로잡을 것을 세계에 구할 권리가 있다”고 밝히고 독립 이후의 조선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 신국가를 건설”할 것을 천명했다.우리는 이 선언서에서 무엇보다 일제로부터 독립 후에 만들 신국가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임을 선언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가운데 최초로 공개적으로 ‘민주주의’가 천명됐기 때문이다. 2·8독립운동의 시작을 1918년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 종식 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선언에서 촉발됐다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근인(近因)에 불과하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8월 한국강제병합의 과정에서 조선의 청년들은 대한제국이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했다. 1906년경 당시의 계몽잡지에는 “국가는 국민 모두의 공동체이니, 군주 한 사람의 사유물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이미 제창되고 있었다(「국가의 본의」, <대한자강회월보> 3호, 1906.9.25). 일제강점을 전후해 국외로 망명한 신채호, 박용만, 안창호, 김규식 등의 인사와 일본에 유학한 조소앙, 신익희 등의 청년들은 전제정치에 대한 대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