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작가로서 작품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서
다른 세상의 문을 계속
열어갈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한데,
다른 나라의 언어가
그런 상상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법률사무소 ‘보다’의 정소연 변호사는 ‘다중 직업인’이다. 그는 변호사뿐만 아니라 번역가로, SF소설을 쓰는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와 철학과,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해 변호사가 된 후 2018년까지 서울대 사회복지학 석·박사 통합과정에서 공부했던 그는 2019년 방송대 중어중문학과에 편입해 공부의 새로운 여정을 다시 시작했다. 오랜만에 학생 신분으로 돌아오게 돼서 기쁘다는 정 학우. 다양한 직업을 개척한 그는 어째서 새로운 공부에 뛰어든 것일까?
내게 유리하게 불공평한 세상
“고등학교 시절 별명은 ‘386’이었어요. 제게 붙여진 이 숫자는 전학 간 지 3일 만에 치러진 400점 만점의 수능 모의고사 점수 때문이었어요. 마산에서 살다 IMF 때문에 일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가자마자 전교 1등을 했거든요. 비평준화 고등학교의 내신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저는 전교생들의 석차를 1등씩 깎아 버린 ‘모두의 적’이 됐죠.”
정 학우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이 그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정 학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하고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단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비난을 받는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그는 모두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게 됐다. ‘따돌린 아이들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그 아이들도 입시 경쟁의 피해자가 아닐까’라고.
“어쩌면 우리 사회가 공부 잘하는 사람들에게만 너무 호의적인 인식과 대우를 하고 있고, 그들에게만 유리한 사회 제도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단지 공부를 좋아했고 그것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재능’ 같은 것으로 작용했을 뿐이에요. 다른 친구들은 다른 분야에 재능이 있어서 그걸 좋아하고 열심히 하지만, 우리 사회가 공부를 잘하는 재능에만 훨씬 더 가치를 부여하다 보니 불공평한 상황이 발생하고 피해자가 나오게 된 거죠.”
‘내게 유리하게 불공평한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를 만들게 된 계기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찾아왔다. 정 학우는 공부가 재미있어서 8년간 대학에 다녔다. 사회복지학과 소속이지만 졸업과는 상관없이 흥미를 느끼는 다른 학과 과목을 마음껏 수강했다. 어느 날 학과 사무실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재학 연한이 다 찼기 때문에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졸업하기 위해 수강 과목들을 정리해 보니 의도치 않게 철학과 복수전공 학점도 채울 수 있었다.
캄보디아·베트남, 여학생들의 세상
그 전화가 아니었다면 그는 ‘룸펜’으로 계속 살았을 거라며 웃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글을 쓰면서 학교에서 좋아하는 강의를 들으며 어슬렁거리는 생활. 그는 공부를 잘하는 재능을 살리면서 SF작가보다 직접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해보려고 했다. 이때 로스쿨이 생긴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원했다.
“변호사가 된 후 초청을 받아 캄보디아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했어요. 이를 계기로 열악한 시설과 교육환경을 접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제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직종에 있는 분들보다 이들에 대해 관심을 더 갖고 지원할 수 있는 처지라는 것에 감사했죠. 베트남과 캄보디아 그리고 한국에 있는 40여 명의 여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기 시작했어요.”
더 많은 여학생들이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보다 많이 키울 수 있도록, 정 학우는 전액 사비로 충당하는 1인 순환 체계를 갖춘 ‘보다 이니셔티브(Boda Initiative)’를 2017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장학재단의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기본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또 현지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여학생들을 선발하고 있다. 정 학우는 캄보디아 캄퐁참 웨스턴대(Western University) 도서관에도 300권의 책을 기증했다.
“아직 네팔에서는 여자 아이가 월경을 하면 헛간에 가둬 놓는 일까지 있어요. 21세기에도 여전히요. 재능 있는 여아들도 남자 형제들이 학교에 가는 동안 학업을 포기하고 동생들 밥상을 차리거나 부모의 농사일을 도와야 해요. 그렇지만 이들이 대학 공부를 하고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면 여성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해서 그 사회가, 우리의 세상이 바뀌는 것 아닐까요? 고등교육은 ‘계몽’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이죠. 그 바뀐 세상을 제 생전에 볼 수 없다고 해도 말입니다.”
중국어 공부하는 SF소설가의 세상
정 학우는 로스쿨 재학 당시 두려움으로 지옥 같은 1년을 보냈다고 한다. 시험과 평가만으로 상처받으면서 ‘나는 공부를 좋아해’라는 확신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경험하지 못했던 두려움이 체화되는 것이 싫었다. 공부가 가져다준 두려움을 공부로 해소하기로,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공부의 마지막 기억이 두려움과 상처가 되면 안 될 것 같아서다.
“로스쿨 졸업반인 3학년 때 상대평가 제도가 도입됐어요. 하위 20%에 속하면 유급이 되고, 유급 두 번이면 졸업을 못 해요. 경쟁에 지배당하면서 두려움으로 생긴 상처가 컸죠. 방송대를 통해 하고 싶은 공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성인학습자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방송대가 한국에 있으니까요. 상처를 치유하고 있어요.”
로스쿨 재학 당시 소진된 정신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잠들기 전에 한 편씩 봤던 일본 드라마였다. ‘일드’ 1천여 편을 보면서 자막과 소리로 배웠지만, 그는 매우 능숙하게 일본어를 구사하고 있다. 정 학우가 언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재학시절인 2005년 만화 우주류의 스토리를 맡아 과학기술창작문예서 상을 받아 등단한 후 꾸준히 창작 활동도 펼치고 있다. SF작가로서 작품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세상의 문을 계속 열어가는 상상력이 필요한데, 다른 나라의 언어가 그런 상상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나 재판 업무를 진행하며 틈틈이 짬을 내 공부하고 있죠. 스마트폰 앱으로도 강의를 들을 수 있으니 접근성이 높고, 반복해서 들을 수도 있고요. 몇 년간 중국어 개인교습을 받았는데 수업의 깊이와 방향이 달랐습니다. 방송대 첫 학기를 시작하자마자 ‘와 이게 진짜 공부구나’ 싶었어요. 중간·기말 기간에는 오랜만에 ‘시험 폐인’이 됐죠(하하). 다른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 방송대에서 즐겁게 만들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