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강성남의 그노시스

근대 심리학의 아버지, 빌헬름 분트(Wilhelm Maximilian Wundt)는 인간이 경험하는 ‘현재’의 길이를 측정했다. 약 5초 정도라고 했다. 이 5초의 객관적 시간 단위는 주관적 경험에 따라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자꾸 빨리 가는가? 기억할 게 없다면 그 시기가 짧게 느껴진다. 반대로 기억할 게 많으면 시간은 길게 느껴진다. 회상 효과(reminiscent effect)다. 코로나 때문에 새로운 경험이 차단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유수나 시위를 떠난 화살이 아니라 광속으로 지나는 것 같다.


최근에 필자에게 인상적인 사건은 두 가지다. 필립 공의 사망과 삼성그룹이 사회에 내놓은 예술작품이다. 이를 보면서 인간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을 발견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 공에게도 생전에 깊은 한이 있었다. 그는 “이 나라에서 자식들에게 자기의 성을 물려주지 못하는 남자는 내가 유일할 것”이라고 신세를 한탄하곤 했단다. 왕실 가문의 성을 이어받게 돼 있는 전통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덴마크 왕자였던 안드레아스와 바텐베르크 가문의 앨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왕실 출신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국서(國壻)가 된 뒤 필립 공이 제일 먼저 포기해야 했던 것은 국적과 왕위 계승권. 그는 결혼을 결심한 뒤 영국인으로 귀화했고, 성(姓)도 바텐베르크에서 마운트배튼으로 바꿨다. 게다가 그리스 정교회에서 성공회로 개종까지 했다.

 

진화심리학에서 행복의 관점은 비관적이다.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게 프로그램화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 필립 공과 삼성그룹의 예술작품 기부는,
세상이 진화심리학의 주장대로 돌아가지만은

않음을 보여준다.


1952년, 조지 6세가 갑자기 숨지면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26세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대관식에서 필립 공은 여왕에게 무릎을 꿇고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1997년 결혼 50주년 기념식에서 “내가 할 일은 첫째도, 둘째도, 마지막도 여왕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여왕이 하는 대로 하라(Do as the queen does)’는 왕실의 규칙을 그는 죽을 때까지 착실하게 지켰다.
그가 초대 세계자연기금 회장을 맡아 세계 동식물 보호에 앞장섰다는 걸 알고 필자도 몽골에서 크레인과 가젤 보호 캠페인에 참여한 적이 있다. 캠페인 후 두 달 남짓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후유증을 겪었지만, 정신은 행복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시계를 15여 년 전으로 돌려봤다. 필자가 기획처장 보직을 맡았던 그 즈음에 삼성에서 복지재단을 만든다고 발표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나 단체에 지원하는 목적이다. 총장의 지시로 제안서를 만들었다.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평등하고도 질 높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제안은 거절당했다. 당시엔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이번 삼성의 예술품 기부는 그때의 실망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필립 공은 평생 여왕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것을 평생 행동의 지침으로 삼고 살다 죽었다. 그의 삶에 영국인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애도의 물결이 그걸 보여줬다. 삼성그룹 회장은 생전에는 우리에게 다소 실망을 줬지만, 사망 후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두 인물의 죽음과 그 후의 삶에 대한 평가를 보면서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진화심리학에서 행복의 관점은 비관적이다.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게 프로그램화돼 있다는 것이다. 행복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오로지 유전자의 번식을 위한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란다. 결국 인간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세상은 진화심리학의 주장대로만 돌아가지 않음을 두 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19세기 폴란드 시인, 노르비트는 인생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먹고 사는 일, 재미있는 일, 의미 있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가 부족하면 그 사람의 생은 드라마가 된다. 두 가지가 부족하면 비극이 된다고 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지만, 돈이 많으면 행복할 가능성은 커진다. 돈으로 행복을 사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돈을 쓰고 이야깃거리를 남기는 소비를 하면 된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은 행복감의 유효기간은 2년 정도라고 했다. 그 뒤로는 애초의 행복감이 40% 수준으로 감소한다는 것. 물질적 행복이란 이처럼 휘발성이 강하다.


삼성이 이번에 우리에 보여 준 것은 ‘힘의 본보기’가 아니라 ‘본보기의 힘’이다. 힘의 본보기는 예술품의 수집력에서 충분히 보여줬다. 그렇게 수집한 예술품을 사회에 기부한 데서 재벌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본보기의 힘’을 제시했다. 


삼성이 기부한 예술품은 우리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 작품을 대하는 우리의 시간을 한참 더디게 할는지 모른다. 작품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늘 현재를 느끼게 될 테니까.


인간 행복의 또 다른 이름, 그건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행복이란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요, 인간 존재의 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방송대 교수·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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