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광복, 잊힌 이름을 찾아서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조국 독립하는 데 남자 여자 가리겠느냐.” 한국의 잔 다르크라 불리며 광복군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지복영이 했던 말이다. 그러나 사실, 역사 덕후나 전문가, 학자를 제외하고는 지복영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지복영이 지청천 장군의 딸이라고 하면, “, 지청천하고 어디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반응할지도 모르지만, 지복영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50세가 넘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강우규, 남자 못지않게 무장 항일운동 활동을 펼친 박차정, 기생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한 김향화를 소개한다.

 

노인동맹당 가입한 강우규

1855년 태어난 강우규는 함경남도에서 한약방을 경영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 전파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19108월 그는 경술국치를 계기로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한다. 이듬해인 1911년 봄, 북간도로 망명해 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면서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도를 모색한다. 강우규는 군자금 조달에 주력하기 위해 박은식이 조직한 노인동맹단에 가입한다.

 

1919년 전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나고 강우규 역시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갖지만 세계 열강으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승인받지 못하자 새로 임명될 제3대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영국에서 제조했다는 폭탄을 입수해 몰래 입국한다. 당시 일본은 입출국하는 모든 사람들을 검문했지만 강우규는 60세가 넘는 노인이었기에 검문을 받지 않아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다.

 

신임 총독의 부임 정보를 탐문하던 강우규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신임 총독으로 92일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서 가지고 다니면서 얼굴을 익혔다. 매일 서울역 앞에 나가 지형지물을 면밀하게 답사하면서 거사를 준비했다.

 

오후 5시 부임식을 마치고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 마코토의 마차를 향해 강우규는 폭탄을 던졌지만, 빗나갔다. 해군복의 두꺼운 혁대에 파편 몇 조각만 박혔을 뿐 사이코는 부상을 입지 않았다. 일본 경찰은 강우규를 체포했지만 설마 노인이라는 생각으로 풀어줬다고 한다. 그는 추적을 피해 다니다 917일 목격자의 신고로 은신하고 있던 집에서 체포된다.

 

강우규는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은 후, 아들에게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19201166세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박차정

박차정은 북한의 초대 국가원수 겸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의 조카딸로, 1910년 지금의 부산(동래)에서 태어났다. 일신여학교에 입학해 항일민족의식과 남녀평등사상에 눈을 떴다. 또한 뛰어난 문학적 기질을 바탕으로 교지 <일신>에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경성부(서울)로 올라와 근우회가 결성되자 가입했다. 근우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돼 선전과 출판 부문에서 활동하던 중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으로 1930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 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광주학생운동 후속 시위와 노동자 파업 주동 혐의로 또다시 체포돼 고문을 당하자, 둘째 오빠 박문호가 건너가 있던 중국으로 망명했다. 망명한 박차정은 국내에서의 항일투쟁 공로가 오빠와 지인들을 통해 이미 중국에까지 알려지면서 공적을 인정받아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위원과 의열단 간부에 선임되고 의열단장인 김원봉과 결혼했다. 혼인한 이후에도 박차정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 교관, 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한·중 연합전선 무장 세력인 조선의용대를 구성하자 여군 격인 부녀복무단 단장을 맡았다. 19392월 장시성 쿤륜산 전투 중 부상을 입고 후유증과 지병인 관절염으로 고생하다가 19445월 충칭에서 34세에 병사했다. 박차정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고, 남편인 김원봉이 월북해 북한에서 장관급 각료를 역임했기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공적에 비해서는 한참 뒤늦은 1995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기생 출신 독립운동가, 김향화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순이는 집이 너무 가난해 향화라는 이름으로 15세에 기생이 된다. 그의 아버지는 먹을 양식이 없어 일본인에게 돈을 빌렸고, 갚을 능력이 되지 않자 딸을 기생조합에 맡기게 된다. 22세가 된 1919년 김향화는 수원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예기(藝妓)가 돼 수원의 유지 및 지식인들과 빈번하게 교류했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전개되고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자 기생들도 만세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만세운동은 1919319일 진주를 시작으로 수원, 해주, 통영 등으로 이어졌다. 진주의 만세운동을 지켜봤던 김향화는 수원에서 기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서도홍, 이금희, 손산홍 등 수원에서 활동하는 30여 명의 동료 기생이 그 뜻을 함께했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에 나섰다.

 

마침내 329일 수원기생조합 소속의 기생들은 거사를 단행했다. 전날까지 밤새 몰래 만들었던 태극기를 치마 속에 품고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핑계로 30여 명이 길을 나섰다. 도착지인 자혜의원에서 그들은 만세시위를 했다. 김향화는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김향화는 자혜의원 근처 경찰서 앞에서 다시 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에 머리채를 잡히며 체포됐다.

 

일본 경찰은 기생들이 이런 짓을 꾸밀 리 없다며,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모진 고문을 가했다. 당시 일본 경찰은 기생들의 만세시위 배후에 거물급 독립투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향화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향화가 만세운동을 한 이후 수원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계속 이어졌다. 당시 양반들도 지식인들도 못한 독립만세를 기생들이 외쳤던 것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만세운동은 좌절과 상실감에 젖은 민족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독립정신을 불어넣는 큰 계기가 됐다. 김향화는 191910월 출소해 1950년에 사망했다. 정부는 2009년 김향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해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김향화의 훈·포장은 그의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수원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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