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6월 20일 아침, 전라남도 고흥반도 끝자락에 있는 소록도 갱생원에서 수용환자 이춘상(1915~1943)이 원장인 스오 마사스에를 살해했다. 당시 총독부 관리들과 일본인들뿐 아니라 조선인 환자들도 경악했다. 조선총독부는 곧바로 ‘흉측한 불량아’가 원장을 살해했다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다음날에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스오 원장을 ‘갱생원의 공로자’로 치켜세우는 기사를 내보내 무마하려고 했다.
사회적으로 가장 밑바닥에 있던 조선인 한센병 환자가 총독부 고위관리를 살해한 이 사건은 한반도 뿐 아니라 일본사회에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국립 한센병 격리시설인 애생원의 원장인 미츠다는 스오를 ‘조선인을 위해서 열심히 도모했으나 마침내 하얼빈역에서 미지의 흉한 안중근에게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에 비유했다. 정말 그의 말대로 이춘상은 흉폭한 인물이었고, 스오는 조선통치의 영웅이었을까? 정답은 당시 소록도 갱생원의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
1933년 소록도에 부임한 스오 원장은 3차에 걸쳐 갱생원 확장공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1932년 792명이던 수용인원은 1940년 6천136명으로 증가했다. 소록도 갱생원은 일본 제국 전체에서 가장 큰 수용소가 됐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이뤄진 환자들에 대한 강제동원과 인권침해였다. 좁은 섬에 엄청난 인원이 수용됐으나 예산은 별로 증액되지 않았고, 부족한 예산은 모두 병에 지친 환자들이 몸으로 짊어져야 할 몫으로 떠넘겨졌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환자들은 갱생원 유지에 필요한 것을 넘어서 전쟁물자 생산에까지 동원됐다. 환자들을 동원하고 감독하는 일본인 직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환자들을 대했으며, 외출도 허용하지 않았다. 직원들의 눈에 거슬리거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구타는 물론이고, 감금실에 갇혀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다. 밤에 몰래 바다를 건너 도망치다가 죽는 환자들도 늘어났다. 감금실에서도 고문당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이 늘어났고, 겨우 살아나오더라도 그들을 기다린 것은 단종수술이었다. 그러나 스오 원장에게 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환자들에게 매월 한 차례씩 참배하면서 은혜에 감사하도록 강요했다. 이춘상은 바로 이 보은감사일에 원장의 인권침해를 고발하는 거사를 단행했다.
이춘상은 누구인가? 그는 1916년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김창숙을 도와 활동했던 이수봉이었다. 이춘상은 14세에 한센병에 걸려 대구 나병원에 입원해 2년간 치료받고 퇴원했다. 퇴원한 이춘상은 만년필, 안경 등 일용잡화 행상을 하면서 대구, 부산, 서울을 오르내렸다. 약간 석연치 않지만, 그는 1939년 봄, 절도교사 등의 죄명으로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곧 한센병이 재발되면서 광주형무소 소록도지소로 보내졌다. 1940년 출소한 이춘상은 곧바로 소록도갱생원에 격리됐다.
당시 어용 신문에 묘사된 소록도는 환자들을 위한 ‘별천지’였지만, 이춘상이 본 소록도는 인권탄압의 현장이었다. 이춘상은 소록도 6천 환자를 위해 스오 원장을 죽여, 소록도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보은감사일 아침, 이춘상은 중앙공원에 도열한 수천 명의 환자들과 직원 앞을 걸어가던 스오 원장의 앞길을 막고, 소리쳤다. “너는 환자들에게 못된 짓을 많이 하였으니 이것을 받아라!” 당시 이 자리에 있던 어린 여성 환자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가 찌르는 장면을 보지 못했지만 외치는 소리는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춘상의 칼은 스오 원장의 가슴팍을 정확히 관통했다. 관사로 급하게 옮겨진 스오 원장은 몇 시간 후 사망했다.
사실 이춘상은 이 거사를 오랫동안 치밀하게 계획했다. 직원들의 눈을 피하려 그는 소록도에서 실시한 환자들의 연극 「이차돈의 죽음」에서 망나니 역할을 맡아 칼로 찌르는 연습을 했다. 거사 후 소록도 공회당에서 열린 재판에서 이춘상은 소록도에서 죽어간 한센인들을 하나씩 열거하며 소록도의 상황을 폭로하고 소록도 당국의 처사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재판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대구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 항소했지만, 일제 재판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1943년 2월 19일 대구 형무소에서 향년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실 이춘상은 일제 35년의 지배 기간중 조선에서 가장 높은 직위의 관료에 대한 응징에 성공한 것이었다.
일제에 의해 고통받던 소록도 6천 환자를 대표해 원장을 살해한 이 의거는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2003년 결성된 ‘이춘상 선생 기념사업회’는 총 세 차례에 걸쳐 보훈처에 이춘상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모두 기각당했다.
필자는 보훈처가 여전히 한센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춘상 의거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의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라 신문 칼럼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기념사업회는 2019년 ‘이춘상 기념사업회’로 명칭을 바꾸고 더 많은 사회 각층의 인사들이 참여해 조직을 확장했다. 그 결과 올여름 안에 소록도에 최초로 이춘상 의사를 기념하는 상징조형물이 설치될 예정이다. 이춘상 의사에 대해 더 많은 학계와 사회적 관심이 쏠려,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의거가 제대로 평가받고 독립유공자로도 인정받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