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발간하는 교내 소식지에 나의 작문이 실리기 시작했다. 졸업 무렵 담임선생님이 “어이 윤창석이, 나중에 커서 작가되면 이름 깨나 날리겠다. 계속 정진하도록!”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그저 졸업생 한 명 한 명에게 해주는 지당하신 말씀인 줄 알았다.
중학교 1학년 때 문예반에 들어서 1년을 보내고, 2학년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연극반에서 연기실습과 대본 습작을 열심히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연극반 활동을 했다. 노력의 대가로 진주에서 열리는 개천예술제 전국학생연극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3년이나 내리 받았다. 국무총리 상이었다.
그때 심사위원장이 서라벌예대 이광래 교수였다. 하시는 말씀이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학교에 지원만 한다면 장학생으로 뽑아줄 수 있으니, 꼭 응시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완고하고 외고집이셨던 부모님의 절대 반대로 그만 상경을 포기하고 지방대학인 국립 진주농과대학(현 경상국립대)에 입학해야만 하는 아주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문학을 포기할 수 없어서 마음먹고 닥치는 대로 독서에 파묻혔다. 지금 80이 된 이 나이까지 읽어 본 책이 대략 1천여 권은 족히 될 듯하다. 시작(詩作)도 꾸준히 하고 있고, 수필 문학도 쉼 없이 길을 닦았다. 진주중학교 시절 함께 글을 썼던 문우로는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을 지낸 정목일, 시인 신찬식 등이 있다.
남은 인생 열심히 창작에 몰두하고자 두 번째 대학 문턱을 넘어서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의 담뱃대로 머리통을 맞아가며 익힌 한문 공부를 더 깊이 해보려고 한문학원에 등록해 빡세게 달리기도 했다. 국립경상대 중문과의 한상덕 교수와 같이 피터지도록 원없이 공부했던 기억도 새롭다. 그러나 너무 일찍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모든 학업을 일체 중단하고 말았다. 그렇게 늙어갔다.
만시지탄이다.
그러나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지 않던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국문학 학업도 끝을 보고, 문학에 정력을 쏟기 위해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1학년에 입학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