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2월 목련이 피던 어느 날, 동인천중학교 앞 건물 인천지역학습관 107호 유아교육과 OT에서 방송대와 첫 인연을 맺었다. 내 나이 꽃다운 25세 미혼, 부평에서 작은 학원을 운영하는 새침하고 여리여리하면서도 겁 없던 아가씨 때다. 100여 명이 꽉 차게 들어찬 강의실엔 낯선 이들뿐, 내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렇게 뭘 모르고 입학한 방송대는 내 인생의 코디네이터가 됐다.
1991년 1학년에 입학하고, 1992년 2학년 때 결혼, 이듬해에 큰아이를 출산했다. 1994년 4학년,학과 회장을 하며 둘째 딸 아이를 출산했다. 내 인생의 전환기를 온통 방송대 생활 속에 보냈다. 등에 아이를 업고 자장가 대신 시험공부를 하면서 아이를 달랬고, 둘째아이를 출산한 지 한 달 만에 대만으로 졸업여행을 가서 남들이 쇼핑할 때 관광버스 안에서 유축을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당시 5년제 학사과정을 마치고 1996년 2월 한완상 총장 표창을 받는 영광을 안고 방송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해 8월 어린이집을 개원했다. 방송대에서 유아교육을 한 이력 하나로 시작한 어린이집이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개원 다음 해인 1997년 IMF를 맞아 전국적인 대혼란이 시작되었다. 회사가 도산하고 자영업자도 살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가정주부들도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에 뛰어들어야 했다. 1980년대 이후 여성의 경제활동이 크게 증가 되며 맞벌이가 확산됐다는데, 아마도 IMF 그 즈음부터 그 추세가 급격히 증가하지 않았나 싶다.
3세 미만의 영아들의 보육현장이 좋지 않아 관계자들이 선진국형 보육시스템을 구축하고자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를 찾아다니며 만들어 낸 어린이집 가운데 영아 전담 특수 어린이집이 있다. 국내에서도 운영하는 곳은 몇 개 안 된다. 필자가 운영하는 색동원어린이집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1호 민간 영아 전담 어린이집이다. 당시 어린이집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국공립이나 법인이 아닌 민간시설에 국가가 인건비를 지원할 수 있도록 제도화됐다. 이런 노력과 지원에 의해 안정된 여건 속에서 어린이집 교사들은 아이들을 보육하며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지만 방송대를 다니며 단단해진 나는 더 이상 25세의 여린 아가씨가 아니었다. 국가에서 만든 방송대를 졸업해, 국가가 지원하는 어린이집을 설립하고 지금까지 27년째 자리를 지키며 운영하고 있다. 그 사이 학교를 다니며 출산한 큰아이는 올해로 29세, 둘째는 28세가 됐다. 내가 입학했을 때보다도 나이가 많다.
2020년 인천지역 제20대 총동문회장을 맡아 가장 먼저 한 일은 우리 동문회의 역사를 정리해 보는 일이었다. 선배님들과 각 학과 동문들께 자문을 받아 소중한 『인천지역대학 37년 변천사』를 7인 발간위원과 함께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방송대 안에서 숨 쉬고 있다. 50대 중년 아줌마가 됐지만, 1991년에 맺은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인천지역의 훌륭한 동문들과 공부와 삶의 의미를 공유하면서 인천지역 총동문회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방송대인은 내가 사회에서 만난 분들과는 사뭇 다른 점이 많다. 공부하시는 분들은 나이가 들어도 10대요 20대다.
늘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 분들이라 순수함, 열정, 도전 정신이 강하다. 그래서 지금의 나도 존재하는 것 같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다. 하늘을 나는 새, 들에 핀 꽃, 바다 끝 수평선. 그 중 가장 아름다운 건 대한민국 방송대다. 나는 이 아름다운 곳에서 만난 분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