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이나 정치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 양평의 공직자로 40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김선교 국민의힘 국회의원(여주·양평)의 평소 지론이다. 그는 9급 지방공무원에서 시작해 최연소 3선 양평군수를 역임하고, 지난해 4월 치러진 제21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유년 시절에는 농사를 짓는 아버지 밑에서 틈틈이 농사일을 도왔다. 양평에서 초·중·고를 나온 이후 양평을 떠나본 적이 없다. 이런 이력을 가지고 있어 ‘흙수저의 성공신화’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 입지전적 인물로 통한다. 안정된 공무원직을 박차고 나와 험한 선출직 공직자의 길에 설 수 있었던 것도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하는 선거’를 치르면서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주·양평 유권자들은 지역을 키우는 리더, 현장의 수요를 누구보다 잘 아는 리더, 과감한 추진력과 두둑한 배짱을 지닌 리더가 필요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여의도로 입성한 지 16개월 남짓 지났지만 그의 시선은 변함없이 지역 주민들을 향해 있었다. 그가 향한 또 다른 시선은 인생의 지름길이 되어 준 방송대에 가 있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
김 동문과 방송대와의 인연은 직장 상사의 권유로 시작됐다. 그는 “당시 초대 민선군수인 고(故) 민병채 군수님을 모실 수 있었다. 특히 1년 6개월 동안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거의 함께 생활하다시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배우는 게 많았다”며 “그때 느꼈던 것들은 지금 나의 삶을 만드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회고했다. “어느 날 민 군수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김 실장, 공부해라. 공부는 끊임없이 해야 한다. 나중에 어떤 자리에 불려갈지, 어떤 일을 할지 모르는데 공부를 하고 미리미리 학위를 준비하는 게 좋지 않겠어?”
학창 시절에는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대학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면서기로 일할 때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또래 대학생을 보면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공직사회 전반에 고학력 바람이 불고 있던 터였다. 취업난과 불안한 경제 탓에 안정된 직장을 찾는 젊은이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굳이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간절함은 없었다. 양평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행정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신감이 넘쳐서 그랬으리라.
하지만 좀더 멀리 바라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양평의 발전에 더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학력이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한편으로는 일이 너무 바빠 괜히 입학만 해놓고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고려해 선택한 곳이 방송대 행정학과였다.
43세 ‘늦깎이 대학생’ 되기를 자처했지만 그가 선택한 공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행정은 자신 있다며 야심차게 시작했는데 현실은 만만치 않았어요. 1학년 때에는 무슨 교양과목이 왜 그렇게 많은지… 온라인 수업, 출석수업, 보고서 작성, 시험 등 학사 일정을 쫓아가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낮에는 현장에 다니면서 지역주민들과 얘기를 나누고,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각종 서류 작업을 하다 보니 늘 업무 과다에 시달렸어요. 그렇지만 집에 가면 중학생 아들 둘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대충하기는 싫었죠.”
졸업하기 전까지는 책상 앞에 앉아 수업을 듣고, 각종 자료를 읽고, 시험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때로는 군립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곳에 가면 방송대 다른 학과에 다니는 학우들이 있어 동기부여도 되고 자극을 받아 더 공부가 잘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매 학기 전액 장학금을 받는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말보다 행동, 머리 아닌 가슴으로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면서 흘렸던 땀만큼이나 지역민을 위해 흘린 땀의 무게가 만만찮았다. 그 흔적이 지역사회 곳곳에 남아 있어 지금의 김선교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7년은 공무원으로, 11년 2개월은 군수로 그의 고향 양평을 위해 흘린 땀은 지역발전의 새 희망을 일구는 밑거름이 됐다.
양평군수가 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공약 이행이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그의 신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거 운동 기간 내내 부르짖은 1호 공약 ‘도시가스 공급’을 추진한 것이다. “면장을 할 때 그랬던 것처럼 급하면 무조건 찾아가는 게 제 방식이었죠. 곧장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찾아가 양평에 도시가스 공급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렸어요. 양평뿐만 아니라 광주, 가평, 연천 같은 데도 전부 안 들어간다고, 만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요. 그 자리에서 담당자와 함께 현황을 조사하고, 각 지자체와 협의해 최대한 빨리 공급될 수 있도록 검토에 들어갔죠.”
도시가스가 들어오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사를 진행하려면 토지 소유주들로부터 사용승낙을 받아야 하는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담당자들이 아무리 찾아가서 통사정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토지 사용승낙을 빌미로 가당치도 않은 큰 사용료를 요구하는 일도 잦았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주민들은 곧 겨울이 오는데 왜 이렇게 공사가 더디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계속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사정해야 했어요. 꾸준히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요. 결국 6개월 만에 도시가스 공급권역으로 확정되는 성과를 거뒀어요. 현재 인구가 적은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군민이 도시가스를 공급받고 있죠.” 1호 공약의 실현이자, 그가 꿈꾸는 ‘생태행복도시, 희망의 양평’을 구현하는 첫 삽을 뜬 셈이다.
군을 책임지는 행정가다운 면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두 번째 공약인 ‘관사를 군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관사를 군민에게 반납하고 어르신들을 위한 공간인 ‘양평군노인복지관’으로 개관했다. 성과를 창출하는 조직으로 변하기 위한 조직문화 혁신에도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불필요한 회의나 서류 보고 등을 없애는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변화를 꾀했다. 결재 역시 팀장이나 부서장, 부군수 선에서 전결되도록 결재권을 하향 조정했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이러한 변화는 공무원의 사기 증진과 업무 효율에 큰 도움이 됐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주민이 체감하는 행정 서비스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 같은 김 동문의 노력은 재선과 3선에 성공하며 행정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특히 그는 지역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고 양평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군수를 하면서 가장 큰 보람 중 하나는 우리 양평 인구가 눈에 띄게 늘어난 점이에요. 군수직을 시작한 후부터 주민등록상 인구가 3,4천 명씩 꾸준히 늘어나면서 상승곡선을 그렸어요. 전국 농어촌 82개 군 단위에서 양평이 7년 연속 인구 증가율 1위를 기록했어요. 더욱 고무적인 일은 양평이 좋아 양평군민이 된 ‘선택형 주민’이 증가했다는 거예요.”
‘넘버원’ 아닌 ‘온리원’ 돼라
김 동문은 양평군수 시절 ‘온리원 양평’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지역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지역에 가장 필요하고, 가장 이로운 것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정책을 폈다. 구체적으로 친환경 생태 행복도시, 헬스투어리즘 도입, 양평 용문산 산나물 축제, 로컬푸드 운동, 양평 종합운동장 건립 등 몇 가지 정책에 힘을 쏟았다.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지역마다 전부 지역 고유의 환경과 특성이 있고, 필요한 부분이 다르며, 해야 할 일이 제각각이에요. ‘선택과 집중’으로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국회에 입성한 이후에도 지역만의 특색을 살리고 차별화된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가장 큰 지역 현안에 대한 물음에 그는 “‘세미원 국가정원화’와 같은 지역 실정을 고려한 정책 추진을 하고 있다”며 “여주·양평만의 특색 있는 명품행복도시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지방자치단체장 출신의 초선 국회의원으로서 뼈 있는 한 마디도 덧붙였다. “민선 지방자치가 시작된 지 2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는 여전히 ‘2할 자치’, ‘반쪽 자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지역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주민이 직접 주인이 돼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이 더 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