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지평을 넓히는 방송대인

“국민건강권 쟁취 노동운동을 하면서 술을 정말 많이 마셨는데요. 고급 잎차를 마시니 속이 편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더라고요. 하루는 부산에 있는 영광도서에서 차(茶)에 관한 책을 우연히 발견했어요. 냉큼 집어서 집에 와서 읽는데 너무 좋았어요. 차는 자연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는 영감이 들었어요.”

 

30년 동안 차를 만들어 온 그를 만나기 위해 경남 하동군 일송제다 차 공장을 찾았을 때, 그의 책상에는 육우다경(육우 지음, 김진무·김대영 공역, 일빛, 2017)과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아비지트 배너지·에스테르 뒤플로 지음, 김승진 옮김, 생각의힘, 2020)이 펼쳐져 있었다. 빼곡한 글씨로 가득한 노트 더미도 함께였다. 강산이 세 번 바뀐 세월 동안 차를 덖어왔는데, 그의 차 공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축구부 출신 노조위원장
법대를 졸업한 부친은 교편을 잡다가 배 사업을 시작했다. 고기잡이배 두 척을 운용한 덕분에 그는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름방학이면 피부가 두 번 벗겨질 정도로 바다에서 수영하며 보냈다. 중학생 때까지는 축구부에서도 활동했다. 축구 국가대표를 지낸 고(故) 정용환 선수가 그의 동기였다. 그러나 공부하라는 부모의 뜻에 따라 일반고로 진학했다.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군 제대 직후인 1987년, 호구지책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 양산지사에 입사했다.

 

1989년,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한 통합의료보험 법안에 대해 노태우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의료보험 통합 문제가 원점으로 돌아갔다. 당시 의료보험체계는 직장조합, 공무원관리공단, 지역조합 등으로 분리된 상황이었다. 국민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의료보험체계를 일원화해야 한다는 그의 소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 인해 경남지역 국민건강보험공단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전국지역의료보험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해 60일에 이르는 전국 총파업 투쟁을 이끌었다. 감봉 3개월, 직위해제 2회, 해고 1년…. 공단이 그에게 내린 처분이었다. 법원에서 승소해 복직했지만, 1991년 그는 퇴사를 결심했다.

 

“노조 전임으로 4년 연속 복무를 했더니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어요. 해고됐다가 복직했는데, 전혀 연고가 없는 곳으로 부당하게 발령을 내더라고요. 국민건강권을 지키느라 이만큼 했으면 됐다 싶었습니다. 좋은 차 만드는 것도 국민건강에 도움 되는 일이니까, 지리산으로 가서 차를 만들기로 결심한 거죠.”

 

기장 바다 촌놈, 하동에 차 공장을 짓다
1993년 하동군으로 이사했다. 돈을 빌려 부모님을 모실 집을 마련하고, 섬진강 변에 녹차 가공공장 ‘일송제다’를 지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찔했고 무모했던 도전이었다. 당시 하동, 구례 일대 지리산 자락에는 약 10만 평 정도의 야생차밭이 있었다. 야생차밭은 있는데 판로가 없으니, 자가 소비 이외는 다 묵혀버리는 찻잎이었다. 그의 차 가공공장에는 한 해에 많게는 100여 농가가 찻잎을 납품하고 가공처리했다. 침체했던 지역경제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면장갑 위에 비닐장갑을, 그 위에 방화 장갑까지 착용하고 250℃의 무쇠솥에서 하루에 1톤가량의 야생차 잎을 덖는다. 일 년에 두 달가량을 이렇게 보내면 몸무게도 쑥 빠진다.

 

통상 1년 중 4월부터 7월까지가 녹차를 만드는 기간이다. 4~5월에는 녹차를 가공하고, 6~7월에는 홍차나 발효차를 가공한다. 그 외 기간에는 새로운 음료나 액상 제품 등 신제품을 개발한다. 등산하면서도 호주머니에 휴대할 수 있는 액상 차 등이 그것. 최근에는 알코올 분해 능력이 탁월한 액상 음료를 개발했다. 술(酒)을 통해 차(茶)를 알게 된 그가 애주가들에게 바치는 선물인 셈이다.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시절의 인맥들이 처음 차를 시작하는 그의 사업에 많은 도움이 됐다. 현대그룹 계동 본사에서 명절 때마다 노동조합 수익사업으로 그가 생산한 차를 판매해 주었고, 전국해직자들의 조직인 전해투 등의 노동 조직에서도 그의 차를 많이 샀다. 백화점부터 쇼핑몰, 용인 민속촌까지 녹차로만 연 매출 수억 원을 올렸다. IMF도 잘 넘겼다. ‘커피도 외화 낭비’라는 인식이 국민 사이에 퍼지면서, 우리 차 바람이 불었고,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2006년에는 청와대에까지 녹차를 납품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지난해였다. 폭우로 섬진강이 넘치면서 일송제다 공장이 침수된 것. 그나마 복구해 지난 4~5월에 녹차를 생산한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지금은 중국 유학을 마친 아들이 공장에서 그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차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합니다”
30년 동안 차를 만들며 깨달은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차는 평등하다는 것.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차의 역사는 신농씨 때인 약 5천 년 전부터로 보는데요, 차는 약의 일종으로 해독작용 효과가 있다고 신농식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건강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었겠죠. 차는 물로 표현되고, 찻물로 우려져서 사람에게  다가오는데요, 그렇게 표현된 찻물은 우리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것이죠.”

 

늘 책을 놓지 않던 그가 방송대와 인연을 맺은 건 2008년이다. 차의 종주국이 중국이라는 생각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다. 학우들과 2009년 하얼빈공대에서 개최한 어학연수에도 참가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부산지역총학생회장까지 하다 보니 졸업까지 5년이 걸렸다. 김성곤, 변지원 교수의 강의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지금 그는 원광대 동양대학원 예다학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쓰고 있다. 주제는 ‘차 용기 및 제다(製茶) 방법 개선을 통한 대중적 차 음료 개발’이다. 일상에서 차를 편안하게 즐기지 못하는 문화와 더불어 다인(茶人)이 지닌 중국과 일본의 차(茶) 사대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바람이 담긴 작업이다. 30년 동안 축적된 지식과 현장경험을 전한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는 중국, 일본 문화에 젖어서 차는 꼭 다기에 마셔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데요, 이게 우리의 차 문화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라고 생각해요. 3인 이하 대화 중에는 다기를 사용할 수도 있고, 7인 이하에서는 유리 다관을 이용할 수도 있고, 7인 이상이 함께 갈증을 해소하고 건강을 생각해서 마시는 차는 끓여서 차게 만들어 마시면 돼요. 어릴 때부터 차 문화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우유 급식을 차로 바꾸는 방법도 있겠고요. 지금 쓰는 논문으로 일상에서 차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 조성에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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