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인 두보는 자신의 시 「곡강이수(曲江二首)」에서 ‘인생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노래했다. 공자는 나이 70을 가리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즉,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8월 25일, 83세의 나이에 성균관대 일반대학원 유학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공윤현 동문이 딱 그렇다.
공 동문은 2008년 3월 70세의 나이로 방송대 중어중문학과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2014년 3월 76세에 방송대 대학원 행정학과에 입학해 2016년 8월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공부 길은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성균관대 일반대학원 유학과에 진학했다. 그가 말하는 ‘만학의 즐거움’은 평생교육시대인 오늘날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9월 27일 오전 10시, 혜화동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1953년 휴전이 될 때까지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3년 간 서당에서 글공부로 소일했죠.”
1938년 전남 화순군 동면 청궁리에서 태어난 공 동문은 6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해 청소년기에 거쳐야 할 정상적인 교육 기회를 가지지 못했기에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깊었다. 이 아쉬움이 어쩌면 그를 공직에서 물러난 뒤, 공부의 길로 달려가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광주상업고등학교 야간을 졸업한 그는 군복무를 마치고 1966년 행정서기보로 광주지방보훈청에서 공직 첫발을 뗐다. 이후 줄곧 보훈처와 함께 하면서 30여 년을 지냈다. 1988년 8월 사무관 승진시험에 합격해 서울지방보훈청 관리과장으로 옮겼다. 그의 나이 50세때 일이다. 7년 뒤인 1995년 2월 57세의 나이로 서기관에 승진, 춘천보훈지청장으로 발령 났다. 이후 1999년 61세로 정년을 맞기까지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국가직 2급 상당)으로 일했다.
방송대에서 많은 것을 얻었죠.
자유롭게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진학의 실패를 거듭하기도 했고,
없는 용기도 생겼어요.
평생 처음 들은 칭찬으로
새로운 삶의 가치를
경험하기도 했어요.
이 모든 것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자양분이 됐습니다.
30여 년 공직 생활마치고 공부 시작
공 동문이 못다 한 공부에 눈을 돌린 것은 정년 후 성균관 명륜당에서 동양고전 글공부로 소일하던 무렵이다. 2004년 1월에 성균관 석전교육원이 학점은행제(대학과정)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대학 진학을 못해 아쉬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제2의 새로운 만학의 길이 열린 것이다. 공 동문은 성균관 석전교육원 제1기 졸업생으로 ‘전통예술학사’를 취득했다. 여기서 공부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본격적인 ‘만학의 길’에 도전하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새로운 도전은 늘 실패와 좌절, 성취와 기쁨의 두 갈래 길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서울의 한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는데, 여기서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어요. 면접 때 시험관이 ‘70세 고령에 학사과정도 학점은행제 대학과정을 나왔군요’ 하면서, 정규대학도 아니라는 등의 부정적인 언급을 계속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공 동문은 시험장을 박차고 나왔다. “무척 당황했죠. 시험관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면서 서운한 마음을 달랬지만, 쉽게 잊히지 않았어요. 면접 후 불합격 시키면 될 일인데, 면전에서 인격적으로 무시를 당한 것 같았죠. 사회에 나와 첫 번째 겪는 마음 아픈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즈음 방송대에 관한 소식을 우연하게 접한 것이 그에게는 인생 후반의 분기점이었다. 방송대를 다니고 있던 한 선배로부터 자신과 같은 고령자도 진학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동양고전을 익히고자 방송대 중어중문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방송대 입학한 후로는 하루하루가 즐거웠어요. 그 이유는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제도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고령이다 보니 과락을 면하기 위해서 남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했습니다. 책을 봐도, 강의를 들어도 금방 까먹기 때문에 남들이 1을 하면 나는 10을 하겠다는 각오로 매달렸던 거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했는데, 대학원 진학을 위해서 1년을 더 연장해서 3년 만에 졸업했어요.”
중문학과를 졸업한 공 동문은 방송대 대학원 실용중국어학과에 진학할까 생각했지만, 어학 중심인 데다가 공직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했고 사무관 승진을 위해 행정학 등을 공부했던 과거 경험도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대학원 행정학과를 선택했다. 물론 ‘선택’은 그의 자유였지만, ‘결과’는 거듭된 실패로 이어졌다. 두 번이나 입학에 실패했다.
두 번 실패 끝에 방송대 대학원 진학
공 동문은 이 실패의 원인을 ‘70대 후반이다 보니 고령으로 학습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해, 여기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얻었다. ‘고령=학습능력 부족’이란 등식을 깨자는 것이었다.
“마침 예전부터 공부하던 한자 자격시험 공부를 해서 2013년 9월에 한자사범자격증을 취득했는데요. 이걸 세 번째 입학원서를 낼 때 첨부했더니, 면접관이 그 연세에 어떻게 이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냐고 하면서 저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더군요. 면접이 끝나고 면접관 한 분이 ‘서양 속담에 젊은 늙은이가 있고, 늙은 젊은이가 있다’는 말이 있는데, 학우님을 두고 한 말 같다고 칭찬하더라고요.”
이때의 칭찬이 동기부여가 되어 ‘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방송대에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자유롭게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진학의 실패를 거듭하기도 했고, 없는 용기도 생겼어요. 평생 처음 들은 칭찬으로 새로운 삶의 가치를 경험하기도 했죠. 감사한 일입니다. 이 기회에 성심껏 지도해주신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문병기 지도교수, 강문희 교수가 대학원 시절 그의 공부에 큰 힘이 됐다.
4학기 만에 공 동문은 「인정(仁政)에 관한 연구: 논어의 군자상을 중심으로」를 석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하면서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렇게 되자 그의 꿈은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꿈속의 환상’만 같았던 박사학위 취득까지 완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16년 7월 면접시험 과정에서 시험관이 저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행정학 석사 졸업 예정자가 유학 전공 박사과정에 진학할 생각을 했습니까?’라고 묻자, ‘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끌려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시험관이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짓더군요.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의 박사과정 공부는 그렇게 시작됐지만, 순탄할 수 없었다. 70대 후반이라면 대부분 겪고 있을 게 틀림없는 시력·청력 장애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부정맥혈전 증세로 보행 장애를 겪고 있었으며, 고령으로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등 각종 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혜화역에서 성균관대까지 셔틀버스 대신 책가방을 메고 하루에 한 번은 걸어서 등교하는 등 체력관리를 철저히 했어요. 5학기까지 그렇게 보내고, 박사논문을 준비했는데, 논문 심사를 앞둔 지난봄에는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까지 받았지 뭡니까. 폐암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 악물고 약물 치료를 받으면서 논문 심사를 받았습니다.”
공 동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목은 이색의 천인무간(天人無間)적 수양론과 교육론 연구」다. 하늘과 사람 사이에는 원래부터 간격이 없어, 인도(人道)가 천도(天道)와 다르지 않으므로, 한 나라의 지도자는 하늘의 도天道〕에 따라 백성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면, 하늘이 감응한다는 ‘천인감응(天人感應)설’이 주된 내용이다. 그는 공자의 77세손으로 세계족보에도 올라 있다고 귀띔한다. 유학 공부가 어쩌면 그의 천직일지도 모르겠다. 배움에 뒤처진 삶을 살아왔기에, 뒤늦게나마 배움을 꿈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 만학의 외길 인생으로 이어졌다고 그는 말한다.
만학의 즐거움과 진인사 대천명
“오늘날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복지 차원에서나 개인의 뜻있는 삶을 위해서는 쉬지 않고 일과 공부를 통해서 여생을 보낸다면 분명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방송대가 그런 여건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건강이 허락된다면, 학위논문 관련 책을 쓰고 싶다고 밝혔다. “‘진인사 대천명’입니다. 또한 운명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마음이 편하다고 봐요. 책이 완성되고, 또한 다행히 건강이 회복된다면, 청소년을 위한 ‘글공부 서당’을 운영하고 싶어요.”
83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공 동문. 그의 소박한 꿈, 만학의 즐거움이 계속 이어져, 10대 후반에서 80대까지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곳 방송대에 또 하나의 희망의 증거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