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우리 시대를 일구는 문화예술인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대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가방도 사고, 출석수업도 받고

학교 가면서 다정히 손도 잡고

솜사탕도 사먹고

 

1980년대 재치부인, 90년대 국민 여동생영심이의 목소리를 기억하는가? 이 때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거의 다 아는 목소리의 주인공 성우 최수민 씨. 여든이 다된 나이에도 현역 못지않게 TV드라마 조연뿐만 아니라, 성우 후배들을 길러내는 선생님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가, 배우 차태현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방송대 미디어영상학과(구 방송정보학과) 2회 졸업생이라는 것이다. 남편 차재완 씨와 늦깎이 캠퍼스 커플로 유명했다는 그의 인생 이야기가 궁금하다.

 

한 집에 대학생만 4명이라고 

남편 덕분에 항상 웃고 살아요. 태현이는 자신의 끼를 엄마한테 물려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남편이 서라벌예대 66학번으로 영화배우 문희 씨와 동기거든요. 저와 처음 만난 것도 동양방송에서 성우 활동을 할 때였고요. 남편은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어요. 얼마나 끼가 많고 재미있던지 방송국에서 코미디언으로 데뷔하라는 권유도 여러 번 받았죠.”

 

최수민 동문의 천생연분인 차재완 동문도 방송대 미디어영상학과 1회 졸업생. 차 동문도 형편상 서라벌예대를 졸업하고 동양방송국에서 성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차 동문의 구애로 1년 넘게 비밀 연애를 하다 결혼을 했다. 마침 그 당시 동양방송이 KBS로 통폐합되면서 차 동문은 제작부 직원이 됐다. 전속은 계약이 만료되면 자유 신분이지만, 직원은 신분이 보장됐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안정된 것도 잠시. 형제들을 돕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 어려워져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사업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 수밖에 없었어요. 갈 데가 없어 초등학교에 다니던 지현이와 태현이 그리고 남편과 함께 시아주버님 댁에서 6년 동안 더부살이를 했죠. 시아주버님에게도 죄송했지만,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너무 힘들었어요. 낙천주의자인 남편도 가장으로서 얼마나 고통이 심했을까요?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더 똘똘 뭉치게 됐죠.”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어둠의 통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차남 차태현이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당시 인기 있던 이동통신사의 광고를 찍은 후, 최 동문 가족의 발목을 잡았던 경제적 문제가 해결됐다. 남들은 예술대학 입학을 위해 학원에도 보내고 과외도 시킨다는데, 최수민·차재완 동문은 자신들이 직접 발성부터 연기까지 끼고 가르쳤다고 한다.

 

아들 둘이 대학에 다닐 때 저희 부부도 대학생이 됐죠. 사람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나 싶어요. 아이들도 성장해서 이제는 대학 공부를 다시 해볼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방송대 신·편입생 모집 요강을 봤는데, 눈에 확 들어오더래요. 이를 보는 순간 남편은 마치,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일생일대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고 하면서 함께 입학하자고 하더라고요.”

 

불륜인 줄 알았어요

부부는 방송대 입학을 행여 미루기라도 할까봐 곧장 대학로로 달려가 원서를 접수했다고 한다. 남편인 차 동문은 2학년으로 편입하고 최 동문은 1학년 프레시 맨이 됐다. 당시 두 사람이 속한 서울지역대학의 방송정보학과에는 그들처럼 현역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방송 현장과 학과 이론 공부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나중에 친해지게 된 선후배 동기들로부터 알게 됐죠.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사람들은 저랑 남편을 불륜 관계라고 생각했다나 봐요. 하긴 그렇게 보였을 것 같기도 해요. 지난 20여 년 동안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낸 보상으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대로 돌아간 것처럼. 새 가방도 사고, 출석수업을 받으러 학교 가는 길에 다정히 손을 잡고 솜사탕도 사먹고. 우리는 회사 일을 하는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오리엔테이션, MT도 다 참석했고 친구도 사귀었어요.”

 

50대에 경험하는 캠퍼스 커플의 대학생활은 여느 20대의 그것보다 더 반짝거렸다. 최 동문과 차 동문은 나루터스터디에 가입해 나이도 천차만별인 동기들과 함께 공부했다. 장소가 마땅치 않을 때는 부부가 주축이 돼 봉사하는 선교회 사무실을 개방하기도 했다. 수요일에는 최수민 동문의 동기들이, 목요일엔 2학년인 차재완 동문의 스터디 맴버들이 번갈아 찾았다. 이런 생활은 세상의 모든 일을 잊게 할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승급 시험과 중간시험의 커넥션

시험 준비라도 할 때면 온통 비상이 걸렸죠. 온 가족이 모두 대학생이니, TV도 끄고 손님도 사절하고, 시골 아버지도 못 오시게 했어요. 1년에 4차례씩 이런 폭풍이 지나갔지만 식탁에 둘러앉아 4명이 모두 공부하니 뭔가 덜 외롭더라고요.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면서. 과정이 즐거우니 결과도 당연히 좋더라고요. 이런 공부 기운은 남편의 승진 시험에도 정말 커다란 영향을 미쳤죠.”

 

차재완 동문이 방송대에 편입한 1997KBS에는 대대적인 승급시험이 있었다. 차 동문은 시험지를 받아 본 순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고 한다. 논술로 작성해야 하는 문제는 바로 디지털시대의 TV 방송 전망에 대해 논하라.’ 그 당시 방송 현장에서도 디지털이란 용어는 낯선 것이어서 현역 직원들도 잘 모르는 개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전 중간시험을 치른 차 동문은 일사천리로 써 내려갔다

 

남편은 디지털 개념과 특성, 그리고 TV방송과 전망에 대해 아날로그 방송방법과 비교하면서 단숨에 B4용지 6장을 모두 채웠다면서 시험이 그렇게 재미있고 신난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후에 TV 본부장님으로부터 자네는 시험점수가 가장 좋았어라는 말씀을 듣기도 했다더군요. 이 시험 덕분에 남편은 음악과 효과를 총괄하는 음향 효과실 총괄 차장으로 승진했어요.”

 

최 동문 부부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젊은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새로운 활력소가 되는지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자극을 받은 KBS성우 동료들은 용기를 얻어 방송대 혹은 다른 대학에 진학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해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후배도 있다. 방송대 영문학과를 졸업해 우리 동문이 된 동료도 있고, 그 후로도 몇몇 후배들은 방송대를 졸업하고 저마다 원하는 대학원에서 석사나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트렌지스터 라디오-성우-천직

전쟁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60년대. 우리의 삶은 가난과의 투쟁이었다. 늘 굶주림에 허덕였고 먹을 것이라면 목에 넘어가는 어떤 것들이라도 용납될 정도였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최수민 동문은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자신의 처지를 좀 비관적으로 생각하기도 할 법한데, 최 동문은 달랐다. 그가 주연을 맡았던 달려라 하니의 주인공 하니처럼.

 

그 시절 저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끼고 살았어요. 지금은 넷플릭스, 유튜브 같은 영상 매체뿐만 아니라 책도 많아서 보고 읽을 수 있는 것들이 무척 다양하지만 그때는 TV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잖아요. 라디오에서는 제가 모르는 세상 이야기를 뉴스와 드라마로 접할 수 있었죠.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통로가 라디오였어요. 최수민 하면 라디오를 떠올릴 정도로 저는 라디오를 끼고 살았어요.”

 

그시절,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은 일과 병행하는 것 뿐. 14세의 최 동문은 당시 뚝섬에 있었다는 천혜당제약에 취직을 한다. 오전 8시부터 5시까지 약을 포장하는 일로 학비를 벌어,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특히 국어를 좋아했다. 교과서에 연극 대본이 나오면 1인 다역을 할 정도로 실감나게 읽어 국어 시간을 생생하게 만들었다.

 

라디오 듣기를 좋아해서인지 자연스럽게 성우의 목소리 연기와 아나운서의 정확한 발음을 따라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국어 시간에 연극 지문이 나오면 저는 그냥 읽지 않고 감정 연기를 섞어 정확한 발음으로 대본을 읽었어요. 선생님이나 친구들도 제가 읽는 국어 지문 듣는 것을 좋아해서 저는 국어시간만 되면 서서 읽는 낭독 단골로 지명이 됐죠. 이렇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저의 꿈은 성우가 저의 꿈이 됐죠.”

 

경제적인 이유로 중학교 진학도 늦었지만, 고등학교 진학도 마찬가지였다. 최 동문의 재능을 아꼈던 고등공민학교 선생님 두 분이 입학금을 보태주신 덕에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야간 대학에 들어갔다. 한 학기는 어찌어찌 마쳤지만 등록금을 계속 감당할 수 없어서 중퇴했다. 그는 아쉬움을 남긴 채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우리나라 영화 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때라, 영상을 먼저 찍고 후시 녹음을 하던 시절이었죠. 저는 영화사에 취직해 배우들의 대사를 더빙하면서 목소리 연기를 배울 수 있었어요. 1969TBC 성우극회 5기로 입사하면서 제 목소리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 같아요. 동양방송의 간판 프로그램인 아차부인 재치부인에 캐스팅 됐죠. 1964년에 시작 돼 1985년까지 약 21년 넘게 사랑받았던 라디오 국민드라마에 합류하게 된 거죠.”

 

전속 시절 최고의 인기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것은 최고의 성우로 인정받았다는 의미. 최 동문은 한편으로는 성우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어 기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원래 재치부인을 연기하던 선배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김 선배는 최 동문에게 오히려 네가 죄송할 것 없다. 그 배역이 꼭 내 것이란 법이 어디 있어. 걱정 말고 열심히 해라며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최 동문은 언젠가 다른 이에게 자신의 배역이나 자리를 내주어야 될 때 기쁨으로 후회 없이 물러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여전히 되새기고 있다

 

팔순, 더 멋진 미래 꿈꾸는 나이

사실 성우는 배우다. 목소리 배우. 지금이야 더빙 없이 자막으로 보는 경우가 더 많지만 최 동문이 활동하던 시절은 성우의 전성기였다. 방화 더빙, 라디오 드라마와 만화영화 출연 때문에 밤샘 녹음이 이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더불어 캐스팅에 대한 초조함도 떨궈버리고 싶었다. 이때마다 그를 다독여 준 이는 바로 동반자차재완 동문.

 

남편의 외조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활동할 수 없었을 거에요. 남편은 어설프게 도와준답시고 모니터링을 해 쓴소리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무한경쟁에 내던져진 저와 아이들을 품어주는 따뜻함이 우리 가정을 감싸고 있는 기운이죠. 사실 후배 성우들을 가르치는 강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에 가능했죠.”

 

성우로 활동했던 남편의 경력 때문에 차 동문도 90년대 후반부터 CBS에서 성우 강사를 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수민 동문은 본인이 맡은 드라마 이외에 남을 가르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계속 거절하는 최 동문의 마음을 돌린 것은 남편 차 동문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당신의 재능은 당신 것만이 아니야. 하나님께 받았으면 돌려드려야지, 베풀어야지!” 최수민 동문은 못 한다는 게 거짓말이 아닌데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고 했다.

 

이렇게 강사를 시작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어요. 이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해요. 그건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학생들로부터 여전히 배운다는 거에요. 성우가 되기 전의 나를 생각하며, 그들의 마음을 보듬고, 가르치는 것에 진심을 다해 정성껏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풀어놓았어요.”

 

목소리 연기는 캐릭터의 생사 결정권을 쥐고 있다. 캐릭터에 달라붙는 마이다스 보이스를 위해 그는 캐릭터 연구부터 그에 맞는 목소리 연기를 위한 스킬, 감정 연기 노하우 등 그가 몇 십년 간 체득했던 비결을 아낌없이 나눈다. 돈 때문이 아니다. 베풀라는 남편의 말이 꽂혔기 때문이다. KBS 문화센터, MBC 문화센터에서도 강사로 와 달라고 했다. 차츰 제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이젠 함께 동료로 일하는 제자들도 생겨났다. 최 동문은 그들에게 너무 감사하다고 한다. 또 마음이 흐뭇하단다. 이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솟아난다는 것이다.

 

저는 제자들보다 40~50년을 더 산 사람이에요. 내가 아는 것, 그것이 성우라는 직업 교육이라 해도 이들에게 전해주면 이들은 그 4~50년을 뛰어넘어 더 지혜로운 삶을, 내가 그 나이에 살았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요. 많이 베풀수록 더 기뻐진다는 것을 그간의 인생 경험을 통해 충분히 배웠어요. 앞으로의 계획이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것, 알려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많이 넘겨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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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and***
    어릴 때 아침마다 들려오던 [아차부인 재치부인]이 이렇게 오래 한 드라마인줄 몰랐어요. 그 시절엔 집에도 거리에도 항상 라디오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요.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유행가 뿐 아니라 드라마도 서민들의 일상생활 중 일부였습니다. 그 재치부인이, 그리고 영심이가 선배님 목소리였다니요..... 선배님의 이야기 감동스레 잘 봤습니다. (KNOU 위클리에 처음으로 댓글 남기네요^^;;; ) 2022년 새해에도 건강 & 행복하세요~
    2022-01-03 14:16:17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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