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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삭빠른 계산이 아니라 우직한 소신,

한 시대와 사회가 요청하는

‘좋은 책’에 대한 고민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눈을 주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내딛는

‘쟁이’들의 신념이 출판문화를 비옥하게 일군다고 믿는다.

 

 

내가 몸담은 경인문화사가 서울 마포를 떠나 파주에 정착한 것은 6년 전이다. 2015년 11월, 현재의 파주 출판단지에 새로운 사옥을 마련해 입주했다. 부친께서 ‘양서입국’의 기치를 내걸고 출판사업을 한 지 51년 만의 일이었다.


사옥을 옮기면서 특히 신경을 쓴 건 한국학 관련 서점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출판사가 서점이라니? 의아해하는 분들도 계셨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필자는 부친을 도와 한국학 문집류 영인본 전문 출판의 기틀을 다지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다. 20여 년 전부터는 일본, 미국, 중국 등지를 돌면서 해외에 우리 출판사가 만든 한국학 문집을 판매하는 일에 전념해왔다.


우리가 만든 책들이 하나둘 해외로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작업을 한눈에 조망해볼 수 있는 전문서점에 생각이 미쳤다. 해외의 구매자들이 한국을 찾아오면 관련 책들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사옥을 옮기면서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았던 한국학 문집 영인본 출판 외길을 걷던 부친을 따라 출판을 배우고, 출판계에 이름을 올렸다. 고향이 황해도 재령인 아버지는 홀로 서울에 내려와 공부하다가 분단을 맞으셨다. 아버지는 청계천에서 ‘경인서점’이란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출판에 눈을 뜨셨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겠지만, ‘우리 책’에 뜻을 두셨다.


대학 졸업반 무렵 나는 본격적으로 부친을 도와 출판에 뛰어들었다. 말이 출판이지 ‘영업사원’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전국을 돌면서 주문을 받고 수금을 하는 방문판매를 반복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수금을 제때하고, 주문을 많이 받아낼 것인가에 골몰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한국 지식사회가 필요로 하는 책이 무엇인지, 어떤 책을 만들 것인지만 생각하고 계셨다.


당시에는 좋은 자료가 별로 없었고, 인쇄술도 좋지 않아서, 다양한 전공 분야 연구자들의 요청이 이어지던 때였다. 학자들에게 좋은 책을 제공하는 걸 본업으로 생각하신 아버지의 판단은 주효했다. 이후 우리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여유당전서』 등의 한국학 기본자료 간행과 함께 1988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문집을 총정리한 『한국역대문집총서』 간행을 시작했고 1999년 3천 권을 완성했다. 문집은 주요 선현 3천500명의 저작을 집대성한 것으로 한국문화 콘텐츠의 보고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한 출판쟁이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고집스러운 ‘출판쟁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나의 정체성 규정으로도 이어진다. 아버지가 ‘양서입국’의 기치를 내건 출판장이로 인생을 일관하셨다고 한다면, 나는 판매와 수금, 영업에 몰두한, 영락없는 ‘업자’였다. 그런 까닭에 나의 출판 인생은 ‘쟁이’와 ‘업자’ 사이에 끼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 출판시장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출판은 돈이 안 되는 사업이라는 진단도 이어진다. ‘업자’의 한 사람으로 나는 이런 지적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쟁이’로 살아오셨던 아버지의 순수한 열망의 관점에서 본다면, 여전히 우리에게는 더 많은 ‘쟁이’가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약삭빠른 계산이 아니라 우직한 소신, 한 시대와 사회가 요청하는 ‘좋은 책’에 대한 고민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눈을 주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내딛는 ‘쟁이’들의 신념이 출판문화를 비옥하게 일군다고 믿는다.


‘업자’인 나의 셈법으로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기 분야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쟁이’로서 소신을 불태우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 한층 풍요로운 사회로 가는 첩경으로 보인다. 1대(한상화)에서 2대로, 다시 2대에서 3대(한주연)로 “뜻이 좋으면 꿈은 이뤄진다”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쟁이들이 만드는 새로운 ‘희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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