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진로   2019. 1학기 기말시험 대비 특강


일연 『삼국유사』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드물지만 제목은 누구나 아는 것, 사실 고전의 여러 정의 중 이것만큼 마음에 와 닿는 것도 없다. 『삼국유사』 역시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잘 알려진 작품이라고 방심하지 말고 저술 배경, 구성과 내용, 의의를 차분히 정리해보는 것이 좋다. 저자 일연은 불교승려였으니, 전체 9편 중 7편이 불교사를 다루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첫 2편이 고조선과 삼국의 역사라는 점을 잊지 말자. 물론 신라 중심의 불교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한계는 분명하나, 『삼국사기』에 없는 많은 자료들이 담긴 귀중한 자료라는 점,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 역사, 민담, 향가, 설화 등 장르와 내용이 풍성한 자료라는 점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한편, 『삼국유사』는 인용된 자료와 저자의 견해를 구분하여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도모하는 놀라운 현대성을 보이는 저술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단군신화가 수록된 최초의 역사서이며, 우리 고대사의 체계가 수립되어 이후 우리 고대사를 자주적으로 이해하려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점을 염두에 두며 교재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적절한 기말시험 대비가 될 것이다.


정약용 『목민심서』

옛날에는 임금이나 관리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목민(牧民)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 대작이 아비도 선배도 없이 갑자기 솟아난 것은 아니다. 중국에도, 조선에도 이러한 목민서의 전통은 있었고 정약용도 이런 전통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렇다면 기존의 목민서들과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차별성은 어디에 있는가? 먼저 집필 동기가 다르다. 기존의 목민서들이 지배계급의 통치권 강화와 백성의 활용방안 등 백성을 근본적으로 관리대상으로 바라보는 지방행정매뉴얼이라면, 정약용은 당대농촌현실을 직시하고 백성의 고통스러운 삶에 주목하였다. 지배계급의 편의가 아닌 백성을 위하는 마음, 바로 이 애민(愛民), 위민(爲民), 균민(均民)을 기반으로 궁극적으로는 더 조화롭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개혁의 의지가 담긴 책이 바로 『목민심서』이다. 정약용은 이를 단지 감정적인 선언으로 외친 것이 아니다. 그는 당시 학문의 전 분야라고 말해도 좋을만한 다방면의 깊은 공부의 결과로 이 책을 내놓았다. 진정한 공부는 자신의 지적만족감을 넘어, 고통 받는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는 좋은 사례이다.


『논어』 그리고 『노자』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 간의 문답을 비롯한 수많은 대화의 기록이다. 이 책이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한 연구서가 아닌 까닭에, 전체를 관통하는 무언가를 짚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중요한 내용 몇 가지는 숙지해야한다. 논어의 중심 테마들을 거칠게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배움의 기쁨과 배움의 열매들이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배우고, 이를 실천해가면서 누리는 내면의 기쁨이 있다. 군자(君子)란 이 과정 끝에 서 있는 목표나 이상형이 아니라, 이 과정 속에서 노력하고 분투하는 인간이다. 이들이 꿈꾸는 사회는 사익의 맹목적인 추구를 부끄럽게 만드는, 타인과 함께 일궈가는 덕의 공동체이다. 여기서 솟아나는 공자의 핵심어가 인(仁), 곧 남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이다. 타인의 가난이나 고통을 “그건 네 소관이다.”라고 일축해버리는 현대 자본주의는 이런 까닭에 졸렬하고 야만적이다. 인간의 잠재력을 함부로 과소평가하지 않고 인간의 품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려는 공자의 몸부림이 동아시아 전체 최고의 고전이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반면, 『노자』는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공자는 인간 생활의 도리를 말하지만, 노자는 우주 만물의 생성-변화-소멸 속에 깃든 궁극의 원리를 바라본다. 이것이 『논어』의 도(道)와 『노자』의 도의 차이이다. 노자가 보기에는 공자가 추구하는 인의예지 따위는 잘해봐야 인간의 기준으로 만든 것, 작위적인 것, 자연의 본성을 억압하는 것에 불과하다. 공자에 대한 노자의 일갈은, 말하자면 이런 거다: “공자 당신이 그렇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정해놓으면 도(道)가 뉘예뉘예하면서 따라옵디까? 착하게 산다고 하늘이 편들어줘요? 당신이 뭔데 우주의 법더러 이래라 저래라 해요? 도는 우주만물의 근본이고, 덕은 이 도가 구체적으로 구현된 거라오.” 『노자』는 방향과 목적이 다르다. 대안적인 공동체상을 제시하지도 않고, 타인과의 적극적인 관계설정에도 관심이 없다. 게다가 ‘화광동진’이라니, 자신의 진가는 남몰래 감춰야 한다. 물론 이것은 난세에 적합한 처세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노자』를 처세술로만 이해하는 것은 『노자』라는 깊은 바다에서 조개껍데기 하나 정도만 주워 올리는 격이다.


플라톤 『국가』

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다 정의(正義)로운 사회에서 살고 싶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 현대사에서 정의를 가장 악랄하게 조롱했던 자들도 ‘정의사회구현’이라는 국정기조를 걸어두지 않았던가. 악마도 명분으로는 정의를 내세울 줄 아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세상에서 정의는, 고작해야 ‘배분정의’일 뿐이다. 다들 자기 몫만 고스란히 가져가면 정의가 실현된다는 말이겠다. 정말 그런가? 그럴 리가. 합의금에, 위자료까지 모두 챙기고 심지어 내 예상보다 더 많은 금액이 계좌에 찍혀도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안도감은 쉽게 들지 않는다. 더 뜯어내지 못한 아쉬움만 남을 뿐. 그렇다면 이렇게 왜소한 배분정의 말고, 우리가 생각지 못한 다른 정의도 있을까? 정의는 과연 어떤 것일까, 강자의 이익일까? 우리는 충분히 강하지 못하니 억지로라도 법도 지키고 정의로운 척 살아야 하는 걸까?
이 모든 통념들을 거절한 채, 플라톤은 누구보다도 깊이 파고들어가 정의의 본질을 캐내온다: 정의는 나 혼자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는 서로 다른 존재들끼리 어우러져 각자의 일들을 오롯이 해내며 관계를 맺을 때, 그 조화로운 관계 속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이라고 일러준다. 정의는 온갖 좋은 것들을 증진시켜주는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근거라고 말이다! 이 대담한 지적 모험이 담긴 저술은, 예상대로 적잖이 두껍다(필자는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까지 얹어 고기를 눌러 매년 고밀도, 고품질의 편육을 얻고 있다). 정의가 무엇인지 밝히는 작업이 그만큼 간단치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늘 어렵지 않던가(kalepa ta kala 칼레파 타 칼라). 다행히 최근에 『플라톤 국가 강의』 (이종환 저)라는 질 좋은 안내서가 나왔으니 이를 벗 삼아 『국가』 원전번역(박종현 역, 또는 천병희 역)을 펼쳐보자. 문화교양학과 이정호 명예교수님의 『국가』 상설강좌까지 듣는다면 더 할 나위 없겠다(http://www.jungam.or.kr/blog/70873). 단, 기말시험은 일단 끝내고서.


마키아벨리 『군주론』

우리에게는 『군주론』이라는 책 이름보다는 저자의 이름을 딴 ‘마키아벨리즘’이 더 잘 알려져 있다. 군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효율성과 유용성만을 고려할 뿐 도덕은 상관없다는 해석정도가 마키아벨리즘의 원뜻에 가깝다. 마키아벨리의 관심사는 신생 군주국이라는 왕정 형태에 국한되며, 핵심 질문은 이 신생 군주가 새롭게 얻은 정권을 어떻게 잘 보존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현실적’인 방안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랑받을 생각 말고 공포의 대상이 되라, 필요하다면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방법도 서슴지 마라, 운명과 상황이 변하면 고지식하게 굴지 말고 바람 부는 대로 몸을 맡겨라. 이처럼 전통적인 덕목과 악덕은 『군주론』 안에서 완전히 전복된다. 좋게 말하자면 냉혹한 리얼리즘이다. 마키아벨리의 충고를 금과옥조 삼는 정치인, 경제인들이 여전히 많은 걸보면 이 책의 파급력은 대단하다. 그러나 리더의 가장 큰 악덕이 도덕적 무능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현재 대한민국의 시민들에게 이 책은 철지난 반면교사일 뿐이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10명의 철학자에게 철학이 무엇이냐 물으면, 10개의 대답이 나오게 마련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지혜이고, 이 지혜를 탐구하는 일을 철학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신이 보기에 모든 학문 중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수학을 학문 전체의 토대로 삼아야한다고 확신했고, 이 토대를 확실하게 세우기 위해 일단 모든 것을 모조리 뼛속까지 의심해 보았다. 데카르트에게는 의심이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를 방법적 회의라고 부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결국 그는 더 이상 의심하고 부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마주한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있긴 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는 이를 철학의 제일 원리로 놓는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 선언으로 인해, 확실성의 토대는 더 이상 신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된다. 드디어 철학도 중세와 결별하고 근대로 넘어온 것이다.
만일 학우 여러분들 중 수학적 방법만이 능사인지 궁금한 분이 계시다면 철학을 권해드리고 싶고, 나 자신이라고 할 만 한 것이 과연 있긴 있는지 궁금한 분이 계시다면 업장소멸의 길이 멀지 않았으니 더욱 정진하시라고 격려해드리고 싶다. 필자는 데카르트에게 묻고 싶다, 혼자서 그렇게 자기 자신만 들여다보면 무엇이 보이시냐고, 외롭진 않으시냐고, 스터디에도 좀 나오시라고 말이다.


마르크스 『자본』

자본가의 최대 관심사는 이윤율이다. 어렵지 않다. 자본가가 투자한 자본에 대해 이윤이 차지하는 비율이다. 예를 들어, 김 사장이 올 한해 100억의 자본을 투자해서 10억의 이윤이 생겼다고 치자. 그럼 이윤율은 10%다. 김 사장이 손이 좀 큰 사람이긴 해도 이 10억의 이윤을 다 탕진하진 않는다. 그중 일부가 내년 투자액에 포함되는 것이다. 즉, 이윤은 자본가의 지갑으로 돌아가 다시 자본의 일부가 되어 투자된다. 매년 불어가는 것은 내 뱃살만이 아니다. 자본도 이렇게 불어간다. 여기서 투자는 두 종류로 갈린다. 하나는 노동력에 대한 임금, 즉 잉여가치의 원천이 되는 ‘가변자본’이고, 또 하나는 공장, 설비, 원자재 등 ‘불변자본’이다. 이윤율 증가의 맛을 본 자본가는 기술혁신, 신형 생산설비 도입 등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계속 높이고 생산비를 평균 아래로 내리려고 애를 쓸 것이다. 왜? 이렇게 해서 경쟁업체를 따돌리지 않으면 이윤율이 올라갈 수 없으니까.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변자본에 투자되는 비용도 꽤나 크다는 것이 함정이다. 바로 이 불변자본 투자비용이 이윤보다 더 큰 폭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설명, 즉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가 개인의 손해로 끝나는 법이 없다. 사회적인 재앙, 즉 공황과도 직결된다. 불변자본에 대한 엄청난 투자는 생산량의 폭주를 불러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비도 같이 늘 수는 없다. 집에 냉장고를 10대씩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대량의 악성재고, 이것은 기업의 도산, 그리고 기업에 돈을 대준 은행의 도산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1929년 세계대공황 때, 미국 GDP의 60%가 증발했고, 2008년 경제위기 때는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세계 총생산량이 감소하였다. 공황을 자본주의의 구조적 결함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공황이라는 단어 자체를 터부시하는 각국 정부는 경기부양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지나친 국채발행으로 재정적자라는 부메랑이 돌아왔다. 산 넘어 산. 중요한 건, 주류경제학의 처방 하나하나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미봉책들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질문해보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공황의 원인을 모르거나 엉뚱하게 진단했기 때문이다.
반면, 공황은 자본주의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하게 되어 있고, 점점 심화되어 언젠가는 자본주의로는 해결 불가능한 시점이 올 것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진단이다.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은, 생산의 목적이 소비가 아닌 이윤으로 설정되기 때문에 생겨나고, 주기적인 경제공황이라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라는 특성상 산업자본 중심의 연구 분석 결과인 『자본론』과 달리, 오늘날은 노골적인 금융자본주의의 시대이다. 실물 부문에서 지속적인 재미를 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자본가들은 재빨리 금융 부문으로 갈아탔고, 실물을 지원해야 하는 금융은 실물보다 덩치가 커져버리고 말았다. 실질적 가치는 하나도 만들지 못하는 금융자본 아래에서 이제는 누구도 투자와 투기를 구별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최종적인 붕괴는 마르크스의 예견보다 더 빨리 다가올지도 모른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도 니체 할아버지도 전혀 몰랐다, 니체의 중심개념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16비트 트로트로 리메이크될 거라는 건. 아모르 파티(amor fati). 산다는 게 다 그런 거라고? 미안하지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 적이 없다.
인간이 의심 없이 기대오던 가치체계가 다 무너지고 나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니, 살 수는 있을까? 신은 죽었다. 기존의 가치는 무너졌고, 창세기도 요한계시록도 없다. 즉, 천지창조와 최후심판이라는 일방향의 직선적인 궤도도 무너진 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조와 파괴가 무한히 반복되는 ‘영원회귀’의 둥근 고리 속에 남겨지게 된다. 하지만, 그 낯선 허무 속에서도 생존 말고 삶을 원하는 이들은 있게 마련이다.
이들이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방식은 영원회귀를 받아들이고 창조적으로 자기 몸을 맡기는 수밖에는 없다. 이게 운명애(運命愛)이고 라틴어로 amor fati이다. 이 운명애를 품고 사는 이를 초인(超人)이라고 부른다. 초인에게 현실에 있는 나 자신은 나의 완성이 아니다. 내가 살아가야 할 그 모습을 향해 나는 항상 뛰어넘고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 자, 그래서 결국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 본래 자신이 취해야 할 모습을 끝내 찾는 자가 초인이다.
낙타-사자-어린이의 비유가 여기에서 나온다. 낙타는 기존의 권위와 가치, 도덕이 끝장난 줄도 모른 채 계속 이를 짊어지고 가는 딱한 존재,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노예 같은 존재이다. 사자는 기존 가치체계에서는 벗어나 자율성을 누리지만, 동시에 불안과 고독을 떨쳐내지 못한 존재이다. 그러나 어린이에게는 이런 쓸쓸함도 어두운 그늘도 없다. 다만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누리며 순수하고 해맑게 창조를 누릴 뿐이다. 니체의 초인은 이런 어린이 같은 사람이다. 역설적이지 않은가? 어린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던 예수의 선언과 겹쳐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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