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없고 소심했던 아줌마가 강사로 경력 개발 성공했죠”
18호 장빛나 2019-08-02 15:24
17호 윤문영 2019-07-26 16:22
17호 2019-07-26 16:30
16호 장빛나 2019-07-14 10:12
주한외국대사관, 기업체에 한국인 교사로 출강하고 있습니다.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결혼 후 아이를 낳기 전까지 입시학원, 개인교습 강사로 국어를 가르쳤어요. 출산 후 저 역시 경력단절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불평만 할 순 없었죠.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일터로 나섰고, 아이가 집에 없는 시간에 방문교사 일을 했습니다. 잠시 쉴 땐 영어학원 회화반을 수강했는데, 한 주부 수강생이 영어를 너무 잘 했어요. 비결이 무엇인지 물으니 편입으로 방송대 영어영문학과를 들어갔다는 거예요. ‘아 이거다’ 싶었죠. 국어 강사였지만, 막연히 ‘영어 강사’도 하고 싶었거든요. 주부다 보니 돈에 민감한데 등록금도 저렴하고 장학금 혜택도 많아 방송대가 마음에 쏙 들어왔어요. 지금이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영어영문학사 학위를 곧장 사용하지는 못했습니다. 곧장 영어 강의를 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기에, 지역신문사 리포터로 새로운 일을 시작했습니다. 영어를 자주 사용할 기회는 없었지만, 외국인을 취재할 때면 가장 먼저 담당자로 배정됐고 능력도 인정받았습니다. 8년 후 갑자기 신문사 사정으로 근무 지역을 옮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이야 말로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야!’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을 그만두고 새 직업을 갖기 위해 제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봤습니다. 학원 강사 경력, 국어국문학사, 영어영문학사, 리포터 경험이 있더군요. 한국어 강사에 도전해도 괜찮겠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한국어 강의는 한국어 교원 자격증이 없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더군요. 그래서 2017년 서울대학교 온라인 한국어 교원 양성과정을 이수했고, 같은 해 필기와 면접 전형을 통과해 한국어 교원 3급 자격증을 땄어요. 이 후 한국어 강의 학원과 출강 업체에 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내 나이 40대 후반인데 취업이 될까?’며 걱정이 앞섰어요. 그러나 예상과 달리 면접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이기 때문에 한국어 강사가 갖춰야할 기본 소양은 물론이고, 영어실력도 필수였습니다. 영어면접을 실시하는 곳도 있는데, 이 때 공인영어 점수 대신 영어영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것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이력이 있다 하더라도, 업무에 적합한 학위가 없었더라면 늦은 나이에 서류 전형을 통과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급해 말고 냉정하게 자신 보길 경력단절이란 상황은 마음을 조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카더라’ 통신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상업 자격증을 마구잡이로 따며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마세요. 냉정하게 자신을 보고, 경력단절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 가보세요. 그 때 사회생활도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의 발자취를 잘 정리해 경력의 연장선에 설 수 있거나 그 경력을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일을 고민해보세요. 경력단절 이전보다 급여나 환경이 열악하다는 사실은 현실입니다. 전보다 못한 처우를 받더라도 지치지 않을 수 있는 일을 찾아 공부하길 추천합니다. 진부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행운은 노력한 자에게만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방송대 진학은 제게 ‘행운을 향한 첫 걸음’이었습니다. 입학을 망설이고 있는 분들도 행운의 발걸음을 잘 떼어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방향으로 전진하는 계기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재학생 30%가 40대 / 여성 비율 70%. 취미 위한 공부 있지만,결혼 후 경력 단절돼 방송대 디딤돌로 삼아 외국인 대상 한국어 강사 권성미 동문
15호윤문영2019-07-05 15:39
한국청소년코칭센터에서 진로, 학습코칭 등을 지도하고 월드비전에서 세계시민교육을 하는 강사로 활동 중이에요. 전 경력단절 기간이 10년이 넘었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10년 동안 은행에서 근무했고, 10년 이상은 육아에 전념했죠. 아르바이트, 시간선택제 근무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제 자신이 ‘소모되는 기계’가 된 기분이 들었어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커리어를 쌓고 싶어, 무작정 영등포 여성인력개발센터를 찾아 상담 프로그램을 신청했죠. 오프라인 상담은 두려움 그 자체 프로그램 첫 시간에 참가했는데 다시는 참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들 앞에서 말해본 경험이 없는데, 자꾸 발표를 시켰어요. 남들은 처음이라면서도 긴장한 기색 없이 말을 술술 잘하는데, 저는 너무 떨려서 말도 잘 안 나왔어요. 지도 선생님이 ‘강사’라는 직업을 추천해줬어요.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한 직업이었지만, 선생님 격려 덕분에 ‘나도 타인의 꿈 찾기를 돕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내 자신 인정하니 공부 잘돼 강사가 되려니 준비해야 할 자격증도 많고, 고졸이라는 학력 때문에 자신감이 떨어졌어요. 그 때 지도 선생님이 방송대 진학을 추천했어요. 막상 1학년부터 시작하려니 4년이란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습니다. 지인들도 응원의 말을 건넸지만, ‘그 시간 어떻게 보낼래’ ‘이제 와서 무슨 공부냐’며 따가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어요. 예상대로 첫 대학생활은 쉽지 않았어요. 교재를 읽을 땐 내가 글을 읽는 건지 글자처럼 생긴 그림을 보는 건지.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공부만 할거야’라는 시기심도 들었어요. 일하는 날엔 ‘일도 힘든데 내가 이걸 왜 해’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나 저는 냉정하게 ‘방송대 재학생 다수는 직장인이다’ ‘나는 느린 사람이다’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계속 상기했죠. ‘나는 세상을 강자와 약자, 성공과 실패로 나누지 않는다. 세상을 배우는 자와 배우지 않는 자로 나눈다.’ 가장 좋아하는 벤자민 바버의 말입니다. 처음엔 4년을 어떻게 보내냐며 걱정했지만, 벌써 대학생활 절반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 때 주변인 말을 듣고 공부를 시작하지도 않았다면 지금 저는 어땠을까요? 이젠 절대 공부를 그만두고 싶지 않습니다. 평생 ‘배우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졸업 후 코칭 전문가로 거듭나기 위해 대학원 진학도 꿈꾸고 있습니다. 실패할 땐 “나 지금 잘 가고 있어” 사실 전 강사양성과정 수료생 중 꼴찌였습니다. 그러나 남보다 꼭 잘해야 한다기보다 내 꿈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간다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습니다. 누구나 시작은 두렵습니다. 다행히 저는 지도 선생님이 격려해주셨고 방송대 진학을 권해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혹시 주변에 경력단절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방송대를 찾으라고 말해보세요. 우리 대학엔 진로상담실이 있고, 다양한 상담프로그램과 진로, 취업 정보도 제공되고 있어요. 천천히 가더라도 포기하지 마세요. 혹여 실패할 땐 ‘나 지금 잘 가고 있어’라며 자신을 위로해주세요. 절실하게 꿈꾸면 반드시 통하게 마련입니다. 재학생 30%가 40대 / 여성 비율 70%. 취미 위한 공부 있지만,결혼 후 경력 단절돼 방송대 디딤돌로 삼아 10년 경력단절 깨고 강사 된 김진아 학우
15호윤문영2019-07-05 15:43
런던 생활 28년차 자녀들 대학 진학하니 ‘명퇴’하는 기분 들어 동생에게 방송대 진학 묻자 “언니에게 필요해” 응원 이젠 자부심 생겼고, 지인들도 보는 시선 달라져 “런던에 거주하며 우리 대학에 입학한 학우가 있습니다. 출석수업과 기말시험을 위해 한 학기에 두 번이나 한국에 와요.” 인천과 런던 비행시간은 약 12시간. 더욱이 런던은 개방대학(OU : Open University)이 유명한 도시다. 그런데 왜 방송대를 찾았을까? 제보를 받고 많은 질문들이 떠올라 한달음에 주인공 김옥 학우를 만나러 갔다. 런던 생활, OU 아닌 방송대 선택 런던에서 직장을 다니다 결혼을 하고 28년을 거주했습니다.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했는데, 아이들이 다 크고 대학에 진학하고 나니 ‘명퇴’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평소 테니스를 즐겨 치고 현지 친구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만큼 활동적인데, 그것만으로는 더 이상 엔돌핀이 솟지 않았어요. 그러다 우연히 어떤 유명인이 “TV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걸 봤습니다. 저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오랜 기간 런던에 거주해서 영어는 곧 잘 잘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언어에 담겨 있는 영국 특유의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어요. 영국은 대화 속에 블랙유머(black humor)가 담겨 있는데, 대화를 하다보면 저만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죠. 저도 모르게 자신감이 떨어지고, 영어로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날도 있었습니다. 외국인 남편과 결혼하고도 정체성을 잃고 싶지 않아 한국 국적을 유지할 만큼 자아가 강한 저인데, 어느 날은 ‘다음 생에는 꼭 모국어가 영어인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다’라는 생각도 들었죠. 이게 바로 영어영문학을 선택한 이유랍니다. 사실 먼저 영국OU를 알아봤습니다. OU에 진학하려고 학사제도, 커리큘럼 등을 꼼꼼히 조사했죠. 그러나 영국OU는 개방대학임에도 전혀 개방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교수자와 학습자 비율이 1:5로 학생을 밀착 관리해주지만, 과정과 수업방식이 복잡한데다 학비도 제법 비쌌죠. 다양한 교양을 쌓고 재밌게 즐기며 공부하고 싶은 제 의도와는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 우리나라에 방송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홈페이지에 접속해 봤습니다. 운명이었어요! 마침 1학기 신·편입생 모집기간이더군요.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방송대 진학해 볼까?”라고 묻자 동생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언니 꼭 해! 언니에게 필요한 거야”라고 했죠. 동생의 격려 덕분에 힘을 얻었어요. 이후 서류 준비와 입시원서 접수를 동생이 모두 도맡아줬습니다. 합격이 결정된 후 동생은 제가 행여 마음이 변할까 당장 서점에 들러 교재를 구입해 런던으로 보내줬습니다. 정말이지 전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학기 중에 먼 거리를 왔다갔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런 것쯤은 문제되지 않았어요. 공부를 시작하니 인생의 목적이 생겨 삶의 에너지가 생겼거든요. 물론 오랜만에 하는 공부라 쉽진 않았습니다. 홈페이지 이용이 복잡해 학사정보 확인도 어려웠고,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최소 한두 시간은 헤매야 했어요. 다행히 튜터 제도가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국에 와서 서울지역대학을 방문했을 땐 우리 대학에 감동 받았습니다. ‘컴퓨터 활용 특강이라니! 학비가 이렇게 저렴한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에게 맞춤형이었어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튜터 특강은 놓치지 않고 싶을 정도로 유익했고, 학우들을 만나는 것도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학우’들 덕분에 마음 한 구석이 얼마나 든든하던지요. 석사 출신인 한 학우는 “석사가 방송대에 와서 공부한다는 생각에 조금 부끄러웠는데 열정적인 학우들과 해외에서 온 저를 보니 그런 생각을 한 자기 자신이 부끄럽다”고 했어요. 주변 격려가 인생 바꿔 공부를 시작하니 많은 것이 변했어요.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는 제 자신이 더 좋아졌고 자부심도 들어요. 어린 시절 엄마가 책을 들고 다니며 공부 시키시던 때엔 그렇게 공부가 싫었는데, 지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늦게까지 매달릴 만큼 공부 자체가 즐거워요. 공부에 몰입하다 보면 ‘아 나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주변 사람도 이젠 저를 달리 대해요. 남편은 ‘처음엔 정말 공부할 수 있겠냐’며 걱정했는데, 이젠 격려하고 도와줘요. 테니스를 함께 치는 런던 친구들도 “너를 다시 보게 됐다”며 인정해주는데, 제 스스로가 대견하고 뿌듯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남편과의 결혼’ ‘아이들을 낳은 것’ 그리고 ‘방송대 입학’입니다. 방송대 입학을 고민했을 때 동생이 ‘언니! 무조건 해!’라고 격려하지 않았다면 지금 저는 어땠을까요? 그 때 입학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저는 무료한 나날을 보냈을 겁니다. 주변인의 격려가 한 사람의 삶의 바꿔 놓기도 합니다. 저 역시 주변에 방송대 입학을 망설이고 있거나, 해외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 없이 “방송대 진학해봐”라고 말해줄 거예요. 방송대는 멀리 있어도, 조금 늦었더라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니까요.
14호윤문영2019-06-28 17:12
지난달 21일 류수노 총장이 종합편성채널 채널A <행복한 아침>에 출연해 특강을 진행했다. 이날 강연 주제는 ‘평생교육’으로 농촌 후계자에서 ‘쌀박사’가 된 류 총장의 인생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로 이뤄졌다. ‘초등학교 시절 농사일을 한 기억밖에 없다’는 류 총장은 10남매 중에 8째로 태어나, 아버지 뜻을 이어 영농 후계자로 자랐다. 그러나 20살이 된 이후 학업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며 류 총장은 쌀 한 자루와 된장, 고추장을 메고 집을 나서 9급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다. 3개월 만에 합격한 후 방송대 진학 그리고 농업연구사로 진로를 바꾸기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강연에 참여한 방청객들은 ‘나만의 특성을 찾는 방법을 알고 싶다’ ‘60대인데 공부를 할 수 있냐’는 질문을 이어나갔다. 이에 류 총장은 ‘제도권 교육을 벗어나 다양한 체험을 해보라’ ‘성적에 얽매이지 마라’ ‘좋아하는 분야와 나만의 공부 스타일을 찾아라’는 답변을 했다. 강연을 마치며 류 총장은 “7번의 성공 저변엔 20번에 실패가 있었고 그 기록되지 않은 실패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었다”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평생교육에 도전하라”고 말했다.
14호2019-06-28 17:14
“회사 일 때문에 바빠서 수강만 하고 시험을 못 본 과목 때문에, 다음 학기까지 졸업을 할 수 없다니 허탈해요.” “1학점 때문에 이번 학기에 졸업을 못하는 것이 너무 억울했어요.” “경력개발을 하려면 빨리 졸업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을까요?”
13호장빛나2019-06-15 1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