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강성남의 그노시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침공했다. 전쟁 진행 상황을 보도하는 뉴스가 넘쳐났다. 사상자와 파괴된 건물 잔해 사진은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일깨운다.


전쟁은 문화적 발명품이 아니다. 인간의 공격성은 무조건적 충동이 아닌 선택적 전술이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의 원인으로 지배자의 권력과 야심, 안보, 중요한 교역로를 장악하고 그 수익을 차지하려는 경제적 욕망, 종교 등 네 가지가 꼽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이런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푸틴의 선택적 전술은 바로 이런 요인들에서 찾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지정학적인 구속성을 벗어날 길이 없었기에 역사적으로 강대국의 협공을 받으며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의 독특한 존재 방식을 의미하는 ‘현 존재(Dasein)’에서는 거기 있음(Da-sein)의 존재 방식을 취한다. 거기란 인간이 선택하지 않은, 즉 애초부터 주어진 ‘삶의 터전’이라는 뜻이다. 즉 세계에 내던져져 있다는 점에서 이를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이라 한다. 이런 피투성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 우연하게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우크라이나 국민이 지금 처한 상황 역시 우연이고 그들의 선택의지와 무관하게 내던져진 결과다. 그래서 더 슬프고 안타깝다.


3월 18일, 미국 보스턴의 한 유치원에선 원아들이 삼삼오오 모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야기하면서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6살 헤라(H. Hera)는 자기 생각을 다음의 글로 표현했다. “평화는 친절한 것이고 친절한 것을 말하는 거다(Peace is being kind and saying kind things).”


전쟁에서 평화를 발견하는 교육이 우리에겐 왜 없는가? 어원상 교육은 마음의 힘을 끌어내도록 인도하는 행위다. ‘덜 가르치고 더 많이 배우게 한다’라는 건 싱가포르의 교육방침이다. 교사가 교실에서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20% 여백을 주라는 것이다. 그 여백이 학생 스스로 생각하는 힘과 창의력을 싹트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육자는  4형식 문장에서 동사의 ‘속뜻’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교사는 간접목적어가 직접목적어의 매력을
발견하도록 할 의무가 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했다. “보통 교사는 지껄인다. 좋은 교사는 잘 가르친다. 훌륭한 교사는 스스로 해 보인다. 위대한 교사는 가슴에 불을 지른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무엇을 가르쳤는지보다는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더 기억한다.


교육의 패러다임 이동(paradigm shift)이 일어나고 있다. 교과서 내용을 주입하고 객관식 문제로 평가받은 건 ‘무용 지식(obsoledge)’이 된다. 학생과 교사, 학생과 학생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한 학습법은 좀 낫다. 선진학습법은 교사와 학생이 지식을 공유하며 함께 지식을 만들어 간다. 이 과정에서 지식은 진화한다. 많은 양의 지식을 외우는 것보다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소양이 더 중요하다. 관찰과 탐구와 토론에 초점을 둔 학습 방법이 활용된다. 이게 고대 그리스의 교육방식이다. 이제껏 엉뚱한 방법을 찾아 헤매다가 역진 학습(flipped learning)을 발견하곤 ‘발견 교육’의 해법을 찾았다고 안도하는 듯하다.


갈릴레이도 말했다. “당신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 다만 그가 스스로 발견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가르치려는 마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어의 의미상 교실은 가르치는 곳, 학교는 배우는 곳을 뜻한다. 학교와 교실은 서로 모순 관계다. 주체적 학습 의도를 가진 학생과 상호작용을 하려면 선생도 일방적 계몽의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 라틴어로 학교(schola)는 ‘배움을 위한 여가(leisure for learning)’의 의미다. 그리스어로 학교 역시 한가한 시간, 여가, 여유를 의미한다. 물고기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한가롭게 노니는 것처럼 말이다. 고대 로마 그리스 시대의 학교란 시간적 여유가 있는 계층만이 다니는 곳이었다. 학교에서는 토론, 대화, 강의를 통해 지식을 배웠다. 현대적 의미의 학교와는 다른 뜻을 지닌다.


그리스 철학은 이런 토양에서 자랐다. 그래서 ‘여가는 철학의 어머니’라는 토마스 홉스의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한가함 속에 있다’라고도 했다.


교육자는 4형식(I teach my student mathematics) 문장에서 동사의 ‘속뜻’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간접목적어가 직접목적어를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교사는 간접목적어가 직접목적어의 매력을 발견하도록 할 의무가 있다.


교수도 단순히 지식을 연구하고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식과 지식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을 문제 삼으면서 ‘이게 지식이다’라고 선언하는 사람이다. 우리 대학 교수들도 학생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진정한 교육방식이 무엇인지 선언해야 한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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