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지평을 넓히는 방송대인

어쩌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힘은

거창하고 원대한 꿈보다

공감을 에너지 삼은

평범한 우리들의

이기적 이타심일지도 모른다.

 

은진슬(필명) 동문은 20여 년 전 연세대 기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해 졸업했다. 1990년대 중반 시각장애인으로서 음악 공부를 하는 이도, 대학에 입학해 공부하는 사람도 흔치 않던 시절, 그는 졸업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결코 쉽지 않았던 대학생활. 동기들에게 전공서적을 읽어달라고 부탁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들으며 학업을 이어나갔던 그가 이번엔 방송대를 졸업했다. 지난 2월 사회복지학 공부를 마친 은진슬 동문. 그는 방송대를 통해 어떻게 삶의 지평을 넓혔을까?

 

오늘에 집중해서 살기

세상의 다양한 다름을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장애공감교육 강사 은진슬입니다. 프리랜서로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생, ··고교 교원연수 및 기업체 대상 장애공감교육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코로나로 대면 강의를 잘 할 수 없게 되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자, 뜻밖에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와 아이 아빠, 저까지 함께 공부하게 되는 일상을 누리게 됐어요. 무언가 배우기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이라 이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어 감사했죠.”

 

은 동문은 장애의 정도가 심한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보통사람들의 삶도 녹록지 않은데, 시각장애인으로서의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거창하게 먼 미래를 그리며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내일, 1년 후, 10년 후를 그리기보다 오늘 하루만, 이번 한 주만, 이번 학기만 집중해 열심히·성실히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했다.

 

일곱 살 많은 언니가 치는 피아노를 따라 치다 보니 피아노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까지 하게 됐어요. 대학생 때 시험이나 강의 수강 시 화면 읽기 프로그램이 탑재된 노트북을 쓸 수 있게 해달라며 양해를 구하거나, 학교에서 복잡한 화성학 분석 악보를 점자 시험지로 만들어주지 못하니 시험 문제를 피아노로 쳐 주시면 구술로 레코딩 분석을 하겠다는 등, 인권의식이 나아진 요즘 표현으로 장애학생을 위한 시험편의 제공등을 정중히 부탁드리면 이 클래스에 학생이 50명인데 어떻게 너 하나한테 그런 에너지를 쓸 수 있느냐,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교수님들도 계셨어요.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죠. 그나마 나 혼자 겪는 건 괜찮았지만 하나둘 시각장애 후배들이 생기면서, 이렇게 지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나, 우리 학교에 시각장애인용 컴퓨터는 없는 거야?” 어느 날, 공대에 입학한 한 시각장애 후배가 은 동문에게 물었다고 한다. 학교를 둘러보니, 시각장애 학생을 위한 어떤 편의시설도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조사에 돌입했다. 눈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던 1998년 겨울에 시작해 이듬해 6월 보고서 하나를 탈고했다. 시각장애 대학생의 학습 여건 개선을 위한 제안서. 대학본부에 제출해 봤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학교 안 프레스룸에 던져 놓고 나왔다.

 

얼마 후 <한국일보>기자에게서 제 보고서를 읽었다며 연락이 왔어요. 그 기자님께서 오랜 시간 저와 함께 작업을 하시고 심층 기사로 사회면 2면에 제 보고서 내용을 실어 주신 덕분에 마침내 학교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보고서를 발표한 지 약 16개월여 만에 시각장애인이 사용할 수 있는 화면읽기 프로그램이 탑재된 컴퓨터 2대와 점자 프린터, 확대 독서기 등을 갖춘 아름터라는 이름의 시각장애인 학습지원센터가 만들어지게 됐죠. 보고서를 쓰기 위해 미국이나 유럽 등의 장애 관련 법들과 편의시설 및 각종 장애인 보조공학기기들에 대해 공부했던 것이, 이후 시각장애대학생연합회 회장으로서 다양한 장애학생 권익 옹호 활동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죠. 오랜만에 다시 학생으로 돌아와 방송대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것에 새삼 감사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었어요.”

 

방송대에 바란다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필요한 테블릿 시험문제 대독 대필 등을 돕기 위한 도우미 제도의 미흡, 교재 점역 및 장애 특성에 맞는 정당한 시험편의 제공의 부재, 홀리스틱한 장애학생 지원체계의 부재 등으로 인해 다양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시험 포맷이 기존의 종이와 펜을 기본으로 하는 방식에서 테블릿 시험 방식으로 급작스럽게 바뀌면서 시각장애인들의 시험 접근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탓에 화면읽기 프로그램 등을 이용해서 시스템에 접근할 수도 없고, 기존처럼 종이와 연필로 누군가와 읽고 쓰며 풀 수 있는 옵션도 없이 현 상황에 맞추도록 내몰린 시각장애인들은 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됐어요.

 

또한, 시험시 대필 및 시험지 대독 등을 위한 보조인력이 더 긴요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방송대학교가 온 캠퍼스 대학들과는 달리 오프라인에서 자원봉사하는 장애학생 지원을 조건으로 하는 근로장학생 등을 구하기 어렵다 보니 전적으로 장애 당사자가 인력을 구해야 하는데, 그건 당연히 더 어렵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방송대 시험은 모두 같은 날에 이루어지는데 설사 방송대학생 중 누가 돕고 싶다고 해도 그 누가 장애학생을 돕는 일을 일정하게 할 수 있겠어요?

 

더구나, 장애인 활동지원사들은 대부분 고령이라 컴퓨터 활용이나 영어 등을 읽는 활동에 어려움이 있어 이러한 도움을 주는 옵션으로는 열외이고요. 도저히 어쩌지 못해 직장 동료나 가족까지 동원을 해 가며 시험을 봐야 했거든요. 심지어 언젠가는 도저히 도와줄 사람이 없어 당시 한국에 출장을 왔던 한국어가 유창한 일본인 친구에게 시험 대필과 대독을 요청한 적도 있었다니까요.

 

근본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장애학생들의 학습지원을 전담하는 장애학생 지원센터가 보통의 일반 대학교처럼 본교에 설치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각 지역대학마다 관련 직무에 전문성을 갖춘 책임성 있는 일종의 코디네이터와 같은 전담 직원과 직무를 배정하여 학교와 장애학생 사이의 효율적이 커뮤니케이션과 장애학생들의 옹호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은 동문이 유치원에서 장애공감교육을 하는 모습.

장애인식개선 아니라 장애공감교육

10년 넘게 다양한 계층의 장애이해 증진 및 장애공감교육을 해 오고 있는 은 동문은 사람들이 주로 쓰는 장애인식개선이라는 말이 불편하다고 했다. ‘개선은 무언가 잘못된 것, 나쁜 것을 바꾸거나 좋게 만든다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이다. 자칫 이런 관점은 장애를 접해보지 않아서, 잘 몰라서 그런 것뿐인데 사람들이 뭔가 잘못한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이것은 사람들이 장애와 장애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부정적인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인식개선이 아니라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장애공감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레이디 고디바라고 혹시 아시나요? 유명한 벨기에 초콜릿 회사 이름이기도 한데요. 영국 영주의 아내였던 고디바는 남편의 영지 농민들에 대한 과도한 세금 부과에 마음 아파하며 여러 번 남편에게 세금을 깎아줄 것을 부탁했죠. 하지만 영주는 그 말을 들어주지 않다가 어느 날 말하기를, 당신이 나신으로 말을 타고 우리의 성을 한 바퀴 돈다면 세금을 감해주겠다고 제안하죠. 오랜 고민 끝에 고디바는 어렵게 마음을 먹고는 자신이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마을 사람들을 위해 나체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것이니 그 시간에 밖을 보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실제로 용기 있게 그 일을 행동으로 옮겼죠. 저도 레이디 고디바처럼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며 반응하고, 또 그 공감을 바탕으로 저를 포함해 장애를 가진 사람들, 특히 자신의 목소리조차 스스로 내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장애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싶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장애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 용기를 가지고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해 나가려고 합니다.”

 

은 동문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이기적인가 혹은 이타적인가? 이기적의 반대말은 이타적인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심과 이타심의 본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로 당장 전철을 타지 못해 불편하지만, 이렇게라도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 은 동문이 왜 공감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했는지. 새삼 요즘 한창 회자되고 있는 이기적 이타심이라는 말이 은 동문이 들려준 삶의 이야기와 어우러져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힘은 거창하고 원대한 꿈보다는 공감을 에너지 삼은 평범한 우리들의 이기적 이타심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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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pis***
    장애당사자로서 공감합니다. 저도 직장에서 비장애인 노동자가 이렇게 말하면 장애노동자가 마음을 다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말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1년에 한 번 법으로 정한 의무라서 어쩔 수 없이 듣는 것이 아니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의 말씀처럼 장애인 인권교육을 꼼꼼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도 장애인들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로서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추어야 하고요.
    2022-06-16 11:27:52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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