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우리 시대를 일구는 문화예술인

YS 재임 시절 대통령을 따라 문화사절단 서예대표로 가면서 외국에 한국의 서예를 알리던 김종태(81세) 서예가가 방송대 일본학과의 문을 두드린 건 그의 나이 75세 때였다. 중국과 일본을 자주 오가던 그는 더 늦기 전에 일본을 좀더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라졌다. 응원하거나, 만류하거나. 오기도 생겼고, 어떤 일이든 시작했으면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평소 신념이 그를 ‘완주해보자!’는 쪽으로 기울게 했다.
그렇지만 그에게 첫 1년은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외우고 또 외워도 하루 지나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공부한 내용이 모두 증발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공부에 진척이 있는 걸까? 2학년이 됐을 때, 회의와 함께 포기하고 싶은 약한 마음이 찾아들었다.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서예가의 길 40년 후회 없어
30년 전에 받았던 장남 장학금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일본학과 후배 위해 장학금 기탁
계속 도전하는 삶 살고 싶어


저렴한 등록금과 우수한 교수진에 매료
“아랫목에 콩나물시루를 놓고 광목천으로 덮은 뒤 매일 물을 부어주면, 콩나물이 쑥쑥 자라던 게 떠올랐어요. 물은 아래로 모두 빠지고, 그 작은 콩에서 콩나물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더군요. 아차, 싶었어요. 진전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공부였는데, 1학년 때 공부하던 교재 두 권을 펼쳐놓고 읽어보니,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고, 또 해석도 가능한 걸 알게 됐죠. 자신감을 가지게 됐어요.”김 동문은 그렇게 해서 6년 만에 방송대 일본학과를 졸업했다. 3, 4학년 때는 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 올해 2월 졸업식에서 그는 ‘우수 시니어상’을 받았다. “방송대 공부는 나이순이 아니란 걸 알게 됐어요. 등록금도 저렴하고, 내 시간에 맞춰 공부할 수 있고, 게다가 우수한 교수진까지 갖춘 학교잖아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죠.” 그는 인생을 좀더 의미 있게 살고 싶어서 방송대를 선택했는데, 정말 잘한 선택이라고 거듭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생활체육지도과’에 다시 진학해보고 싶은데, 몸이 따라줄 것 같지 않다.
“방송대에서 보낸 지난 6년은 정말 더 젊어진 느낌입니다. 우리 대학은 에너지 충전소 같아요. 저처럼 나이 드신 분들도 공부할 수 있는 곳이지만, 좀더 젊은 분들도 방송대에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새로운 공부로 지식을 쌓는다면,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가 한결 쉽지 않겠어요.”

학과 후배들에게 장학금 기탁한 배경
그런 김 동문이 학과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을 기탁했다. 그가 해마다 150만 원을 학과 장학금으로 내놓기로 한 데는 사연이 깊다. 그가 서예학원을 운영하던 시절, 장남이 의과대학에 진학했는데, 김 동문에게 서예를 배우던 한 제자(하동 정씨 종친회 이사)가 그의 형편을 안타깝게 여겨 종친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한 것.
의대를 마칠 때까지 전 학기 동안 ‘김씨’가 하동 정씨 종친회 장학금을 받았으니, 김 동문으로서는 결코 이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 자신도 사회에 뭔가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은 방송대를 선택해 6년의 공부를 마치고 졸업하면서 구체화됐다. 김 동문의 장학금 150만 원은 다섯 명의 학우에게 30만 원씩 돌아가게 된다. 그는 이 장학금을 계속 기탁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서예학원을 했지만, 사실 형편이 좋은 건 아니었어요. 그때 저희 장남이 받은 장학금이 등록금에 해당하는 150만 원이었으니, 의대를 마치는 데 큰 도움이 됐죠.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요. 뭔가 뜻있는 일을 생각하다가 그때 받았던 장학금 150만 원을 후배들에게 돌려주자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김 동문은 경북 경산시 질량읍 선화리가 고향이다. 뙤약볕 아래 부친을 따라 풀을 뽑고 농사짓는 일을 하면서 자랐다. 고등학교는 대구 시내에 있는 대륜고로 진학했는데, 문제는 통학하는 데 무려 5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고교를 마친 그는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야밤을 틈타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 7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부산조선공업(주) 서울주재 사무소에 취업했다. 독학으로 관련 분야 를 공부해가며 영업상무까지 지냈지만, 과로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25일이나 병원에 누워 있었죠. 일에만 빠져 살던 제 삶을 돌아보게 된 계기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축문을 짓고, 지방을 쓰는 일을 했어요. 붓글씨를 쓰면서 즐거워하던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그렇게 해서 서예가의 길에 들어서게 됐죠.”
시간을 쪼개 틈나는 대로 서예학원을 쫓아 다녔다. 김 동문은 이 시절이 참 행복했다고 말했다. 회사 생활을 접고 1984년 본격적으로 서예학원을 시작했다. ‘국회의원들의 서예 선생’이었던 고강 선생에게 사사한 김 동문은 1990년 학원총연합회 서예분과위원장을 맡아, 적자에 허덕이며 해체 위기에 놓인 서예분과를 살려냈다. 1995년에는 한국서예인산학회를 창설하는 데 앞장섰다. 같은 해 <해동문학>으로 등단해 시인 활동도 겸했다.
김 동문의 활동은 해외로까지 확장됐다. 미국 메릴랜드대, 캘리포니아주립대가 각각 주관했던 ‘한자서법교육 국제회의’(1998, 2000)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한국서예의 발전과 변천 과정을 소개하고 서예시범을 통해 한국서예의 독자성을 알렸다. 역대 대통령들의 해외순방 때 문화사절단으로 참여해 한국 서예의 미적 가치를 널리 전파하는 민간외교관 역할도 톡톡히 했다. 그의 행보 하나 하나에 열정과 에너지가 넘쳤다.

 



병중에 만난 서예, 독자적 서체로 이어져
서예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독자적인 서체를 꿈꾸게 마련이다. 김 동문은 자신의 고향 ‘선화리’라는 이름을 따서 자신의 서체를 명명했다. 그것이 바로 ‘선화체(仙花體)’다. 한글과 한문의 필법을 융합한 ‘선화체’는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하는 신선처럼 자유롭고 활짝 핀 꽃처럼 화려한 글씨로, 무위자연의 사상을 담았다. 2000년 해동서예학회를 창립해 후학을 양성하고, 한국 서예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는 데 주력한 그는 2014년 <한국서예신문>을 창간하는 등 지금까지 한국서예 발전을 위해 전력하고 있다.
“제 삶의 좌우명은 세 가지입니다. 건강 저축, 지식 저축, 금전 저축이죠. 이 세 가지를 실천하고, 습관이 되게 살았어요. 돈만 저축하는 게 아니라, 건강도, 지식도 부지런히 저축해야 변화하는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주도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작곡과 연주에도 시간을 많이 쓰고 있는데, 가수로도 활동해보고 싶어요. 인생길에 아직 할 게 많이 남아 있으니까, 하루하루가 재미있습니다. 계속 도전해보고 싶어요.”
청춘의 시절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40여년 서예의 길을 개척한 그는 방송대를 만나면서 ‘지식 저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올해 나이 81세. 그가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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