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제46회 방송대문학상

“안평중은 남들과 어울려 사귀기를 잘 했으니 오랜 세월이 흘러도 상대방을 공경하였다.” 『논어』 「공야장」
공자는 제나라 대부 안평중의 사귐을 일러 ‘구이경지(久而敬之)’라 했다. 이후로 ‘구이경지’는 오래 동안 원활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방책으로 회자되어 왔다. 첨단통신기술의 발달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방법도, 친구의 의미도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할 수 없는 진리는 사람은 서로 교류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시간 대학 심리학과 쵸픽(William Chopik)교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진실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는 북극성 같은 친구, 한 여름 뙤약볕에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느티나무 같은 친구, 그리고 항상 깨어 있게 하는 죽비(竹?)같은 친구가 곁에 있다면 어떨까?
아이의 꿈은 시인이었다. 놀이기구도 변변히 없었던 60년대 시골 마을, 고작 놀이라곤 또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소꿉놀이, 학교놀이, 고무줄뛰기 정도가 전부였다. 그럴 때면 아이는 친구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곤 했다. 오색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린 인어공주, 궁에서 쫓겨난 백설공주, 거지와 운명이 바뀐 거지왕자, 유리구두의 신데렐라에 관한 이야기는 또래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이들이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면 아이는 뭔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곤 했다. 
1976년 3월, 친구들은 서울로 부산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고, 나는 뜻밖에도 지방공무원이 되어 동사무소(주민센터)로 첫 출근을 했다. 때 마침 주민등록증 일제 갱신 기간이라 이른 아침부터 민원이 길게 줄 지어 담당자가 출근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 있던 나는 이제 시민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의 불편을 해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갓난아기가 편안한 엄마 뱃속에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 그 낯설고 어리둥절한 느낌이라니…… 민원인의 고함 소리에 주눅 들고, 아기들의 울음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려운 한자 성명 그리느라(?) 내 팔과 어깨는 끊어질 듯 아파왔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렇게 20대로 막 접어든 내 인생은 담배 연기 매캐한 좁은 사무실에서 꿈도 사라지고 방향 감각마저 잃은 채 어둠의 긴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럴 즈음 ‘그’를 처음 만났다. 늦은 밤에도 쉬는 날에도 ‘그’는 내 옆에서 떠나지 않고 나를 지켜 주었다. 문학공부도 포기하지 말고, 현실도 포기하지 말라며 격려해 주었다. 당장 필요한 공부는 공무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법 지식, 행정학과 같은 사회과학이었다. 밤에는 라디오 방송 강의를 듣느라 잠을 설치고. 낮에는 밀려드는 민원 해결하느라 연일 코피가 터졌다. 업무처리를 위해서는 관련법령을 익혀야 했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절차와 규칙의 틀 속에 갇혀 학창시절의 문학적 감수성은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내 삶에 퇴로가 보이지 않을 무렵, 1982년에 두 번째 ‘그’를 만났다. 
‘그’ 덕분에 나는 영문학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직장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엄청난 학습량에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다. 영미소설, 영미산문, 영미시 등 주옥같은 원문을 읽으며 영미문학에 점점 빠져들었다. 도시락을 싸들고 지역 학습관을 오가며 혼자 영문학 공부에 몰두했다. 그렇게 보낸 5년이라는 시간 덕분에 나는 예전과는 다른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공직에 대한 시각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나는 다시 부산시 공무원이 되었고 일반 행정이 아닌 도시브랜드, 도시 마케팅, 국제회의를 유치하고 개최하면서 외국출장도 자주 나가게 되었고 영어를 활용하는 전문분야의 업무를 추진하면서 그렇게 30년이 흘러갔고 나는 마침내 정년퇴직을 했다.
그런데 올해, 2022년, 40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나 국문학과에 편입했다. 사실 처음 만난 때부터 ‘그’는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 다만 내가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묵묵히 나를 지켜보며 어둠 속에서 길을 밝혀준 북극성 같은 친구다. 내 삶의 길목마다 나타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한 ‘그’가 다시 나에게 어린 시절의 까마득했던 꿈을 상기시켜주었다.    


공자가 말했다. “도움이 되는 세 종류의 친구가 있으니, 곧은 말을 하는 자, 아량이 있는 자, 견문이 많은 자는 도움이 되는 친구다,”(孔子曰: 益者三友. 友直·友諒·友多聞, 益矣. 『논어』 「계씨」)

 시민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는 함석헌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에서 “온 세상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고 노래했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눈빛만 보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다. 
1973년 5월, 햇살이 눈부셨던 어느 날이었다. 교정 뒤뜰 장미 동산에서 소리 없이 내 곁으로 다가와 앉으면서 “나는 엄마가 둘”이라던 그녀의 젖은 눈을 보고 우리는 서로 말길을 텄다. 그녀는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 온 촌뜨기인 나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 준 친구였다. 그녀는 며칠 후 자기 생일이라며 집으로 초대했다. 그녀만을 위한 별채 거실에는 빨간 카펫이 깔려져 있었고, 벽면에는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오디오 장치였다. 그녀는 평소 즐기는 곡이라며 송창식의 「한걸음」이란 노래를 틀어주었다. 그때부터 내게도 최애곡이 생겼다. 태어나 처음 받아 본 생일 초대와 그날의 풍경이 지금도 그림처럼 선명하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어딜 가든 함께였다. 소풍 갈 때도, 체육시간에도, 구내식당 갈 때도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와 평소 잘 어울렸던 몇몇 친구들은 ‘이상한 아이’하고 같이 다니지 말라며 종종 충고(?)했지만 그녀는 아량 곳 하지 않았다. 
 여고 졸업 후 서울로 유학 간 그녀는 방학 때면 내 근무지가 어디든 마다 않고 찾아오곤 했다. 그러는 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우리는 자주 못 만났지만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접시꽃이 환하게 피어날 때면 우리는 꽃 소식과 함께 각자 고단한 결혼 생활을 전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가끔 내가 서울에서 장기간 교육 받고 있을 때면 김치와 반찬을 손수 만들어 숙소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이렇듯 그녀는 내 고단한 삶의 굽이마다 서 있는 한그루의 느티나무 같은 존재였다. 
옛날 중국 춘추시대 백아(伯牙)라고 하는 사람은 거문고를 아주 잘 탔고 종자기(鍾子期)라는 사람은 백아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잘 들었다고 한다. 백아가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에서 거문고를 타면 “태산 같도다” 하고, 흐르는 물을 생각하면서 연주하면 “넓은 강물 같도다” 했다. 이에 백아는 “내 거문고 소리를 듣고 내 마음을 아는 그대여! 정녕 지음(知音)이로다”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녀도 내게는 백아의 마음을 알아주는 종자기 같은 친구다. 지음이다. 우리가 말길을 턴 지 50년, 그 세월의 언덕을 넘어 백발이 성성해진 그녀가 지금 나에게 오고 있다.    

‘먼 곳에서 벗이 나를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논어』 「학이」)’ 

남들이 인정하는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남자와 경제력을 가진 여자가 결혼했다. 능력 있다는 남자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 한다고 하여 여자 마음에 들었고, 여자는 ‘어수룩하게’ 보여 남자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남자는 큰형의 부도로 살던 집까지 경매에 넘어가 당장 자신이 거처할 공간이 필요하던 터였다. 그런데 남자는 결혼 4개월 만에 안정된 직장에 사표를 내고 가출을 했다. 한 달 동안 소식이 없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10년 일한 퇴직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시작한 지 1년도 채 안 돼서 정리하고 겨우 회수한 자금마저 도박으로 다 날렸다. 여자는 그때부터 남자에 대한 믿음을 접었다. 
남자는 직장 두어 곳을 들락거리다 결국 미역과 다시마 배달하는 일을 했고, 등산로 입구에서 멍게를 팔기도 했고, 고추 장사를 하기도 했다. 며칠 동안 말없이 집을 나가 울릉도에 가서 오징어잡이도 했다. 그러는 중에도 남자는 끊임없이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부렸고, 가재도구들을 부수고,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는 바람에 손을 다쳐 야간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고, 술에 취해 싸우다가 유치장에 구금되기도 했다. 새벽에 만취 상태로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문밖에 쓰러져있기도 했다. 
여자는 남자의 방만한 삶에 엮이지 않으려 기를 썼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든든한 방호벽이 되어야 했기에 스스로 여성가장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결혼 전 방통대 영문학 공부를 위해 사표를 냈던 여자는 다시 공무원이 되었다. 여자에겐 오히려 직장이 탈출구였다. 나름 성공적인 커리어우먼이 되어가면서 여자의 삶에서 남자의 존재 의미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럴수록 남자는 불만과 소외감으로 자주 이혼을 요구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만취 상태에서 쓰러져 자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불현 듯 남편의 저런 모습이 어떤 한 전생의 내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모습이 남편에게 투영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남편은 자신도 모르는 채 이  힘든 악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남편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결혼 초부터 30여 년간 나는 남편에게 모든 믿음을 접고 내 삶에서 남편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 했다. 나는 마침내 부부라는 인연을 새로운 관점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다음날 남편에게 제안했다. 서로에게 기대하고, 의무와 책임을 강요하며 실망하고 좌절하는 무거운 관계로 살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지원하고 응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친구 또는 도반(道伴)으로 살자고. 이 선언을 한 후부터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남편은 갑자기 목수 일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남자에게 목수일은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강원 화천 한옥학교에서 6개월간 목수 일을 배운 후부터 팀을 짜서 한옥을 짓기 위해 전국을 다니다 보니 집을 떠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자는 여자대로 대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남자는 자급자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귀농을 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시골살이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었던 남자는 무모하리만치 용감했다. 지붕만 얼기설기 만들고 벽체는 비닐로 산골바람을 막고, 땅바닥은 널빤지를 깔아서 만든 거처에서 몇 년을 살았다. 밤이면 산짐승의 공격에 대비해 커다란 망치를 옆에 두고 잤다. 평소 좋아하지도 않던 고양이와도 함께 살게 되었다. 밤이면 마실 나가 꼭 새벽에 들어와서 배고프다고 문 앞에서 야옹거리는 고양이는 술에 만취되어 새벽에 들어오곤 했던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좋은 것은 따르고, 좋지 않은 것은 미루어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논어』 「술이」) 
  
 나는 스스로 조금 고집스럽지만 성실하고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을 만나고 나서야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편은 오랜 상처를 혼자서 감당하지 못해 술주정과 폭력으로 그 상처를 잊으려 했고, 나는 남편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한 채 남편의 존재를 아예 내 삶에서 지우려고 했다. 그동안 남편의 술주정과 폭력은 어찌 보면 내 오만을 깨뜨리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 오만을 아이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패로 활용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남편은 나를 깨우치기 위해 내 곁에 온 죽비 같은 친구였다.  
 언제나 깨달음이 더딘 ‘어리숙한’ 나, 마지막 남은 힘과 용기를 내어 ‘그’에게로 간다.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북극성 같은 벗, 느티나무 같은 벗, 죽비 같은 벗이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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