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제46회 방송대문학상

* 극은 실제 서점에서 공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였다.
무대는 기본 설정을 제외하고 각 장소에 맞게 연출되길 바란다.

배경 _ 겨울, 소도시의 작은 서점.
무대 중앙, 책장으로 만들어진 데스크. 위에는 노트북, 카드 단말기가 있다. 데스크 하단은 진열 서가로, 신간 서적을 올려놓았다.
오른쪽에 외부 출입문이 있다. 불투명 유리로 된 문으로 빛이 들어온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손님이 출입할 때마다 울린다.
출입문 앞쪽에는 간이테이블이 있다. 위에는 커피포트와 티백 세트, 종이컵, 아래는 휴지통이 있다.
왼쪽에는 판매용 책장. 책장 앞에는 나란히 앉는 2인용 좌석이 객석을 마주 보고 있다. 소설, 시, 인문과학 등 서가가 나뉘어 있으며, 관객이 알아보게 표시할 필요는 없으나 해당 책을 꺼낼 때, 정해진 섹션별로 이동하며 꺼내야 한다.

등장인물
김연우 _ 여자, 30대. 겨울책방 주인
장혜인 _ 여자, 50대. 옆 동네 서점 초원서가 주인
손님 _   남자, 중년의, 비밀을 간직한
남정호 _ 남자, 20대. 손님.



1. 저녁, 서점.
연우, 데스크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다. 휴대폰이 울린다. 받는다.

연우   네, 겨울책방입니다. 네. 일곱 시까지 해요. 아, 야간비행이요? 잠시만요 (노트북에 검색하는) 출판사는 상관없으세요? 출판사마다 번역이 조금씩 다르거든요. (사이) 아, 상관없으세요? ……내일 오전, (메모한다)

손님(쇼핑백을 들고 있는), 다급히 들어온다. 책장을 더듬듯 책을 찾는다.
연우, 손님을 응시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연우   네. 아홉 시. 성함이, 남정호 님. 네. 예약해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 어서 오세요.

손님, 다급히 한 권을 꺼내 들어 2인석에 앉는다. 쇼핑백을 의자 옆에 내려놓고, 표지를 펼쳐 책날개부터 탐독한다.
연우, 책장에서 ‘야간비행’을 찾는다. 방금 손님이 훑고 지나간 자리다. 다시 찾지만, 책이 없다.

연우   (눈치를 보며 손님 옆에 서는,) 저, 손님.
손님   …….

손님은 책 가까이 얼굴을 대고 읽는다.
연우, 그가 읽고 있는 책을 가까이서 훔쳐본다. ‘야간비행’이다.

연우   저기, 죄송합니다만, (손님의 팔꿈치를 살짝 건드리는)
손님   앗! (침을 꿀꺽 삼키고는) 누구시죠.
연우   저……, 여기 주인인데요.
손님   아! 실례했습니다. 제가 너무 급히 먹느라,
연우   네?
손님   이, 책을 읽느라요.
연우   아……, 죄송하지만, 그 책이 판매용이 아니라서,
손님   (멈칫) 책방, 이라는 간판을 본 것 같은데?
연우   죄송합니다. 사실은 이미 팔린 책인데, 제가 깜빡하고 빼놓질 않아서……, 죄송합니다.

연우, 고개를 꾸벅 숙인다.
손님, 책을 펼친 그대로 두 손으로 꼭 잡고 있다.

연우   괜찮으시면, 차…… 한 잔 드릴까요?

연우, 간이테이블 커피포트에 생수를 붓고 버튼을 누른다.

연우   커피는 없는데, 티백차는 있거든요, 원래 유료로 판매하는 건데 제가 너무 죄송해서요. (티백 상자를 열며) 루이보스 어떠세요? 녹차랑 홍차도 있어요,
손님   뭔가, 먹던 음식을 뺏긴 기분이 드는군요.
연우   아……, 죄송합니다.
손님   아, 아닙니다.

손님, 책날개를 만지작거리다 책을 덮는다.
연우, 티백 하나를 뜯는다.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조심스레 손님에게 내민다.

연우   루이보스로 했어요. 혈액순환에 좋대요.
손님, 마지못해 받아든다.
책을 챙기는 연우, 상한 곳이 없나 확인한다. 깨끗하다.

손님   저, 그래도 아직 구매자가 안 오신 것 같은데, 제가 구매하면 안 되겠습니까.
연우   아……, 그럼, 잠시만요.

연우, 데스크로 돌아와 전화를 건다. 기계음이 들린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우. 잠시 고민하다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건다.

연우   아, 안녕하세요. 장선생님. 저 겨울 책방 김연우예요. (사이) 네 그럼요.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실수로 예약된 책을 판매해버려서, 야간비행이요. 아……. 아니에요. 제가 너무 갑자기 부탁을, 네. 괜찮아요. 또 연락드릴게요. (끊는다)
손님   (벌떡 일어나) 저, 다른 책도 괜찮습니다.
연우   가, 감사합니다.

손님, 다시 책장으로 간다. 책장을 훑어본다.
연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야간비행을 포장한다.
손님은 책을 고르지 못하고 서성인다.

연우   찾는 책 있으세요?
손님   고전 문학 말고, 요즘 나온 책도 있나요.
연우   신간은 여기 앞쪽에 있어요. 요즘 추천해 드리는 책은, 이거,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인데,

연우, 데스크의 앞면, 진열 서가를 가리킨다.
손님, 데스크로 가까이 온다.

연우   책을 수선하시는 분이 쓰신 에세이에요. 찢어진 책이나, 오래된 책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과정도 있고, 중간에 사진도 있어요. 보면 엄청 신기하거든요. 노란색 책이요.
손님   (책을 들고) 계산, 먼저 하겠습니다.
연우   아! 네! 만 삼천 원입니다.

손님, 현금 계산 후 창가로 가 읽기 시작한다. 그는 마치 굶은 사람처럼 책을 읽는다.
연우의 휴대폰이 울린다.

연우 (받는다) 겨울책방입니다. 아! 손님. 아니에요. 착오가 있어서 전화 드렸는데 해결됐어요. 네. 내일 오전에 오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연우, 전화를 끊고 손님을 본다.
책을 읽는 손님은 침을 꿀꺽 삼키기도 하고 무언가를 잘못 씹은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리기도 한다.

음악이 흐르고 조명 조금 어두워진다. 시간이 꽤 흐른 뒤다. 연우, 졸고 있다.
손님,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배를 문지르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는다. 그 자리에 책을 그대로 두고 일어서는 손님. 천천히, 잠든 연우에게 목례하고 퇴장한다. 딸랑, 종소리.

연우, 일어난다.
창가 빈자리에 놓여있는 종이컵과 책. 의자 옆의 쇼핑백.
연우, 다가가 확인한다.

연우   차는 하나도 안 마셨네…….

연우, 걸음을 옮기려는데 의자 옆, 그가 두고 간 쇼핑백이 발에 채인다.
연우, 쇼핑백을 든다. 음악이 높아진다. 암전.



2. 다음 날 아침.
서점 데스크, 쇼핑백이 올려져 있다.
연우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2인용 테이블 위에 올리고 휴대폰을 본다.

연우   열한 시가 다 돼가는데……,

정호가 들어온다. 연우, 딸랑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연우   어서 오세요.
정호   책 예약하고 왔는데……,
연우   아! 야간비행!
정호   야간비행……, 아, 그 책 맞아요. 얼마에요?
연우   만원입니다.

휴대폰을 내미는 정호, 연우, 받아든다.
정호   이거 책 읽어보셨어요?
연우   최근은 아닌데 예전에 읽어봤어요.
정호   어때요?
연우   네?
정호   재밌어요?
연우   어……, 재미있다기보다 아름다운 책이에요. 봉투 필요하세요?
정호   네.
연우   만 백 원 계산하겠습니다.

정호, 쪼그리고 앉아 진열 서가를 본다.

연우 영수증 드릴까요.

정호, 대답 없이 책을 구경하고 있다. 연우는 쇼핑백에 책을 담는다.

정호   이거 기준이 뭐예요?
연우   어떤?
정호   여기 이 책이요, 무슨 기준으로 디피한 거예요?
연우   주로 신간이에요.
정호   아, 신상~.

정호, 흰색 시집(실비아 플라스 의 선집)을 들고 일어선다. 700쪽으로 두껍다.

연우   그건 나온 지 좀 된 건데, 제 취향도 반영해서 놓거든요. 표지가 예쁘면 더 좋구요.
정호   와, 두껍네. 이걸 진짜 읽는 사람이 있어요?
연우   내용이 좋아요, 실비아 플라스라고 미국 작가인데,
정호   뭐야? 시집?
연우   미국에선 『호밀밭의 파수꾼』에 맞먹는 걸작이란 얘기도 있어요-.
정호   (말을 끊고) 누군지 몰라도 시간 되게 많았나 보네요. 이렇게 두꺼운걸,
연우   왜요, 해리포터 같은 소설 보면 권수가 훨씬 많잖아요. 그게 더 두꺼울걸요.
정호   에이, 그래서 다들 영화로 보잖아요.
연우   아……, 그런, 가요?

정호, 책을 제자리에 둔 뒤 휴대폰과 쇼핑백을 든다. 영수증이 바닥에 떨어진다.

정호   많이 파세요.
연우   조, 조심히 가세요.

연우, 바닥에 떨어진 영수증을 휴지통에 넣고, 진열 서가를 바라본다. 시선집을 치우고 얇은 책을 올려놓았다가, 다시 처음의 상태로 되돌린다.
잠시 뒤, 등에 짐가방을 맨 혜인이 방문한다. 딸랑이는 종소리,

연우   (혜인을 보고) 어서오세……, 장 선생님?
혜인   김사장님~ 사랑하는 김연우씨! 오랜만에 얼굴 보네.
연우   초원서점은요?
혜인   정기 휴일. 오늘 화요일이잖아.
연우   아 그렇네요. 벌써……, 아! 앉으세요. 밖에 꽤 춥죠? 차 드릴까요?

혜인, 왼쪽 2인석에 앉는다.

혜인   좋지요. 우엉차도 있어?
연우   네. 있어요. (커피포트를 켜는) 초원서점은 요즘 어때요?
혜인   맨날 똑같지 뭐. 그래도 아동 서적 들여와서 매출이 쪼끔 늘었어, 주말엔 가족들 와서 연말 기분도 나고, (사이) 아 맞다. 어제 전화했던 책은? 구했어?
연우   해결했어요…….
혜인   참 그래. 꼭 팔릴 것 같아서 들여놓으면 도대체 찾는 사람이 없다가, 안 팔릴 것 같아 반품 하면, 꼭 다음날 찾는 사람이 나타난다니까. 눈에 불을 켜고,
연우   (웃음) 참, 선생님 혹시, 실비아 플라스 시선집 보셨어요?
혜인   마음산책에서 나온 거지? 근데 두께감이 있어서 잘 나가?
연우   역시, 오프라인에선 무리겠죠?

연우는 티백차를 준비하며 혜인과 대화한다.

혜인   모르지, 어느 책이든 주인이 따로 있잖아. (진열 서가를 보고) 저 책, 흰색 맞지? 겨울이랑 잘 어울린다. 예쁘네.
연우   의미 있는 작간데, 사람들이 잘 몰라요. 마음 같아선 어디 아침 드라마에라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그럼, 검색은 해볼 거 아녜요.
혜인   자기두 참, 아침 드라마도 끝난 지가 언젠데,
연우   끝나요?

연우, 차를 건네고, 혜인 옆에 앉는다.

혜인   응, 티브이에서 이제 아예 안 하더라. 나도 한동안 잠 까려고 챙겨봤었는데, 다시 보기로 보기도 그렇고.
연우   사라졌다고 하니까 뭔가 아쉽네요.
혜인   그치? 아, 따뜻하다. (차를 마시고) 나중에 종이책 사라지면, 책 안 읽던 사람들도 아쉬워하려나?
연우   사라질까요? (자신의 책방을 둘러보며) 하긴, 이 속도면 우리 책방이 제일 먼저 사라질 것 같아요. 참, 어제 이상한 손님 왔었는데,
혜인   이상한 손님?
연우   돈을 내고 책을 사서, 여기 앉아서 끝까지 읽고는, 그대로 두고 갔어요. 코를 거의 종이에 대고, 정말 집중해서 보던데…, 요즘에 보기 어려운, 장서가라고 해야 하나?
혜인   야, 장서가가 왜 책을 두고 가니?
연우   저거요!

연우, 데스크 위 쇼핑백을 가리킨다.
혜인, 가까이가 쇼핑백 안을 확인한다.

혜인   이거? 책 수선가의 기록? 어? 근데 왜 이렇게 가벼워? 하드커버가 이렇게 가벼웠나?
연우   저는 잘 모르겠던데,

연우, 책장에서 똑같은 책을 꺼내 준다.
혜인, 연우가 든 책을 받아 양손에 비교해본다.

혜인   어? 이거, 이상한 손님이 두고 간 게 더 가볍다.
연우   (받아든다. 비교해보고는 웃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근데 살짝 보니까, 쇼핑백 안에 새 노트도 있어서, 며칠 보관해두려고요.
혜인   나 근데, 그 손님 이야기 어디서 들은 것 같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자기, 용산역 앞에 헌책방 알지. 거기에 웬 남자 손님이 와서 책을 고르고 한참 책을 읽더래. 계산도 안 하고, 거의 한 시간 동안 그러고 서 있으니까, 사장님이 보다못해 앉으라고 자기 의자를 내어준 거야.
연우   헐, 사장님 진짜 좋으시다.
혜인   그치? 근데 그 말에, 손님이 ‘앗, 제가 서서 읽고 있었군요?’ 이랬다는 거야.
연우   그 자리에 서서…….
혜인   우리 단골 중에 중고 책방 답사 다니는 엄마가 있거든? 그 엄마가 봤는데, 가만히 서서 책을 읽는 모습이, 옛날에 청량리역 포장마차 있잖아. 늦은 저녁에 국수 막 먹는 아저씨들처럼, 그렇게 맛있어 보이더래.
연우   늦은 저녁 손님…….
혜인   그렇게 맛있는 책 읽어본 게 나는 대체 언제냐……!
연우   그 손님, 어떻게 생겼대요? 나이라던가,
혜인   글쎄, 그냥 (마시며)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구나 하는 거지. 자기 이야기 들으니까 생각나서.

연우, 쇼핑백을 바라본다.

혜인   아, 맞다. (짐가방에서 봉투를 꺼내는) 나 이거 주려고 들렀어.
연우   뭐예요?
혜인   고구마, 시골서 보내준 건데, 아주 달달해.
연우   고맙습니다. (받아든다)
혜인   나야말로 고맙지. 연우씨 차 잘 마셨어.

혜인, 가방을 메고 일어난다.

연우   벌써 가시려고요?
혜인   뭘 벌써야. 점심시간 다 됐는데, 우리 딸래미가 나 쉬는 날은 목 빼고 기다려. 아, 아니다! 오늘 점심, 내가 책방 봐줄게. 가서 따뜻한 밥 먹고 와.
연우   아니에요. 따님 기다리잖아요. 그리고 저, 샌드위치, 배달올 거예요.
혜인   에이그 냄새 난도 맨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언제 날 잡아서 우리도 따뜻한 밥 한 끼 먹자.
연우   네.
혜인   가볼게.
연우   네. 들어가세요. 잘 먹을 게요.

혜인, 퇴장한다. 배웅하는 연우, 종소리가 딸랑, 울린다.
연우, 데스크로 돌아와 테이블 아래서 비닐봉지를 꺼낸다. 우유 하나와 빵, 삶은 달걀이 들어있다. 연우가 빵의 포장을 벗기고 한입을 베어 문다. 조명이 어두워진다.



3. 저녁.
연우, 바닥을 비질하고 먼지를 휴지통에 버린다.
문이 열리는 소리. 정호 들어온다.

연우   어서 오세요. (정호를 보고) 어? 오전에 오셨던,
정호   맞아요. 이거 때문에 왔는데요.
정호,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야간비행이다.

정호   이거, 저한테 파신 책, 맞죠?
연우   (어리둥절 받는다) 네.
정호   환불받으려고요.
연우   네……?
정호   맨 앞에 보세요. 인쇄 잘못됐잖아요.

연우, 책날개를 펼친다.

정호   작가 프사만 있고 글씨가 없는데?
연우   아, 이게, 출판사마다 디자인이 달라서요, 작가 소개 없이 출판사 이름만 적혀있기도 하고-.
정호   저기요, 핑계 대지 마시구요. 똑바로 확인해보세요.
연우   잠시만요,

연우, 노트북으로 책 판매 페이지를 확인한다.

연우   어? 이게, 왜 인쇄가 안 됐지? (정호에게) 아……, 죄송합니다. 혹시 영수증 있으실까요.
정호   기억 안 나요? 영수증 그쪽이 안 챙겨줬는데?
연우   아……, 잠시만요.

연우, 서랍을 열고 매출 전표를 찾는다.
정호는 연우의 말에 시비조로 대답한다.

연우   죄송해요. 잠시만 앉아 계시면 제가 차라도-.
정호   (말 끊고) 빨리해주세요.
연우   (전표를 찾으며) 삼성카드 맞으시죠?
정호   아니요.
연우   네? 아, 그럼……, 카드사만 알려주시면,
정호   아까 삼성페이로 했는데요.
연우   어, 그럼 휴대폰만 주시면, 바로 취소해드릴게요.
정호   지금 배터리 나가서 안 되는데?
연우   그, 모바일로 결제하셔서……, 아니면 혹시 같은 가격대 상품으로 교환해드려도 될까요. 새 책으로 제가 이번엔 꼭 확인하고 드릴게요.
정호   필요 없구요. 돈으로 주세요. 참, 이것도 챙겨주시고요.
정호, 지갑에서 영수증을 꺼내 내려놓는다.

연우   (보고는) 이거는 저희 영수증이 아닌데.
정호   택시비.
연우   저기요.
정호   얼마 안 하잖아요.
연우   (기분이 나쁘다) 그럼, 책값이랑 해서……. 이만 천원 드리면 될까요.
정호   삼만 이천 원.
연우   삼만 원이요?
정호   갈 때도 택시 타야지. 밖에 추운데 걸어가라고? (비꼬며) 사장님 양심 어디 갔어요?

연우, 책을 펼쳐 든다. 페이지를 넘기자 여기저기에 줄이 쳐진 부분이 보인다. 맨 뒷장은 찢어져 덜렁거리는, 연우는 줄이 쳐진 부분을 세심하게 살핀다.

연우   손님. 이거 환불 안 돼요.
정호   네?
연우   이 책, 마지막 페이지까지 줄 다 치셨잖아요. 독서에 아무 지장 없는 책을 끝까지 읽고-,
정호   어쨌든 불량이잖아!
연우   ……
정호   내 말 틀려? 내가 오늘 그거 때문에 얼마나 쪽팔렸는데!
연우   그게 어떻게 책 때문이에요?!
정호   책 때문이 아니면 너 때문이겠지!! 누군 한가해서 여기까지 온 줄 알어? 어?!
연우   ……책값만 환불해드릴게요.

연우, 지갑에서 만 원을 찾지만 없다. 천 원 열 장을 헤아려 건네준다.

연우   택시비는 못 해드려요.
정호   사람 무시하는 거냐?
연우   손님.
정호   독서 모임이고 책 파는 년이고, 이깟 종이 쪼가리 판다고! 나 무시하냐고!

정호, 소리를 지르며 돈을 뺏어 공중에 뿌린다.
연우, 침착하려 애쓴다.

연우   소리 지르지 마세요.
정호   야!!
연우   (책을 꼭 쥐고) 저는, 환불 해드렸고요. 돈, 안 가져가실 거면 더 해드릴-,
정호   야! 누굴 거지로 알아? 어?!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연우   다른 사람 무시하는 게 누군데요, 그쪽이야말로! 처음부터 책 읽을 생각도  없었잖아요!
정호   뭐?
연우   독서 모임엔 왜 나가세요?! 제가 이해가 안-.
정호   야! 당연히 여자 만나러 나갔지! 누가 요즘 책을 읽어? 누가 이걸 진짜로 읽는 사람이 있어? (참다가) 야! 나도 좀 물어보자, 이거 왜 봐? 시집? 『어린 왕자』? 그런 거 읽으면 뭐 어디에 좋은데? 씨발, 다들 작가작가, 소행성 어린왕자 그러면서, 지들끼리만 떠들고, 나도 대답이라도 하려고 펼쳤는데, 이거는, 내거는! 한 줄도 없잖아!

정호, 화를 참지 못하고 서성이다 바닥에 떨어진 천원을 주워 연우에게 던진다.
연우, 화와 울음이 섞이지만 둘 다 참으려 애쓴다.

연우   …….
정호   야, 기분이 어때?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래. 사람을 열받게 만들었으면 그에 맞는 사과를 해야지! 진심으로 못하겠으면 환불이라도 똑바로 해주던가! 어디서 천 원짜리로 사람을 빡 치게 해!?
연우   천 원은 돈 아니에요?
정호   야!
연우   만 원짜리 책 팔면요, 딱 이천 원이 남는데, 다섯 권을 팔아야 내 시급이 나오는데, 근데, 근데, (폭발한다) 왜 천 원짜리라고 사람한테 던지고 그래! 하루에 다섯권 파는 게 쉬운 줄 알아!?
정호   야, 니가 돈 못 버는 게 내 책임이야? 어?! 그러게, 누가 책 팔래? 씨발! 왜 불량품을 팔아놓고, 왜! 왜! 나한테 승질이야!
연우   그러니까 환불 해준다고! 돈 갖고 나가라구!!
정호   뭣 같은 년이, 열받게!!

정호, 휴지통을 발로 찬다. 넘어지며 쏟아지는 쓰레기들,
연우, 몸을 움츠린다. 그때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손님 들어온다.

정호   뭐야!!
손님   아직, 영업 중이시죠? 딱, 한 권이면 되는데.

손님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연우   저기, 지금은 좀…….
정호   아저씨, 분위기 파악 못해요?
손님   제가 뭐 파악할 일이라도…?
연우   (정호에게) 그만하고 가세요.
정호   좋아. 아저씨, 아저씨가 한번 파악해봐요. 내가 어떤 책을 샀는데? 첫 페이지가 인쇄가 안 돼 있어. 다른 사람 건 다 있는데, 그럼 이게 내 잘못이에요?
손님   어떤 책이죠?
정호   저거,

정호, 테이블로 다가가 『야간비행』을 집어 든다.

손님   아! 『야간비행』.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천구백년 프랑스 리옹에서 출생,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지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 건 열두 살 때라고 해요.
정호   뭐라고요?
손님   앙투안은 나중에 커서 정말로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데, 그때가…. 천구백 이십일 년! 전쟁중에 공군으로 입대했죠. 그런데 임무 수행 중에 항공기 추락으로 두개골이 골절됐다고 해요. 덕분에 전역했고요. (과장된 한숨)  아이고 정말 큰일 날 뻔했죠? 그때 앙투안이 죽었으면, 우리가 이 책을 못 만날 뻔했잖아요.
정호   ……에?
손님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책은 『인간의 대지』에요. 작가가 실제로 비행 중에 사막에 추락하고 구조되는 경험이, 바로 그 책에 나오거든요! (정호와 연우를 번갈아보고) 아, 저도 모르게 말이 많아졌네요.
연우   작가 소개…….
손님   한마디 더 보태자면, 사실 작가 정보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저도『인간의 대지』를 읽고 나서 한참 뒤에 앙투안이 진짜 비행기 조종사였다는 걸 알았죠. (침을 삼키고, 정호에게) 읽어보셨어요?

정호, 고개를 젓는다.

손님   꼭 한번 읽어보세요. 묘사된 밤 풍경이 끝내주거든요. 광활한 어둠이 남아있던 시대. 빛 하나 없는 밤. 별이 가득한 하늘과 그 별이 반사되는 바다, (미소) 어떤 기분이 들까요. 우주를 항해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요?

손님, 책을 정호의 손에 들려준다.

손님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제가 강력히 추천 드리죠. 생떽쥐페리의 소설은 에스프레소에요. 아주 깊고, 진한 맛이죠.

정호, 뭐라 할 말을 찾다가 찾지 못한다.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손님을 빤히 본다.

정호   미쳤네. 주인이나, 손님이나……!

정호, 책을 바닥에 던지고 도망치듯 책방 밖으로 달아난다.
책을 줍는 손님. 연우는 얼떨떨하다.

연우   아……,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너무 늦게 왔나요?
연우   아니에요. 덕분에.

연우, 손님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운 뒤, 보관 중이던 쇼핑백을 꺼낸다.

연우   다시 오실 것 같아서, 챙겨놨어요.
손님   감사합니다. 오늘, 메뉴……, 책 추천도 가능한가요?
연우   네. 부족하지만 해볼게요,
손님   요즘 계속 비슷한 것만 봤더니 좀 새로운 걸, (목을 가다듬고) 새로운 걸로 부탁드립니다.
연우   신간, (책장을 살피며) 제가 사실 그냥 책을 좋아하지, 학식이 깊거나 하진 않아서요.
손님   괜찮습니다. 모든 책에 다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닌걸요.
연우   그래도, 대부분의 지식은 책에 있지 않을까요.
손님   (웃음)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연우   혹시, 새로운 걸 찾으시면, 희곡은 어떠세요?
손님   희곡.
연우   아, 좀 낯선 분야일 수도 있지만, 사람과 사람의 대화를, 읽어볼 수 있거든요. 꽤 재밌어요.
손님   제가 모르는 세계군요. 좋습니다!
연우   근데……,
손님   네?

연우, 자신의 눈가를 문지른다. 참았던 화가 잦아들고, 눈물로 나온다.

연우   죄송한데 오늘은 여기서 읽기가 힘드실 것 같아요.
손님   아, 그렇죠. 시간이 필요하죠.
연우, 책을 뽑아 손님에게 건넨다.

손님   (받아든다) 영월행 일기…….
연우   조금 오래된 작품이라 현재랑은 맞지 않는 느낌도 있는데, 그 느낌을 저는 더 좋아해요. 과거를 상상하면서 읽는 맛도 있구요.
손님   상상하면서……. 어떤 맛일까요?
연우   글쎄요, 맛이라고 물으시면, 분명, 한식일 것 같은데, 따뜻하고, 다 읽고 나면 정성이 느껴지거든요.
손님   좋습니다. 그럼 이걸로 하겠습니다.
연우   결제해 드릴게요.

두 사람, 데스크로 간다. 다시 주인과 손님의 포지션에 선다.

연우   만 팔백 원입니다.
손님   여깄습니다. (현금을 내미는)
연우   아까는, (사이) 어떻게 아셨어요?
손님   아……. 설명하자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연우   감사했어요. 덕분에.
손님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연우   전 괜찮아요. 저도 아까 화가 엄청 나가지고,
손님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죠. 잊고 지냈던 자존심이 어느새 산산조각난……,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내고, 상처를 주면, 내 마음이 다시 붙을 것만 같은, 그런 날이요.
연우   그렇게, 마음이 붙을까요?
손님   어렵죠.
연우   쇼핑백 더 큰 걸로 드릴게요. 두권 담으시려면,
손님   (멋쩍어하며) 그건…….
연우   책 수선가의 기록, 한 번 더 읽으시면 분명 더 맛있게 보실 것 같아서요.

연우, 돈을 거슬러 준다.

손님   저는, (망설이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연우   네?
손님   저는 밥 대신, 책을 읽습니다. (사이) 어떤 생명체는 햇빛에서 에너지를 얻는 것처럼, 우주의 어떤 존재는, 지성에서 에너지를 얻기도 하죠. 저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연우   재미있는 말이네요.
손님   정말입니다. 정말로, 저는 글에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연우   그럴 수도 있겠네요.
손님   (미소를 지으며) 제 이야기를 재밌게 들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손님, 잠시 망설이다 쇼핑백 안의 책을 꺼내고, 새로 산 책을 넣는다.

손님   이건, 두고 가겠습니다. 죄송했습니다.
연우   아까부터……,

손님 몸을 돌려 나간다.
연우, 밖으로 나가 손님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다. 연우, 2인석으로 가서 앉는다. 천천히 책의 첫 장부터 펼쳐본다.
백지. 첫 번째 장도, 마지막 장도, 페이지는 모두 백지가 되어 있다.

연우   백지……. 그렇게……, 태어난 사람.

음악이 높아진다.
연우, 가게 밖으로 달려 나간다. 눈이 내리고 있다. 조명이 어두워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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