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호시노 도모유키의 인간탐색

때때로 하늘을 나는 꿈을 꿉니다.

그렇다고 새처럼 가볍게 나는 것이 아니라, 지면에서 50센티 정도를 수영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팔을 내젓는 것입니다. 그래도 걷는 것보다 느릴 정도로밖에 나가지지 않습니다. 어차피 꿈이라면 좀 더 상쾌하게 하늘을 날고 싶습니다. 아마, 나는 법을 모르니 결국 헤엄을 치게 되는 것이겠지요.
인간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물고기가 아니어도 물속에서 헤엄칠 수 있지만, 공중에선 자기 힘으로 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를 동경하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나는 비행기가 떨어지지나 않을까 불안하기도 합니다. 새의 처지에서 본다면 공중에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아닐 테지요. 공기를 좀더 물 같은 물질로 느끼고 물리적으로 지탱 받으면서 날고 있는 감각일 것입니다.
바람이라는 형태로밖에 공기를 감지하지 못하는 인류에게 하늘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비쳐집니다. 인간에게 물질이란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새에게는 지상도 대기권의 공간도 모두 구체적인 물질입니다.

새에게는 모든 것이 구체적인 존재입니다. 하늘과 땅의 구분도 없고, 새가 거칠 수 없는 우주공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날지 못하면서도 공중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물질로서 닿는 것이 아니라 공중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의 대답은 명쾌합니다.
‘수컷과 암컷’이라는 생물의 기초가 된다고 여겨지는
분류법은 이미 기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치관이 라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 의해 변경될 수 있습니다.



과학도 당대의 가치관에 좌우돼
모든 추상개념은 인간의 가치관입니다. 아무리 과학적, 실증적으로 나타내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나의 젠더 개념은 이 확신 위에 세워졌습니다. ‘생물에는 수컷과 암컷이 있다’라는 분류는 이미 ‘수컷과 암컷’이라는 이분법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동물의 세계도 그렇게 보는 것이지, 만약 우주인이 나타나서 지구를 본다면 생물에 ‘수컷과 암컷’이라는 분류 방법을 적용할지 어떨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을 젠더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꽃의 색이 다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과학적인 연구라고 이야기됐던 것이 얼마나 그 시대의 가치관에 좌우됐는지는 인종이나 민족을 둘러싼 담론을 조사하다 보면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치에 의한 아리아인의 우수성에 대한 담론이 있습니다. ‘아리아인은 타민족보다 뛰어나다’라는 가치관을 전제로 하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 듯한 과학적인 데이터만 눈에 들어온다는 점 말입니다. 거기에 반하는 사실은 예외적인 것으로 치부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인간의 편견을 타파하고 보다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시켜주지만, 동시에 그 시대의 편견(당자자들은 편견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편견)에 묶여 그 편견에 따라 실증해 나가고 그 편견을 강화해 나가게도 합니다. 그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에서는 ‘의심’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번에는 트랜스젠더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며칠 전에 나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기초를 공부하는 문학자들의 모임에 참가했습니다. 동료 작가가 초대를 해 주었는데, 자기 자신도 당사자인 연구자가 강연을 하고 그에 대해 토론을 하는 형식의 비공개 연구회였습니다.

 연구모임의 개최 이유는 일본의 영향력 있는 작가가 트랜스젠더를 차별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작가는 『해리 포터』의 작가 J.K. 롤링이 최근 몇 년에 걸쳐 발언하고 있는 트랜스젠더 차별에 찬동하는 형태로, ‘사실은 남자면서 여자인 척을 하는 가짜’와 같은 비판을 시작한 것이 계기입니다.
강사가 강조한 것은 트랜스젠더란 ‘성동일성 장애’가 아니며, ‘장애인’도 아니고, ‘마음의 성과 신체의 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트랜스젠더는 사람에 따라 다양해 하나로 묶을 없는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트랜스젠더라고 하면 예를 들어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마음은 여성이고, 그래서 괴로운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러니까 이름이나 액세서리나 외견을 바꾸고 나아가 신체까지 바꾸며 자신의 마음과 같은 성으로 만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인식법은 난폭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다’라는 것 이상으로 태어났을 때 ‘남자라고 명령 받았다’라는 점이 문제이고, 그로 인해 자신의 성인식에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자신을 여성이라고 느끼고 그 갭으로 고민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원래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하지 못해 고민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동요했습니다. 나 자신은 헤테로 섹슈얼(이성애자)의 남성입니다. 거기에 위화감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성이라는 것을 내내 괴롭게 생각해 왔습니다. 자신을 여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남성이라고 여김에도 불구하고, 남성이라는 것을 견딜 수 없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요구하는 당연한 남성상에 비추어 본다면 나는 실격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그렇게 될 수 없음에 열등의식을 안고 있었고, 동시에 그러한 남성상을 혐오하면서 그렇게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노력해왔습니다.


여성-남성의 이분법을 넘어서
나는 이미 25년 이상 소설을 썼지만 대부분의 소설에서 ‘남성이라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지, 남성을 어떻게 하면 그만둘 수 있을지, 남성은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지, 계속해서 집요하게 파내려갔습니다. 그 대답은 지난 칼럼에서도 쓴 것처럼 ‘이 사회구조가 개인이 남성임을 그만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남성이라는 것을 원죄처럼 벌하는 소설도 썼습니다. 남성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 우위사회에 묶여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을 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논바이너리(Non-binary)’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을 남성, 여성이라고 정하지 않는 입장을 나타냅니다. 남성이 아니라면 여성, 여성이 아니라면 남성이라는 이분법을 그만둔다는 의미입니다. ‘성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결별한다는 입장입니다. 여성이기도 하고 남성이기도 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성, 남성이라는 개념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트랜스젠더란 이 논바이너리와 다분히 겹친다고 합니다. 나는 아마도 논바이너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단언하진 않는 것은, 헤테로 섹슈얼 남성이 논바이너리를 표명하는 것은 ‘남자인 주제에 남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가짜’라는 트랜스젠더 차별의 변명에 나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차별당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  자신 안에도 ‘나는 논바이너리다’라고 자칭하는 남자는 의심스럽다는 경계가 강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트랜스젠더와 가까운 곳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바꾸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기 때문에 트랜스젠더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남성으로 보이는 이 모습은 이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최근 몇 년 동안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어째서 이렇게 복잡해졌을까요? 많은 용어가 나왔고 세분화돼 귀찮다고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을 줄 압니다.

내 안에서의 대답은 명쾌합니다. ‘수컷과 암컷’이라는 생물의 기초가 된다고 여겨지는 분류법은 이미 기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은 인간의 가치관입니다. 인간을 떠난 이 세계나 우주의 진실은 아닙니다. 인간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 의해 변경될 수 있습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이제는 바꿀 시기가 왔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각 개인이 ‘난 여자라고 생각해’ ‘난 60% 남성이라고나 할까?’ ‘난 보라색이라고 생각해’와 같이 절실한 실감에 따라 성 인식을 넓혀간다면, 모두가 가장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번역  김석희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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