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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중반을 넘어, 황혼기에 접어들 무렵의 사람들에게 뭔가를 ‘새로’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면 점점 더 젊은 인재들을 원하는 지금의 사회풍토를 되짚어 봤을 때, 삶의 정점을 지나 이제 어느 정도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이뤘거나, 혹은 거의 이뤄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에 가까울 것이다. 게다가 ‘평생교육’이라니. 그동안 줄기차게 교육을 받아왔는데,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니!


나이를 먹는다는 것, 인생을 얼마만큼 살아왔다는 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나이듦’을 더는 긍정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의 인식과 편견들은 나이를 먹는 나 자신을 여러 멋진 말들로 합리화하려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여정과도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니, 오히려 두려워한다는 것이 더 합당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은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나타나기 쉬운데, 그 지점에 바로 ‘평생교육’이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헌법 제31조 6항에는 “학교교육 및 평생교육을 포함한 교육제도와 그 운영, 교육재정 및 교원의 지위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라고 되어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러니까 우리의 생애에 걸쳐 다양하고, 종합적인 교육을 받게끔 하는 것이 ‘평생교육’의 목적이라 할 수 있겠다. 헌법에 보장된 만큼 ‘평생교육’은 만인을 위한 교육이다. 그리고 배운다는 행위의 목적은 더는 먹고 살기 위한 기능적 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기 위한 정신적 배움에 있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가톨릭관동대에서 주최한 시민을 대상으로 한 문학 강연에 참여하면서 ‘배움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다’라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젊었을 때 받는 교육이 사회에서 ‘생존’해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 이후의 ‘교육’은 생존을 위해 고달프게 투쟁해 쟁취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강의 주제이기도 했던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문학을 배운다고 해서 돈을 벌 수 없다. 문학 강연보다 부동산이나 주식투자 강연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적인 것과 무관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삶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방향성을 획득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강연을 듣고 계시던 많은 분들이 교과서에는 없었던 작가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 시기를 탄압했던 검열에 관한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셨다. 질문을 통해 그 시대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들 그리고 재미있었다는 인사들이 필자에게 ‘평생교육’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어느 시점, 어느 나이가 돼야만 비로소 그 자체, 혹은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이 있다. 취업을 위해서, 혹은 어떤 명확한 목적을 위해서 배워야만 하는 그런 것이 아닌, 배움 그 자체를 통해 사고(思考)의 깊이를 더하고 삶의 전체를 통찰하게끔 하는, 마치 오랜 시간 숙성된 한 잔의 와인과도 같은 교육이 바로 ‘평생교육’의 본질이 아닐까.

   
필자는 이번 강연을 준비하면서 ‘평생교육’에 대한 가치관이 조금 달라졌음을 고백한다. 기존의 대학생들에게 행했던 교육들이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선에서의 교육이었다면, ‘평생교육’은 그보다는 더 ‘교육’이라는 ‘본질’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어떠한 목적성이 없는, 순수한 학문 그 자체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궁극적으로 ‘평생교육’이 추구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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