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강성남의 그노시스

일기를 쓴 지 수십 년째다. 마음은 산인데, 생각은 구름이다. 기록은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을 굳히는 행위이자, 생각의 사슬을 시각화하는 도구다. 연말이 되면 10년 전 일기를 보며 세상 변화의 속도와 방향을 나의 관점에서 회고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는 눈 깜짝할 새. 이보다 더 빠른 새가 있으니 바로 ‘어느새’라는 농담이 있다. 물리적 시간이야 눈 한 번 감았다 뜨는 게 훨씬 더 짧겠지만 심리적 체감 속도는 ‘어느새’를 능가할 만한 게 없다는 뜻이다.


2022년 새해를 맞는가 싶더니 어느새 두 주 남기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는 데엔 과학적 근거가 있다.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가 줄기 때문이다.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같을지 몰라도 ‘누리는’ 시간은 공평하지 않은 데서 오는 격차가 시간의 흐름을 착각하게 만든다.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건과 현장에서의 변화가 시간이라는 주장이 있다. 기억을 늘어놓는 순서가 시간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 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중원 옮김, 쌤앤파커스, 2019). 시간이란 그림을 나열했을 때 순서에 붙인 라벨이다. 그림 자체가 없으면 순서도 없기에 시간의 의미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물체가 없으면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의 심리적 기원은 기억이다. 기억된 사건들에 순서를 정하는 과정에서 시간이란 주관적 개념이 생겼다. 다른 사람의 기억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기억은 객관적 사건이 된다. 사건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상에서도 위치가 정해져야 한다. 결국 물질적 객체의 개념 정의가 시공개념에 선행돼야 한다. 우주는 시공간과 물질로 구성돼 있고, 시공간과 물질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는 게 로벨리의 주장이다.

 

19세기 중반, 시간을 재현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움직임과 속도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윌리엄 터너의 이 그림 속 증기기관차는 직선 레일 위를 빠르게 질주한다. 이 선형적 속도감이야말로 근대사회를 압축하는 상징이며, 시간관일 것이다.

기억은 과거를 담아두는 수납장이 아니다.

기억이란 미래를 계획하고 장래의 행동을 준비하는 것이다.

기억은 미래 설계의 힘이자 기획의 주춧돌이다.

기억은 꺼낼 때마다 달라진다.

 

시간을 자원으로 여기는 현대인은 시간을 낭비하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약속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시간보다는 공간과 인간 자체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이란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고 말한다. 느림의 철학인 ‘야바쉬(Yavash, 천천히, 신중히)’를 중시하는 이유다.


기억은 과거를 담아두는 수납장이 아니다. 기억이란 미래를 계획하고 장래의 행동을 준비하는 것이다. 기억은 미래 설계의 힘이자 기획의 주춧돌이다. 기억은 꺼낼 때마다 달라진다. 애초 저장되지 않는 새로운 내용이 추가된다. 컴퓨터에 비유하면 ‘불러내기’가 아니고 ‘다시 쓰기’에 가깝다.


문제해결의 힘은 새로운 정보에서 얻는 게 아니다. 오래전부터 알던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때 생긴다. 오래전부터 알던 것을 불러내어 생각을 새롭게 마련할 때 체계를 갖추면 철학이 되고, 수식을 이루면 과학이 되고, 이야기를 이루면 예술이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해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 했다.


이쯤에서 나의 시간과 기억을 기록한 2022년기(年記) 중에서 책과 여행과 의사결정을 공개한다.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은 건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링컨하이웨이』. 이 책에선 인생 통찰이 곳곳에서 번득이고 오늘날 미국이 자리한 제도의 토대를 알리는 시그널이 울려 퍼진다.
‘시간은 하느님이 게으른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는 말도 공감하기에 충분하다. 모든 사람의 삶은 다이아몬드 형태를 띠고 있다는 말도 인상적이다. 다이아몬드 형태의 저 끝점에서의 삶의 협소함, 사람의 활동 영역은 세계 그 자체에서 자기 나라로, 이어 자기 카운티로, 자기 집으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방 한 칸으로 단계적으로 줄어들어서, 그들은 눈멀고, 숨이 가쁘고, 기억하지 못하는 육신으로 그 방에서 생을 마감할 운명을 맞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돈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다는 서술은 참 명제다. 1954년 6월부터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는 미국에서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를 만들 변혁의 씨앗들이 움트고 1960년대 말에 이르러 행정학 이론에서 ‘신행정론’을 탄생시키는 전조를 볼 수 있다. 올해의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인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아시아에서 뜬 해가 유럽으로 이동하는 걸 본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은 멀리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 목격함으로써 새로운 지정학적 각성을 했다. 아테네의 아레이오스 파고스(Areios Pagos) 언덕에서 신약성경 「사도행전」 17장 22절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설교를 상상했던 것도 잊기 어렵다.

내가 한 의사결정 중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매일 운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근육이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인내를 배운다. 달력에 운동한 날을 표시한 빨간색 원이 가득 차는 걸 보는 건 보람이다.


그동안 일기를 쓰지 못했다면 올해에 가장 인상 깊은 일을 기록하는 연기를 써보는 건 어떨까 싶다. 올해도 딱 두 주 남았다. 유대인 속담에, ‘망각은 포로 상태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라는 말이 있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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