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해남에서 어머니는 그를 42세에 낳았다. 고등학교를 마친 1986년, 그는 서울로 향했다. 사촌 형님이 운영하는 목공소가 그의 첫 직장이었다. 한 달의 반절은 야근이었다. 육체는 힘들었지만, 목재로 무언가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즐거웠다.
동료와 저녁을 먹던 어느 날, ‘컵 좀 줘’라고 말을 하려 했으나 목까지 올라온 컵이라는 단어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컵의 입 모양을 여러 차례 만들고 나서야 가까스로 ‘커 커 커 컵 좀 줘’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증상은 새로운 환경에서 어김없이 찾아왔다. 거래처 사무실을 밀고 들어가는 것은 고역이었다.
먼저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에서 한 박자 간격으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두 세배 빠르게 쿵쿵거리기 시작한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켜 보지만 담당자를 만나서 하는 첫 말의 시작은 이런 식이다. “아아, 안녕, 안녕하세요. 처, 처, 처처 천성실입니다. 다, 다, 다름이 아니라~~~”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1994년, 그는 방송대에 입학했다. 스터디 모임에도 가입을 했다. 주경야독하며, 동료들과 만나 공부하며 문화를 즐기는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한 사건을 두고 다양한 이론이 존재하며,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하거나 적용해야 한다는 이론은 정말 흥미로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2000년에 졸업장을 받았다. 무언가 시도했고, 그 결과물은 흐뭇했다.
‘말더듬’을 극복하려는 공부도 계속됐다. 한국언어문화원에 등록해 스피치 공부도 하면서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려 시도했다. 웅변대회에서 최고상인 국회의장상도 받아보았다. 하지만 투여한 시간 대비 진전은 남들보다 더뎠다. 2002년에 그는 소망이었던 사업을 시작했다. 어렵게 운영하던 회사에 2005년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고통이 됐고, 간판을 사라지게 하는 블랙홀로 작용했다. 그 후에도 여진은 계속됐다.
동문회 활동도 했다. 동문회는 그에게 제도를 만들거나, 새로운 제도를 적용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집착에 가까운) 역할을 했고, 더불어 관련 연결 고리도 이해하게 됐다. ‘한 걸음 한 걸음’은 그를 그의 개성적 삶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지인의 도움에 힘입어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더불어 더 깊게 공부하는 방법을 접했다. 그것은 결국 생명 관련 책을 탐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방송대에서의 학습 습관은 여기에서도 빛을 발했다. 특히 진화심리학이 주제인 책은 ‘유창성 장애’의 발현 이유와 더불어 그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어느 날, 얼음장 너머로 흐릿한 무언가가 보였다. ‘그렇구나! 말을 더듬고 새로운 환경에 가면 안절부절못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었구나.’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그의 ‘표현형’이었다. 그 모두가 그의 개성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는 그를 꼭 안아주었다.
‘내가 왜 말을 더듬지?’라는 화두를 가슴에 품으며 삶의 응어리로 느꼈던 한 청년이 그 이유를 찾아가는 데 방송대는 길라잡이
가 됐다.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인 6년의 방송대 재학 기간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 그의 표현형인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지금도 발현한다. 단상에 올라가면 가슴은 쿵쾅거리고, 손에 든 원고는 흔들린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즐기려 한다. 그것이 그 자신이며, ‘표현의 일부’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동을 닮은 삶에 여행 동반자로서의 선택은 탁월했다. 나의 모교, 방송대에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