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평생학습人 라이프

이윤희 학우(중어중문학과 4년)는 곧 출범하는 중어중문학과 제37대 학생회장을 맡게 됐다. “4년 동안 많은 혜택을 받았으니, 이제 학과를 위해 뭔가 하고 싶어서” 스터디 추천으로 학생회장의 짐을 지게 됐다.
이 학우는 남들처럼 결혼 후 어린 두 자녀를 키우면서 경제활동을 분주히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남편은 집에서 애들만 키우면서 주부로 살기를 원했다. 이 학우는 아직 젊은 나이에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있기엔 시간이 아까웠고, 그래서 하던 일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 그를 움직인 한 마디가 있었다.
그의 방송대 진학에는 남편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기초적인 중국어가 가능했던 그에게 남편은 계속 방송대 공부를 권유했다. 일반 대학 학비도 비싼 데다, 방송대에 관해 전혀 몰랐던 그이다 보니 주저할 수밖에 없었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에게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면 어떻겠냐는 남편의 말이 결정타가 됐다.
“남편이 조금 더 있으면 큰애도 초등학교 입학하게 되는데, 애들에게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애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제가 방송대에 입학하면 남편도 많이 도와주겠다고, 꼭 공부해보라고 권유한 거죠. 그때까지 저는 방송대는 전혀 몰랐어요. 남편은 방송대가 온라인으로 공부하는 대학이니, 자유롭게 학습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중국어 기초가 돼 있는데 그 좋은 지식을 잘 활용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에 공감하고 방송대 입학을 선택했어요.”

 


제가 방송대에 진학한 것은
취업보다는 ‘공부하는 엄마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기에,
좀더 당당한 엄마가 되는 게 중요해요.
어려워서 중간에 그만둘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손에서 책을 놓는 순간
다시 시작하는 게 더 힘들 것 같아
멈추지 않고 달렸어요.

 

1999년 탈북, 2007년 입국한 새터민
사실 이윤희 학우는 고향이 북한 청진으로, 한국에 온 지 16년 된 ‘새터민’이다. 1남1녀 중 장녀로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전문 시계공(북한에서는 우대받는 고급 기술직)인 아버지 덕에 유복하게 지냈지만, 공부와 인연이 없어서 전문대 진학을 바라던 부모님의 기대를 거스르고 군 입대를 선택해 5년간 군 생활을 했다. 이 시기 그의 집안뿐 아니라 북한사회가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제대 후 2년간 집에서 부모님과 지내다가 새로운 삶을 찾아 1999년 탈북을 결행, 중국에서 7년의 시간을 어렵게 살아야 했다.
“식당 설거지, 서빙, 가정부 등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정신적으로 참 힘들었던 시간이었어요. 겨우 버티다가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다고 판단해, 2007년 한국으로 힘든 노정을 거쳐 입국할 수 있었어요.”
청진에는 아직 그의 어머니와 남동생 가족이 살고 있다. 남동생은 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가족 이야기를 꺼낼 때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보였다.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회계 공부를 했고, 좀더 안정적인 생활에 접어들 수 있었다. 그즈음 연애결혼을 해 가정을 이뤘다.
중국 생활에서 터득한 생활 중국어라 자신이 있었지만, 막상 방송대에 입학해 보니 ‘교양 과목’ 공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기본적인 지식 배경이 약하기에 교양 과목은 따라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남편의 도움과 스터디 선배들의 조언을 따라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입학 후에 대학생활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어요. 어느 날 학교 오리엔테이션이 있다는 문자를 받고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행사에 참석하다 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주더군요.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 채 행사에 참석했는데, 강당에 많은 학우님들이 와 있었고, 스터디마다 판촉물 등을 나눠주면서 홍보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스터디가 뭔지 몰라 그 유인물들을 가져와 하나하나 남편에게 물어보면서 스터디에도 가입하고,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됐어요.”

스터디 도움으로 대학생활 적응
이 학우는 스터디에 가입하길 정말 잘했다고 말했다. 이 학우는 함께 공부하고 있는 스터디의 이름은 ‘강남서초’다. 36년째 스터디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김성태 동문 선배가 든든한 언덕이 됐다. 학습 정보와 지식, 학교생활 길잡이 역할까지 스터디는 이 학우의 방송대 나침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는 스터디가 감동을 준다고 힘줘 말했다.
“스터디에 실력이 우수한 선배님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어요. 그분들은 재능기부 형태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그렇게 해서 실력 있는 후배들이 성장하고, 또 그 후배들이 재능기부를 하고, 이렇게 대대로 이어지면서 금전적인 대가도 없이 도움을 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죠.”
북한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원격교육’ 시스템이지만, 특별한 어려움은 따로 겪지 않았다. 학교의 모든 일정을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또는 개별 문자로 알려줬고, 잘 모르는 것은 스터디 학우들이나 선배들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생활 중국어를 익혔지만, 손정애·김나래 교수의 도움으로 그의 중국어 공부도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출석수업이 원격으로 전환돼 많이 안타까웠어요. 얼마 안 되는 수업이라도 학교에 나가 교수님들과 오프라인에 만나 공부하던 때가 그리워요. 마흔이 넘어 공부하는 게 새삼스럽고, 학창시절의 추억도 쌓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 원격으로 전환되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 같아요. 출석수업이 많이 이뤄져 교수님들과 학우님들이 마주하는 기회가 늘었으면 좋겠어요.”
그 자신 ‘새터민’이다 보니 늘 말할 때 위축되는 부분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 선후배들 모두가 편견 없이 대해줘서 학교생활이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에게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을까? 아니, 질문을 조금 바꾸는 게 좋겠다. 그는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손에서 책 놓지 않으려고 노력
“나중에 저희 애들이 커서 ‘엄마 대학 나왔어?’라고 물어봤을 때, 고졸이라고 하면 애들이 크게 실망하지 않을까요? 제가 방송대에 진학한 것은 취업보다는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기에, 좀더 당당한 엄마가 되는 게 중요해요. 지금까지도 공부가 힘들고 어려운 건 사실이고요. 중간에 그만둘까 하고 생각할 때는 남편이 휴학해도 좋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손에서 책을 놓는 순간 다시 시작하는 게 더 힘들 것 같아 멈추지 않고 달렸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졸업을 앞두고 있네요.”
사실 이윤희 학우는 자신이 학생회장까지 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늘 머릿속에는 북한에서 왔다는 생각이 도사려 있다 보니, 보이지 않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막상 학생회장이 됐지만,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포부’를 들어 보니, 그건 기우이기도 싶었다. 코로나19로 인해 3년 동안 학생회 활동에 제약이 많았지만, 이제 포스트코로나로 접어들면서, 전국 지역대학 학생회장들과 소통하면서 학생회를 활성화하겠다는 야무진 구상을 내비쳤다.
“스터디 활성화에도 중점을 두고 활약할 계획이고요. 연간 행사들을 진행하면서 어려운 시기지만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닌 즐거움이 있는 중어중문학과로 좋은 추억들을 많이 만들어 37대 학생회를 기억에 남도록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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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nru***
    존경 합니다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시고 열정적인 삶을 개척하시는 이윤희 학우님 .
    2023-02-11 13:58:46
  • konu***
    대단하십니다. 칭찬합니다. 이윤희 학우님의 글을 보고 휴학하려는 제 마음을 접고 갑니다. 화이팅!하겠습니다.
    2023-02-07 09:00:40
  • gkdi***
    멋있어요. 응원합니다!!
    2023-01-28 17:16:52
  • ogle***
    포기하지 않고 달려나가시는 모습에 감동 먹었습니다. 응원합니다. 언제나 화이팅!입니다.
    2023-01-18 11:28:43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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