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대학을 떠나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아직 밀레니엄 버그도 경험하지 못한 컴퓨터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시류에 대한 호기심은 천성이라 서점으로 도서관으로 드나들었던 것 같다. 당시부터 나는 ‘끌리는 분야의 도서는 구매해서 본다’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나의 서고는 내 호기심이 지나온 이력과 제법 정확하게 일치하는 셈이다.

 

그런데 호기심과 독서에는 속도차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미처 보지 못한 책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순위에서 밀려 하염없이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젊은 날들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충족되지 못한 호기심이 풀죽어 기다리고 있었다. 흐르는 시간만큼 대기자는 계속 늘어났고 20년이 지난 것들은 이제 있어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됐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 그렇지만 털어버릴 수는 없었다. 나도 왜 그 책들에, 그 분야들에 끌렸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업에 익숙해지면 여분의 시간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세상은 더 스마트해졌고, 쏟아지는 소식들을 놓칠 수 없어 정신은 날로 분산됐다. 스크린에 비친 것은 피로하고 초라한 잔상의 나였고, 그 뒤로 보이는 것은 새로운 서열에 망연자실한 내 젊은 호기심들이었다. 이제 나와 내 젊은 날의 호기심 사이에는 정보의 망망대해가 가로놓여 있었다.

 

반전은 어디에나 있다. 게다가 그 반전은 유쾌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내가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나섰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모반의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 그 이전부터였을 것이다. 그 소외당한 책들이 모두 모여 작당을 했다면…. 팬데믹이 닥치고 세상이 온통 아우성일 때 정신을 차려보니 또 다른 나는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와 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를 연이어 다니고 있었다.

 

이것이 반전인 이유는 이 과정에서 내가 서고의 서열에서 밀려나 거의 체념 상태였던 그 도서들을 하나씩 들추어 보고 인용하고 영감을 받고 또 대화하고 마지막으로 예의를 갖추어 ‘참고문헌’이라는 목록에 올림으로써 그들을 살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전인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책들이 활용되고 족적을 남기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왜 그들을 궁금해했는지를 이제야 알게 됐고, 내 젊은 날의 호기심에 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빈 부분을 한 칸씩 채우고 있었다.

 

겨울방학을 맞아 문예창작콘텐츠학과에서는 조용한 세미나가 시작됐다. 한 교수님의 선창과 스무 명 남짓 학우들의 호응으로 시작된 ‘『토지』 완독 세미나’다. 스무 권을 두 달여 만에 읽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지만 망설임 없이 참가 신청을 했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나중에 찾기로 하고서…. 첫 세미나를 마치고 보니 주변이 드러났다. 참가자들은 연령, 학년, 지역, 심지어 학교라는 장벽까지 넘어서 있었다. 방송대의 특성을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준비한다면 이런 형태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 이유, 즉 내가 세미나에 참가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꼽아 보았다. 재충전을 위한 휴식, 다른 읽을거리들, 친구나 여행, 스마트한 세계 등등이 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원우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같은 이유로 이 세미나에 참가했음을 깨달았다.『토지』는 서고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아직 답하지 못한 커다란 질문의 공이었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생 어느 시점에서 반짝이는『토지』를 떠올렸고 그 비어있음을 채우기로 한 것이다. 이번 겨울 우리는 ‘방송대 속 방송대’에 다니며 자신이 보내온 질문에 답을 찾고 있다.


2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0
댓글쓰기
0/300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