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도전하는 방송대인

“솔직히 남에게 내 삶을 공개하기가 두려워요. 그렇게 자랑스러운 삶을 살아오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선배시민으로서 후배들에게 떳떳하게 지나온 행적을 공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하네요.” 1982년 초등교육과를 시작으로 방송대와 인연을 맺은 김상문 학우는 올 2월 생활과학부(가정복지상담학 전공)를 졸업하고 곧장 11번째 학과인 중어중문학과에 편입했다. 40년의 세월을 방송대와 함께한 김 학우. 여러 학과를 공부하는 ‘별난’ 방송대인이 그 말고도 많이 있겠지만, 그에게서는 뭔가 다른 냄새가 풍긴다. 그런 그를 3월 7일 광주 광산구청 근처에서 만났다.

 
“사람은 갈대처럼 중심이 있으면 흔들려도 다시 일어날 수 있어요. 중심이 없으면 못 일어나잖아. 내게는 그 중심이 방송대라고 생각해요”
그의 첫마디다. 방송대가 자기 삶의 중심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방송대의 학과들을 섭렵할 때마다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아, 내가 그냥 멍청 없이 돌아온 게 아니구나, 세계가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고 있구나, 이런 것이 있네, 하면서 머리가 자꾸만 넓어지는 게 느껴졌다.
전라남도 장학관을 거쳐 순천선혜학교(특수학교) 교장으로 2005년에 퇴임한 그는 함평에서 태어나 4세 때 해방을 맞았다. 어머니가 40줄에 낳아선지 영양이 부족해 각종 질병을 앓으면서 초·중등학교를 마쳤다. 고등학교는 광주사범학교를 나왔다. 역시 체질적인 질병으로 학교 성적은 하위를 면치 못했다. 1961년 초등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뒤 줄곧 교직에 몸담았다.
야간대학이라도 진학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처지다 보니, 교편을 잡으면서 대학 공부하기도 빠듯했다. 그런 그에게 1972년 희소식이 들려왔다. 방송대가 개교했다는 소식이었다. 하늘이 도왔다고 기뻐했지만, 첫 입학에 실패했다. 당시에는 성적순 선발이었다. 학교 성적이 나쁘다 보니 기회가 오지 않았다. 두 번째 기회는 10년 뒤인 1982년에 왔다. 성적이 아닌 ‘추천’ 방식으로 입학전형이 바뀐 탓에 이번에는 기필코 ‘입학’ 동아줄을 움켜쥘 수 있었다.

 

젊은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하루 3만보를 걷기 시작했다.
방송대를 젊음의 묘약,꿈의 동산,

배움의 놀이터로 생각하는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방송대생으로 남겠다고 한다.


포기했다가 재도전했던 일본학과의 추억
김 학우가 거쳐 온 학과는 초등교육과, (경제학과), 유아교육과, 일본학과, 관광학과, 문화교양학과, 교육학과, 청소년교육과, 국어국문학과, 생활과학부(가정복지학 전공), 사회복지학과 순이다. 1987년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섬에 근무하는 바람에 출석수업을 할 수 없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아교육과와 일본학과는 졸업하기까지 시간이 더 걸렸다. 유아교육과도 출석수업이라는 벽에 부딪혀 5년 만에 마쳤다.
문제는 일본학과였다. 1999년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일본학과에 같이 진학하자고 해서 3학년에 편입했다. 전공과목 4개 과목 모두 F학점을 받았다. 2학기에도 F학점 4개를 맞았다. “그때 왜 그랬냐면, 일본어학과가 아니라 일본학과인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었어요. 일본의 역사와 문화, 정치, 사회 등 종합적인 공부를 하는 곳임을 놓쳤던 거죠.”
다시 등록은 했지만 더는 공부할 의욕이 생기지 않아 그만두고 말았다. 이 무렵 정년퇴임을 한 김 학우는 1년 동안 열심히 놀다가 오기가 발동해 2006년 일본학과에 재편입해 1년 만에 졸업하고야 말았다. 그는 이 시기에 ‘기억에 남는 추억’ 하나를 건졌다. “과목 하나하나가 모두 어려웠어요. 그래도 이 악물고 공부했죠. 졸업논문제도가 있던 때라, 교재번역이라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여러 차례 서울에 올라가 담당 교수님께 지도를 받고 합격한 게 지금도 기억에 남네요.”

 

70 앞두고 ‘노년의 공부’ 깨쳐
김 학우의 방송대 공부에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은 2011년 문화교양학과 편입이었다. 70을 바라보던 시점이었다. 동아리 활동의 묘미를 발견한 것이다. “동아리 회원들이 나이가 많은 나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함께 여행도 하고 모여 놀기도 하면서 공부하던 시절이었어요. 공부보다는 노는 재미로 졸업했다고 할 수 있죠.(웃음) 여기서 노년의 공부가 ‘삶을 즐기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논다’라는 나만의 학습법으로 자리잡게 됐죠.”
광주·전남지역대학 문화교양학과 동기가 38명이었지만, 졸업은 8명밖에 하지 못했다. 모두가 김 학우가 졸업한다고 하니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나이 많은 그가 졸업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먼저 졸업한 그가 남아 있는 동기들을 격려했다. 5년 만에 남은 서른 명 모두가 졸업했다.
올해 중어중문학과에 편입한 데는 국어국문학과에서 함께 공부했던 인생 후배의 권유가 컸다. “편입한 뒤에 3~4학년 교과 구성을 보니 벌컥 겁이 나기도 하더군요. 좀 어렵지 않을까 걱정도 듭니다. 그렇지만 졸업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시험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즐겁게 공부하는 게 중요해요. 물론, 중국 전문가가 되려고 한다면, 나와 같은 자세로 공부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난청 앓고 있지만, 장애로 여기지 않아
사실 김 학우는 몇 가지 고질적인 질병을 안고 있다. 난청과 난시, 허리 통증 등이 그를 괴롭히고 있다. 온라인 강의를 따라가기도 어렵다. 자막을 읽고 교재를 반복해서 읽는 게 그의 공부법이다. 70세 이후 기억력도 급격히 쇠퇴했지만, 난청이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이 난청을 ‘장애물’로 여기지는 않는다.
“공부라는 게 굉장히 힘든 일이잖아요. 특히 노년의 공부는 자기와의 싸움이거든요. 난청이나 난시를 핑계로 배움을 멀리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런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학업을 지속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그는 발상의 전환을 제시했다. 
“나와 같은 노년이라면 방송대를 배움터가 아닌 ‘놀이터’로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나이 드신 분들은 방송대를 배움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입학을 꺼리는데, 놀이터라고 생각하면 멀리할 필요가 없죠. 장기판에서 종일 노는 노인들이나, 방송대에서 그렇게 노는 노인이나 뭐가 다를까요? 이왕 노는 거, 방송대에서 놀자는 거죠.(웃음)”
김 학우는 학점관리보다 졸업을 목표로 해왔다. 주변에 60대 학우들이 방송대에 도전했다가 포기하는 경우를 종종 봐왔던 그는 방송대 프로그램에 자신을 맞추면 공부하기가 한결 쉽다고 말하면서, 대부분 자신에게 학교를 맞추다 보니 적응을 잘 못하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그는 이렇게 조언했다.
“방송대가 어렵다고 하는 건 학점 때문일 거예요. 학기가 끝나고 F학점을 받으면, ‘나는 할 수 없다’라는 자포자기에 빠지게 되죠. 그러면 ‘이제 그만 편히 쉬자. 나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됩니다. 이걸 극복해야 해요. 학점보다 졸업에 눈을 맞추면 어떨까요? 나이 드신 분들이라면, 최고의 점수도 좋지만 조금씩 지식을 넓혀간다는 생각으로 조금 즐겁게 공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도 됩니다.”

김 학우는 요즘 동창 모임에 나가면 친구들로부터 “네가 우리 동창생들 가운데 가장 잘 살았다”라는 격려 아닌 격려를 듣고 있다고 으쓱해했다. 그간 획득한 졸업장을 보면서 그만 포기하려던 그날을 돌아보며 흐뭇한 감정에 젖기도 한다.
“초등교육과를 졸업하고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했더라면 지금쯤 20개 학과는 졸업했을 거라는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오죠. 요즘은 어느 모임에 나가서도 ‘방송대 10개 학과를 졸업한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해요. 그게 내가 살아온 흔적이고 보람이니까요. 방송대를 졸업한 학력이 나의 인격인 셈이죠.”

 

나와 같은 노년이라면 방송대를 배움터가 아닌

‘놀이터’로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나이 드신 분들은 방송대를 배움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입학을 꺼리는데,

놀이터라고 생각하면 멀리할 필요가 없죠.

방송대가 ‘젊음의 묘약’인 이유
40여 년 방송대와 함께 살아온 그에게 ‘중도포기’ 유혹을 이기는 방법을 물었다. 그는 골똘히 생각하다 두 가지 제안을 내놨다. 하나는 시험문제를 3단계로 출제해달라는 것. 1/3문제는 공부를 깊게 해야지만 풀 수 있게 해서 실력 있는 학생들을 더욱 단련시키고, 1/3은 아주 쉬운 문제로 두어 누구라도 F학점을 받지 않게 하자는 거다. 그렇다면 학업을 포기하는 이들이 줄어들지 않겠냐는 제안이다.
다른 하나는 동아리나 스터디 활동을 통해 ‘배움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자는 것이다. 그의 경험상 혼자 놀고 혼자 공부하는 학우들은 탈락하게 되면, 포기하고 재도전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동아리나 스터디 활동을 하게 되면, 제때는 아니어도 언젠가는 마음을 고쳐먹고 졸업을 하게 된다. 그 역시 문화교양학과의 남은 동기 서른 명을 5년에 걸쳐 졸업하도록 안내한 적이 있다.
김 학우는 방송대를 가리켜 ‘꿈의 동산’이라고 말한다. 30년 동안(전체 기간은 40년이지만)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방송대를 다닌 것은, 그가 배움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더불어 공부하는 재미와 흥미를 깨쳤기 때문이다.
“나는 40대에서 60대까지, 20~30년차를 두고 친구로 삼고 있어요. ‘삼밭에 쑥’이라는 말처럼, 50대를 친구로 삼고 있으니, 이런 데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방송대는 나에게 젊음의 묘약이죠. 방송대는 노년들의 꿈의 동산입니다. 죽는 날까지 재미있게 살다 간다면, 그것도 참 멋지겠죠?”
젊은 학우들을 벗으로 지내려면 건강관리가 우선이다. 김 학우는 작년부터는 하루 꼬박 3만보 가까이 걷고 있다. 20km 정도를 걷는 셈이다. 낮에도, 밤에도 걷는다. 자세히 보니, 그는 허리 뒤의 바지춤에 학과 교재를 한 권 꽂고 있었다. 허리를 받쳐주는 용도도 있지만, 걷다가 쉴 때마다 교재를 펼치고 잠깐씩 읽는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그만의 방송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젊은이들 앞에 허약한 노인을 누가 학우라고 대해 주겠어요? 건강해야 방송대 학생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요. 앞으로 사는 날까지 방송대생으로 남고 싶어요. 그래서 최고령 최다학과 졸업생 이라는 말을 듣는 게 바람이고요. 그 바람이 이뤄질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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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n***
    아름다운 모습 닮고싶습니다
    2023-04-05 22:07:14
  • dach***
    진정한 평생교육의 모범입니다. 절차탁마의 표본입니다.
    2023-03-26 12:20:25
  • gcss***
    저도 방송대에서 놀면서 공부하며 중년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문화교양학과, 교육학과, 가정관리학, 사회복지학, 관광학, 농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식품영양학과 다니고 있어요. 남편과 주말부부를 하게 되면서 주 중에 저만을 위한 시간을 공부하며 보냈죠. 낮에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방송대 공부를 하면서 해소했어요. 방송대 공부 덕분에 직업상담사 자격증과 사회복지사, 평생교육사 자격증도 취득했죠. 18년 동안 방송대와 함께하며 중년의 외로움 같은 것 생각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방송대 공부가 인생의 활력소입니다.
    2023-03-21 09:55:09
  • rain***
    우선은 경외감과 감사의 마음이 드는군요. 저는 나이도 훨씬 어리고 ,50대 후반, 이번에 과제물을 제출하면서 거의 마지막 날에야 끝냈어요. 대체 뭘 쓰라는 건지 몰라서 과에 똘똘한 젊은이에게 계속 물어서 썼습니다.게다가 컴퓨터도 몰라서 하나 하나 물어 봤어요. '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포기하는 것이 진짜 부끄러운 거다' 채찍질 하면서요. 저도 졸업하는 것에 목표를 맞추 렵니다. 성적에 맞춰서 절망하기 싫습니다. 그러다 보면 선배 님처럼 될 수 도 있겠지요.용기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3-03-21 07:05:59
  • euns***
    선배님 존경합니다 저도 작장 퇴직 후 에코로나 가 시작되어 할 일이 없어지고 요양보호사라는 공부를 하기위해 학원에 등록하여 강의를 듣는 중에 강사님의 늦은 나이 에도 직장다니며 방송대 3개 학과를 졸업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도 한번도전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시작 하였으나 혼자 하는 공부가 그리 만만하지는 않는군요 선배님의 11번째 도전에 다시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2023-03-19 18:57:48
  • *** 수정 | 삭제
    선배님의 지속적 배움의 열정과 후배시민의 희망이 되어 주심이 감동이고, 세상살이 흔들림에도 변함없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선배님의 배움 실천의 가치철학 존경하며 후배시민으로 감사드 립니다.. 본인은 '문화를 배우면 모두가 행복하다'를 실천으로 국가공무원 재직 중 1980년도 방송 대 가정학과와 컴퓨터과학과 공부, 발령근무로도 졸업 어려움. 인생2막으로 2014년부터 숭실 사이버대학교 거쳐 방송대에서 공부 중, 최근 새로 취업한 서울시의 파견 근무로 고민에?, 선배님의 글 읽고 문화 배움에 재도전 용기냅니다.
    2023-03-19 13:43:02
  • soon***
    선배님! 존경스럽습니다. 중어중문학과 신입생입니다. 타대학에서 전문학사 (사회복지학과)과정을 마치고 한문에 관심이 많아 중어 중문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고생이 아니라 보람으로, 낙,으로 도전 해볼려고 합니다. 자랑스런 선배님! fighting 입니다.
    2023-03-17 13:57:21
  • dogb***
    선배님, 존경합니다~ 64세에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했어요 2004년 유아교육과에 이어 2번째 도전입니다. 학기초라 적응하는데 많이 어려운데 선배님 글을 읽고나니 용기가 나네요. 감사합니다.
    2023-03-13 17:35:33
  • ogle***
    선배학우님의 글을 읽으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 뭉클함이 느껴집니다. 나태해진 마음을 다시 추스리며 공부해보겠습니다. 언제나 홧 팅!입니다. 감사합니다.
    2023-03-13 12:11:08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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