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마로니에

우리 동네도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어제 퇴근할 때만 해도 깜깜했던 길이 오늘 퇴근할 때는 환했다. 하루 만에 꽃이 만개할 수 있는 것일까? 어제 퇴근할 때의 나는 그 길을 지나면서 무엇을 본 것이었을까?


얼마 전부터 회사업무에서 그전까지는 쓰지 않던 ERP 프로그램을 쓰게 됐다. 내 업무와 연관이 있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세무 회계와 장부 기장은 세무사 사무실에 맡기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업무에 꼭 필요한 관리 장부는 나만의 엑셀 장표에 매달 지속적이고 규칙적으로 관리했기 때문에 괜찮았다.


하지만 일의 범위가 넓어지고 관리해야 할 데이터가 늘어나고, 엑셀 장표만으로 관리하기 버거워지자, 실수가 잦아지고, 반복되는 입력작업이 지치기도 하여 ERP 프로그램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ERP 프로그램은 한 회사의 금융, 영업물류, 재무회계, 세무신고까지 전반적인 업무 지식이 없이는 사용하기에 쉽지 않은 프로그램이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의 내 위치와 업무상, 배우기 쉽지 않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전임자가 금융업무로 시작했던 프로그램이어서 금융거래내역으로 파생돼 만들어진 2,500개의 거래처 코드 중에 필요 없는 것이 더 많았다. 그래서 쓸 수 있는 코드로 400여 개만 추려야 했다. 하지만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는 일이, 새로 데이터를 만드는 일 보다 더 품이 많이 들었다. 하루하루가 고난의 삽질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마치 봄이 되어 언 땅이 녹고 그 땅을 갈아엎고 새로운 씨앗을 심는 일과 같았다. 그렇게 코드 정리부터 시작했다. 내가 만든 데이터들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가공돼 어떤 결과물로 나타나는지, 숫자로 만들어진 데이터를 따라가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나 이런 일을 좋아하는구나.’ 힘들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재밌었다.


나는 지난 20여 년간 이 바닥 일과는 무관하게 살다 마흔이 훌쩍 넘어 다시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입력한 데이터들이 알맞은 계정과목의 이름을 달고 각각의 원장에 들어가 재무제표를 구성하는 이 세계가 너무나 놀랍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제 막 시작한 이 프로그램이 1년 후, 어떤 데이터 꽃을 피우고 어떤 알곡과 열매를 수확하게 될지 기대된다.


매일 야근하느라 늦게 퇴근하면서, 낮에 했던 실수와 막혔던 부분들에 대한 고민으로 계절 가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벚꽃으로 밤에도 환해진 꽃길을 걷게 되니 내 인생의 2막이 이렇게 열리는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세상은 내가 감지할 수 없을 속도로 변하고 있다. 가끔 그 속도에 어지럼증이 날 때도 있고, 2001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피터래빗 저격사건』,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 등을 발표했다. 아무리 AI가 발달하고 쳇GTP가 온갖 질문에 답을 내놓는다고 해도 내 인생의 즐거움은 나 이외에는 다른 누구도 찾아줄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는 공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조금씩, 녹고 있는 봄 밭의 한 귀퉁이부터 차근차근 쟁기질하는 것이리라.

 
나는 이 쟁기질이 ‘평생공부’라고 생각한다. 그 쟁기질로 인생의 새로운 막을 펼치면 되지 않을까. 그것은 내가 아니면 아무도 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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