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강성남의 그노시스

나의 하루 시간은 세 갈래로 흐른다. 운동하고, 지인들과 점심 식사와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시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와 대상을 분리하는 관념에 따라 시간이 이렇게 나뉘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인지 혁명’이 신석기 시대에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나와 자연을 분리하는 생각이 들면서 신석기 시대가 열리게 됐다는 거다. 알타미라 벽화가 그려질 무렵에 시간개념이 생겼을 거라는 게 인류학자들의 추정이다. 근거는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이 일어날 때 천문지식이 생겨났을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우주 속 모든 물체는 각각의 고유한 시간을 가짐으로 시간에는 지역적인 조건이 있다고 봐야 한다. 마치 일기예보 같은 상황이다.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날씨처럼 시간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어의 ‘시간(temps)’이라는 단어에는 ‘날씨’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시간은 각자의 처한 상황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중세 사람들의 시간관념도 덜 세밀했다. 점심, 아침, 저녁 정도 시간개념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정교하고 세밀한 시간개념이 필요하지 않았던 탓이다. 중세 시대에 시간을 지배한 사람은 교회의 신부였다. 권력자는 시간의 지배자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종탑의 종소리에 따라 마을 주민이 활동했기 때문이다. 엄격한 수도원 생활에서 수도사들이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도 시간에 맞춰 활동해야만 해서다.


산업혁명 이전 적어도 2천 년간 인간은 분할 수면에 익숙했다. 가령 옛사람들은 밤 9시쯤 잠자리에 들고 자정이 지나면 잠에서 깬 후 한 시간 정도 빈둥거리다가 다시 피곤해지면 잠에 빠져들었다. 1차 수면과 2차 수면 사이에 그들은 글을 쓰거나 먹고 마셨으며, 바느질과 기도를 했다. 그들의 인생은 시간에 속박된 현대인의 삶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표준시 이전에 사람들은 맘껏 잠을 잤다. 1차와 2차로 나눠서 잤고, 낮잠도 즐겼다. 유럽의 시에스타(siesta), ‘낮의 쪽잠’은 여전히 남아 있는 그런 시대의 유산이다. 발명왕 에디슨도, 정치인 처칠도,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낮잠을 즐겼다. 그러나 시간이 돈인 노동자들은 눈을 비비며 카페인을 섭취하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저마다의 시간이라는

우주적 규모의 도서관에 꽂힐 책을 쓰고 있다.
순간의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이유다.


삶이 바뀌기 시작한 건 1883년 그리니치 표준시가 나오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은 동기화된 시간 망에 연결됐고, 그때부터 타임라인에 맞춰 살아갔다.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의 ‘시간은 돈’이라는 말은 차츰 사람들의 정언명법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정신적 토대가 된 것이다. 시간조차 경제적 관념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에게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졌다’라고 말한다. 일을 목전에 두고 우리는 버릇처럼 말한다. “주어진 시간은 똑같잖아.” 이 말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불문하고 진리인 것처럼 여겨진다. ‘시간은 공평하다’라는 문장은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다’와 연결되며, 곧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공정하다’, 나아가 ‘네가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네가 게을렀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실제로도 많은 사람이 타인의 ‘게으름’을 비난하기 위해 ‘시간은 공평하다’라는 명제를 끌어 오기도 한다. 모두에게 흐르는 같은 시간에 대한 인식은 확고하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정말로 우리는 똑같은 시간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할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같을지 몰라도 우리가 ‘누리는’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는 게 정설이다. 내 의지의 통제밖에 있는 운, 신체, 재산, 명예 등이 우리가 마음껏 누릴 삶의 시간을 불평등하게 만드는 요인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의지의 통제 밖에 있는 것에 눈감은 채 자유와 공정만을 강조해 그 불평등을 제도화시켜버렸다는 지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능력주의가 엘리트의 계급세습에 이바지한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올리버 버크먼은 자신의 책 4,000주(이윤진 옮김, 21세기북스, 2022)에서 시간을 ‘네트워크 상품’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시간의 진정한 가치는 흥청망청 내 시간이 많을 때가 아니다. 그 시간을 친구나 가족, 만나고 싶은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을 때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게 시간활용에서 효율성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즉 시간을 붙잡아 1분 1초를 후회 없이 쓰는 것, 두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멀티플레이어’가 능력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생산성 중독자들은 할 일을 빼곡하게 적고 이를 하나씩 항목을 지울 때마다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자신에 주어진 시간을 완전히 통제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불가피한 제약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시간을 관리하려고 할수록, 삶이 더욱 불안하고 공허해지며 좌절감이 커지는 ‘한계의 역설’에 직면할 수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시간이라는 우주적 규모의 도서관에 꽂힐 책을 쓰고 있다. 순간의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이유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Claudio Magris)는 시간과 순간순간을 살아낼 줄 모른다는 것은 ‘완화된 형식의 자살’이라고 말한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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