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나의 전문 분야인,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최근 한 달 정도, 한국 드라마 「신성한, 이혼」에 빠져 있었습니다. 「비밀의 숲」에서 조승우가 연기하는 황시목에 빠져 ‘시목 앓이’를 하고 있던 나는 조승우가 오랜만에 시목만큼 멋진 역을 소화한 「신성한, 이혼」으로 갈증을 해소했습니다. 다 보고 난 지금, 또 다시 ‘신성한 앓이’에 빠져서 조승우가 절창하는 「테스형!」을 수시로 듣고 싶어지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결국 이 드라마는 조연이라도 초점을 맞춰보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어느 인물도 같은 가치를 가지고 존재합니다.
이 등가성이 작품을 깊이 있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보셨습니까?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줄거리를 말씀 드리겠습니다(스포 있음).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로 독일의 한 음악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신성한은 여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교수직을 버리고 한국에 돌아와 맹렬히 공부해 변호사가 됩니다. 전문 분야는 이혼 소송입니다. 그것은 여동생 주화의 죽음에 이혼 문제가 얽혀있었기 때문이죠. 주화의 남편에게는 사실 옛날부터 사귀던 여성 진영주가 있었고, 남편은 그녀가 하자는 대로 이혼합니다. 정식으로 아내의 자리를 차지한 영주는 주화가 낳은 아이의 양육권까지 빼앗습니다. 그 일로 실의에 빠진 주화는 불의의 사고로 죽습니다. 신성한은 이혼을 진행한 영주와 그 변호사에게 소송을 걸어 주화의 원통함을 풀어주고자 이혼 전문 변호사가 된 것입니다.
작품의 깊이를 만들어 준 ‘등가성’
이 드라마의 매력은 우선 다양한 이혼 케이스를 주인공 신성한이 진지하게 해결해 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역시 변호사 드라마의 수작이라 할 수 있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마찬가지로 문제가 일어나는 배경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섬세하게 그려나갑니다. 누군가를 ‘나쁜 놈’으로 결정하고, 나쁜 인간이니 문제를 일으킨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어떻게 폭력에 이르게 됐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인간성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저지른 폭력을 법과 윤리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가 지닌 또 하나의 아름다운 점은, 신성한의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대화로 시작되는, 남성 간의 우정, 여성 간의 우정을 그리는 방식일 것입니다. ‘남자들의 우정’이라고 하면 호모소셜한 인연으로 성차별의 토대가 되기 쉽지만, 이 드라마에서 남성 간의 우정은 좀더 순진하고 바보스럽게 열려 있으며 섬세하게 서로의 아픔을 나눠 갖는 관계로 기능합니다.
내 눈에는 공감을 베이스로 하는 여성 간의 우정을, 남성들 사이에서 실현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실험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남성 간의, 여성 간의, 나아가 어머니와 아들 간의 관계성을 자세하게 그림으로써 각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문맥을 부각합니다. 어떤 조연에도 그 사람 나름의 인생이 있고, 행동 하나하나에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조연은 결코 주역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눈에는 사소하게 보이더라도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기쁨과 괴로움이 있고, 거기에서 행복과 트러블이 생겨나는 법입니다.
결국 이 드라마는 조연이라도 초점을 맞춰보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어느 인물도 같은 가치를 가지고 존재합니다. 이 등가성이 작품을 깊이 있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초점’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초점이란 무엇일까요? 어릴 때, 렌즈로 햇빛을 모아 종이에 대면, 종이가 타는 실험을 했었지요. 그 햇빛이 모인 점이 초점입니다.
이 원리를 그림에 응용하면, 소실점(消失點)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똑바로 이어지는 한 줄기 길을 정면에서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합시다. 길 양쪽은 내내 평행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멀리 갈수록 좁아지고 결국에는 한 점으로 사라져 가죠. 양쪽 길섶이 한없이 멀어져 결국 사라지는 점이 소실점입니다.
소설(이야기)과 원근법
근대 회화는 이 소실점을 설정함으로써 현실적인 원근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른바 사실주의 화법으로 그려진 그림에는 반드시 어딘가에 소실점이 존재합니다. 똑바로 이어지는 도로처럼 소실점이 하나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두 개인 경우도, 세 개인 경우도 있습니다. 피카소 같은 사람은 이 소실점이 단순한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며 거부했고,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춰 그렸습니다. 모든 것을 등가적으로 표현했던 것이죠.
이것은 내 생각입니다만, 사실 이야기에도 소실점이 있습니다. 즉, 소실점에 근거한 원근법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성한, 이혼」에서는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어떤 등장 인물에게도 초점이 맞춰져 있어, 얼핏 소실점이 없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러나 딱 한 사람, 분명하지 않은 인물이 있습니다. 줄거리에서 소개한 신성한의 여동생 주화를 남편과 이혼하게 만든 진영주입니다.
분명하지 않다고는 해도 신성한의 적이기 때문에 주인공급의 존재감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신성한을 괴롭힙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은 영주의 행동 이유입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각의 인생을 살고 있어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데, 영주만은 인생이 그려지지 않고, 신성한에게 못된 짓을 하는 이유도 알기 어렵습니다. 물론 자신이 결혼할 뻔한 남자를 빼앗겼다는 원망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렇게까지 꼬이고 폭력적으로 변한 과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즉, 영주만은 ‘악인이니까 나쁜 짓을 한다’라는 설정입니다. 거기에 영주 개인의 인생 문맥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각각의 인생에 이유가 있으면 등장인물이 증가할수록 인과관계가 복잡해지고, 스토리를 제어하는 것은 어려워집니다. 각 인물이 자신의 이유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거나, 예상치 못한 비극이 일어나거나 해서 수습할 수 없게 됩니다. 실제로, 내가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때때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생명을 가지기 시작한 등장인물이나 작품 속에 생긴 흐름을 존중하면 작가는 정말 무력해지고 맙니다.
그런 혼란을 어떤 범위 안에서 수습하고 이야기를 컨트롤하고, 향해야 할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이 그 이야기의 소실점 인물입니다. 이 등장인물은 이른바 카드놀이의 조커 같은 것으로 그 나름의 문맥을 갖지 않기 때문에 작가에 의해 적당할 때 사건을 일으키고, 사정이 좋지 않으면 사라지는, 아주 편리한 존재입니다. 행동에도 일관성이 없습니다.
소실점이 존재하지 않는 드라마의 매력
이야기는 그러한 존재가 하나둘 있어야 성립합니다. 어떤 소설이나 드라마도 그것이 이야기인 한, 소실점을 짊어질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 인물은 백지처럼 뭐든 그려 넣을 수 있고, 지리멸렬하며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는 인물처럼 보여도 사실상 인간이 아니라 기능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소실점의 역할을 강요하고 희생시키며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야기의 근본적인 폭력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이야기라도, 이 폭력을 반드시 어딘가에서 발동시키고, 누군가를 소실점으로 삼습니다.
이 소실점이 존재하지 않는 기적적인 드라마를 나는 본 적이 있습니다. 「나의 해방일지」입니다. 손석구가 연기하는, 내내 수수께끼의 존재인 구씨가 극의 중반까지 소실점의 역할을 담당하지만, 본모습이 분명해짐으로써 소실점 역할을 포기합니다. 이 결과, 이 드라마에는 소실점이 없어집니다. 
사실 이 드라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각의 인물이 각자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려질 뿐으로, 구씨의 과거 이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살아 있음이 그려지고, 그렇지만 이야기 이상으로 재미있죠. 이 드라마를 다 보고 난 뒤, 나는 구씨 앓이를 했습니다.
□ 번역 김석희 경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