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둘리 아빠' 김수정 작가. 사진 제공=둘리나라
퀴즈 하나. 아기공룡 둘리는 몇 살일까? 놀라지 마시라. 올해로 꽉 채운 마흔 살이 됐다(주민등록증 참조). 1983년 4월 22일 빙하를 타고 서울 우이천에 떠내려왔던 아기공룡이 어느덧 불혹(不惑)의 나이에 접어든 것!
고길동의 쌍문동 집에 얹혀사는 둘리에게도 친구는 있다. 안하무인 외계인 도우너, 부끄럼쟁이 여자 타조 또치, 가수를 꿈꾸는 마이콜까지. 고길동의 악동 조카 희동이를 돌보는 것도 온전히 둘리의 몫이다. 둘리는 만화잡지 〈보물섬〉 연재를 시작으로 TV 시리즈, 극장판 애니메이션 등으로 그 영역을 확장했다. 아이스크림을 비롯해 팬시 상품까지 캐릭터 상품만 2천 종에 달하는 둘리는 국내 콘텐츠 산업을 태동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90년대 골목길은 ‘호이호이’, ‘짠!’, ‘깐따삐야~’ 등 만화에 나왔던 유행어들을 따라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고길동에게 구박받는 둘리를 응원했던 팬들은 어느덧 그의 나이만큼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세월 산 세대가 됐다. 이제는 둘리보다 고길동의 무거운 어깨와 짠한 뒷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비로소 어른이 된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라는 말이 더는 우스갯소리로 느껴지지 않는다.
둘리 탄생 40주년을 기념해 「아기 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얼음별 대모험)이 5월 24일 극장에서 개봉했다. 1996년 극장 개봉 당시 작품을 디지털로 변환해 색감에 화려함을, 음질에 풍성함을 더했다. 둘리의 40번째 생일을 맞아 김수정 작가를 만났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포스터. 사진 제공=영화사 만화경
‘아기공룡 둘리’의 유일한 극장판 「얼음별 대모험」이 5월 24일 개봉했습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거의 30년 전 일이네요. 장면 장면마다 그 당시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던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합니다. 디지털로 전환하다 보니까 색감이 더 밝아지고 화려해졌어요. 영화를 다시 보니 그때 그 열정을 다시 보는 것 같아요. 이번 재개봉을 계기로 다시 한번 그 열정을 되살리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기분입니다.
1996년 영화인데 대사들이 지금도 의미 있어요. “한강에 빙하가 나타났습니다. 무공해입니다”, “어린이를 때리는 어른은 큰 병 걸린대요”, “쓰레기를 줄이세요!”, “해적독재 타도하라” 같은 대사들요. 검열도 있던 시대였잖아요
아무래도 아동만화를 너무 사회비판적으로 그리는 걸 금기시했던 시절이죠.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희화화해서 작품에 녹일 것인가가 우리 작가들의 과제인 겁니다. 둘리도 상당 부분 ‘가위질’을 당했어요. 비교육적이라는 이유였죠. 단순하게 보면 어른과 아이의 대립구조잖아요. 당시 어린이 독자들이 ‘고길동을 이렇게 혼내 주세요!’라고 편지를 정말 많이 보냈습니다(웃음).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만화경
배경이 우주입니다. ‘가시고기’, ‘핵충’, ‘바요킹’ 같은 아이디어가 신선해요
「얼음별 대모험」은 둘리의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재미있는 부분만 골라서 만든 작품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만 시작 부분은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했죠. 우주로 가야 하는데, 보통 우리는 할리우드 판타지로 우주를 생각해요. 아이들은 그렇게 상상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릴까 고민했죠. 이런 식으로 지구를 개발하다가는 우주가 쓰레기 천지가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우주에는 뭐가 살지 모른다 해서 핵개발의 잔해를 먹고 사는 핵충 같은 생명체가 탄생한 거죠.
이렇게 만나면 꼭 여쭤보려고 했던 질문이 있습니다. 둘리가 무려 1억 년이나 찾아 헤맸던 엄마를 만났는데, 희동이가 몰래 둘리 다리에 밧줄을 묶어서 다시 헤어지는 에피소드죠. 아마 당시 만화 보던 친구들 다 울었을 거예요. 도대체 왜 그렇게…
작가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거기서 둘리를 두고 오면 둘리가 끝나잖아요. 둘리 없는 둘리 만화는 안 되니까요(웃음). 그래서 당시에 희동이가 정말 지탄을 많이 받았죠.
둘리가 40년이나 사랑받은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이야기의 바탕을 사람들 사는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편입니다. 나와 내 가족, 나아가서 이웃으로 폭을 넓혀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삶과 밀착된 이야기를 그리는 거 같아요. 둘리가 사랑받은 이유 중 하나가 친근한 캐릭터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이 역시 비슷한 맥락인듯 하고요.
다시 극장판을 만든다면 어떤 에피소드로 하실 건가요
「얼음별 대모험」의 후속작 격인데요. 둘리 일당이 얼음별에 가서 난장판을 만들었다면, 여기서는 반대로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합니다. 둘리와 친구들이 의도한 건 아닌데 외계인을 막아내면서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죠. 제목은 「방부제 소녀들의 지구대침공」(가제)입니다. 먼저 만화책부터 내는 걸 계획 중입니다.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만화경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슬램덩크」나 「스즈메의 문단속」은 각각 4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했어요
한편으로는 마음도 쓰리고 또 한편으로는 죄책감도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제작 여건이라는 것이 사실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작품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같은데 여건이나 상황이 안 따라주는 경우가 많거든요. 앞으로 여건도 좋아지고 애니메이터들이 더 노력한다면 좋은 작품이 나오겠죠.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일단 애니메이션 한 편 제작비가 만만치 않잖아요. 투자자들은 수지타산에 대해 회의적으로 봐서 투자를 꺼리는 거 같기도 하고요. 그러면 재투자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다음으로는 아무래도 가뭄에 콩 나듯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다 보니, 기술적인 노하우가 쌓이지 않는다는 점이 있겠죠.
그래도 감독님께서 생각하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경쟁력이 있을 거 같아요
작가들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아닐까요? 그 기반은 웹툰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웹툰에는 무한한 상상력이 발휘돼 있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함들요. 결국 아이디어라는 이야기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비교해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물론 기술적으로 앞서가지만,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에 있어서는 오히려 조금 답보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반면에 한국 웹툰이나 웹소설을 보면 이야기 구조가 굉장히 자유롭습니다. 이런 장점들이 애니메이션으로 넘어온다고 하면 정말 멋진 애니메이션이 탄생할 거 같아요. 그것이 앞으로 우리의 경쟁력이 될 것이고요.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만화경
창작 애니메이션은 드문 상황에서 둘리는 성공적인 사례겠죠. 창작 애니메이션을 하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건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얼마만큼 상상력 있고 독창적인가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캐릭터가 더해지죠. 단순히 예쁘거나 귀여운 게 아니라, 독창적인 캐릭터들이 어떻게 스토리텔링에 녹아 들어가는가가 관건이죠. 그것만 되면 반은 성공입니다.
최근 「검정고무신」 이우영 작가가 저작권 문제로 세상을 등지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자세히 알고 있는 사항은 아니라 조심스럽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은 금할 길이 없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아마 고 이우영 작가의 사례가 앞으로도 더 일어날 소지가 많다는 거죠. 이제는 1인 작업 시대가 아니고 모든 것이 협업 시대입니다. 한 작품의 지적소유권을 갖는 사람이 많아지는 겁니다. 저작자가 4~5명으로 많아지면, 서로 이해관계가 얽힐 여지가 있죠. 이것을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송사, 분쟁이 생길 수 있습니다.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 각자의 소유권, 지적재산권에 대한 명확한 룰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드리고 싶어요.
만화가로 평생을 사셨는데 혹시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놓친 건 후회스럽고 이룬 건 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이것이 아마 속물적 인간의 본성 아닐까요(웃음). 애니메이션을 한다고 출판 만화를 중단했던 부분이 지금 생각하면 많이 아쉽습니다. 병행했더라면 물론 힘들었겠지만, 그때 출판 만화를 계속해서 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거죠.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어른이 된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어요
지금 40대가 된 과거의 둘리 팬들이겠죠. 어릴 때는 절대적으로 둘리를 지지했고, 좋아했던 그래서 둘리를 구박하는 고길동을 적으로 생각했던 세대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다고 배신을 ‘때리면’ 안 되죠(웃음). 둘리도 고길동도 이야기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우리의 입장, 위치, 환경이 바뀌는 거죠. 「얼음별 대모험」으로 과거 둘리와 한 몸이었던 천진난만한 추억 속으로 돌아가 보세요. 그리고 어쩌다 보니 고길동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자신에게 다시 한번 둘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세요. 그러면 저도 힘을 내서 새로운 둘리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