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기 시카고대 물리학과 석좌교수가 지난 7월 5일 열린 제1회 세계한인과학기술인대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입자물리학 석학 김영기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내년에 세계적 권위를 가진 미국물리학회장에 취임한다. 한국인으로선 처음이다. 그런 그가 방송대 같은 원격대학에서도 기초과학을 공부할 수 있다고 답했다. 1962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수학을 좋아했고, 고려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충돌의 여왕’이란 수식어답게 그는 세계 최고의 입자물리연구소인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했고, 시카코대 최초의 여성 물리학과장을 맡기도 했다. 7월 초 한인과학자들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
김민선 기자 minsunkim@knou.ac.kr
기초과학은 ‘호기심’ 학문
누구나 다 공부할 수 있어
다만 연구는
교수·인프라 받쳐줘야
대학의 의지가 중요
“저는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그 법칙이 더 완벽할수록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봅니다. 진리는 아주 기초적인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러기 위해선 충돌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7년 뒤인 2030년은 금방입니다. 10~20년 후에 어떤 분야가 뜰지 모르는데 장기적으로 투자하고 지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김영기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지난 7월 5일 ‘제1회 세계한인과학기술인대회’에 주요 연사로 참석해,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이같이 말했다. ‘2030년 지속가능성의 전진을 위해 최첨단 과학기술과 혁신을 이루고자 한다면, 어떤 연구를 해야 하느냐’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번 행사의 주제가 ‘2030 지속가능성의 전진’이었다.
김 교수가 ‘충돌의 여왕’이란 별명을 가진 데는 그의 연구 분야가 입자물리학인 이유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만난 그는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 ‘통통’ 튀는 모습 그 자체였다. 그는 해외 과학기술인 300명, 국내 과학기술인 2천700명 등 3천여명의 과학기술인이 모인 대형 행사에서, 미국물리학회 차기회장으로서 무게를 잡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나흘간 열린 행사 중 토론 자리가 있을 때마다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하지만 정밀하게 자신의 의견을 끼워 넣었다. 1899년 미국물리학회 설립 이래,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자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회장으로 선출돼 내년 1월에 취임한다. 동양인이자 여성이 수장에 오르는 것은 이례적이다.
기초과학으로 충돌해보자
“제 연구 분야는 만물을 이루는 가장 작은 알갱이를 찾는 것입니다. 충돌하면 에너지가 방출되죠. 그리고 아주 고밀도, 고에너지 상태를 만들면 (이론상) 빅뱅에 가까운 우주 초기 상태를 재현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입자가속기로 재현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만물을 이루고 있는 입자도 아닌 것이 튀어나오는 모습이 관찰됐습니다. (무게가 1인) 수소 무게를 기준으로 하는 입자 표준이론이 만들어지면서 여러 현상을 계산할 수 있게 됐고, 현재 자연법칙으로 여겨지죠. 표준모델까지는 나왔지만 남겨진 문제는 어마어마합니다. 쿼크(원자 구성 요소 중 하나)가 왜 6종인지, 우주 반입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우주의 암흑물질은 대체 뭔지 등등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주 은하에서 행성들이 돌고 있는데, 그 속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로는 설명이 안 되니 무언가 있다고 봅니다.”
일반 독자들에겐 생소한 우주·입자 이야기일 수 있지만, 김 교수가 이미 아는 것 많은 과학계 석학들을 모아놓고 이런 기초적인 연구 진척 사항을 설명하는 이유는 협력 즉 충돌을 일으키기 위해서다. 기술은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발명된 도구들은 다시 기초과학 연구에 사용된다. 김 교수는 그의 연구 분야를 소개하면서 세계 속 한인 과학기술인 간 협력의 필요성을 설득해냈다.
한 발표자는 기초과학을 ‘낭만’이라고 표현하며, 참가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낭만적인 사고로 기발한 연구를 하며 기초과학을 탐구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자칫 생계 걱정 없이 한가롭게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김 교수는 낭만을 ‘호기심’으로 치환해 현실을 환기했다.
“낭만, 아주 좋은 단어네요. 인간은 호기심이 많습니다. 과학, 기술, 철학, 인문학, 예술을 보면 전부 우리 호기심 때문에 생겨났어요. 입자물리 하는 저도 가장 작은 입자는 뭐고, 우주는 뭐고 이렇게 생각하는 게 낭만일 수 있죠. 이건 종교, 철학적인 문제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은 학생들이 너무 힘든 상태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의대로 많이 진학하는 세태가 만들어졌죠. 경제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해 기초과학 연구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기초과학에 몰두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됐으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다양한 시도, 그로 인한 실패까지도 포용하는 방대한 투자가 뒷받침되고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미국의 국립연구소들은 예산의 일정 수준까지 연구소장의 지시 하에 ‘잘 알려진 분야가 아닌 새로운 분야’에 쓰도록 한다. 당연히 성공하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정부가 자유로운 연구비 사용을 용인한다. 일종의 낭만을 허락한다.
영국 OU, 암흑물질 연구에 동참
사실 기초과학이 낭만이든, 호기심이든, 기초과학 전공이 개설된 대학이라면 학생들은 입학해 이 학문을 탐구할 수 있다. 그런데 원격대학인 방송대에는 기초과학 전공은 개설돼 있지 않다. 방송대 학생들은 기초과학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걸까. 국내에 기초과학 전공이 개설된 원격대학은 전무하다. 유사한 전공에 입학해 기초과학 과목을 듣거나, MOOC에 게재된 일반 대학이 운영하는 기초과목의 온라인 강좌를 청취할 수 있는 정도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원격대학들도 기초과학 전공을 따로 개설한 케이스는 드물지만 원격대학의 시초인 영국 개방대학(The Open University)은 기초과학 전공을 두고 있다. 심지어 암흑 물질의 비밀을 풀기 위해 7월 초에 유럽우주국(ESA)이 쏘아 올린 우주망원경의 한 구조에는 영국 개방대학 연구진의 성과도 녹아있다. 이처럼 원격대학에서도 기초과학 공부가 가능할지 김 교수에게 물었다.
“기초과학 공부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연구가 아닌 기본적인 과학지식을 배우는 수준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연구는 다르죠. 특정 연구를 할 수 있는 집단은 따로 있습니다. 이는 인프라에 달린 것 같아요. 어떤 기술이나 설비가 수반되는 연구가 있고요, 이론 연구는 인프라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국제 협력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그 분야를 잘하는 교수는 꼭 있어야 합니다. 자기 전공 분야가 아니면 힘들 것입니다. 또한 대학도 설립 목적이 있습니다. 학교의 미션이 기초과학 연구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 목적에 따라 인재를 길러내기 때문입니다. 학교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방송대에도 기초과학의 필요성을 중시하는 교수들이 있다. 마침 손진곤 교수(컴퓨터과학과, 오른쪽 사진)가 세계한인과학기술인대회 셋째 날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수여하는 ‘제33회 과학기술 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손 교수는「데이터베이스에서 유사도 질의 처리 비용 감소 방법」연구 논문으로 상을 받았다. 손 교수는 수상소감으로 “기초과학의 힘은 대단합니다. 가령 미적분이 없었다면 스마트폰, TV, GPS 같은 건 없었을 것입니다”라며 “원격대학에서도 충분히 기초과학을 탐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