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무엇을 위하여 종(種)은 어울리나

‘비누 7개, 못 1개, 성냥 2천 개비’. 어떤 동물의 ‘성분’에 대한 설명이라고 합니다. 대체 어떤 동물일까요? 다름 아닌 ‘인간’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비누 7개를 만들기에
충분한 지방질을 지녔으며,
못 1개 분량의 철분도 함유하고 있다.
또한 2천개비의 성냥을 만들 만큼의
인도 함유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과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나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인 유대인들의 몸에서 쥐어짠 지방질로 비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이후 널리 퍼졌습니다. ‘인체 비누’는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와 알랭 레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밤과 안개」(1955)에서도 언급됩니다. ‘인체 비누’ 괴담은 결국 전시 유언비어로 밝혀졌으나, 생명체를 ‘물질’로 보는 것의 잔혹성을 느끼게 합니다.

 

한 가지 궁금해집니다. 생명체, 생물은 물질명사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품사인 ‘명사’는 그 대상이 셀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 가산명사와 불가산명사로 나뉘지요. ‘물질명사’는 ‘셀 수 없는 대상’을 가리키는 불가산명사에 속합니다. 하지만 그 ‘수(數)’를 셀 수 없는 것일 뿐, 그 양(量)을 잴 수는 있지요. 고기 600그램, 물 1.5리터처럼 객관적인 기준 또는 ‘한 줌의 재’처럼 다소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서요.

 

“몸은 화장터에서 반 줌의 재로 분해되고, 영호와 나는 물가에 서서 어머니가 뿌려넣는 재를 보며 울었다. 난장이 아버지가 무기물로 없어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생명을 갖는 순간부터 고생을 했다. 아버지의 몸이 작았다고 생명의 양까지 작았을 리는 없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 주인공 영수의 아버지 김불이가 죽어 화장되는 장면입니다. 성인이 돼서도 키가 117cm에 불과했던 김불이 씨는 죽어서 재가 돼도 ‘한 줌’이 아닌 ‘반 줌’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생명의 양’도 그만큼 적었을까요? 사실 이 질문은 우문입니다. 생명은 ‘양(數)’이 아닌 ‘수(數)’로 세는 것이니까요. 한 줌, 반 줌처럼 ‘양(數)’으로 세는 것은, 그의 몸이 생명을 잃은 후 ‘재’, 물질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코끼리처럼 크든, 벼룩처럼 작든 생물은 대개 ‘수(數)’로 셉니다. 그리고 그 세는 단위로는 인간일 경우 ‘명(命)’을, 인간 외 동물일 경우 ‘마리’를 주로 쓰지요. 프랑스 여성의 이름 ‘마리(Marie)’를 닮은, 이 ‘마리’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아마도 ‘머리(頭)’로 보입니다. 조선 세종 31년(1449년)에 나온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보면, ‘머리’가 ‘마리’로 표기돼 있습니다. 현재도 가축을 세는 단위로 머리, 두(頭)를 쓰고요. 머리는 개별성, 방향성, 생각, 생명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생명체는 머리를 잃을 때 그 모두를 잃게 되는 것이지요.

 

살아있을 때 ‘한 명’이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한 줌’ 또는 ‘반 줌’의 재가 되듯, 살아있을 때 ‘한 마리’였던 동물은 머리를 잃고 죽은 후 ‘몇 근’의 고기나 ‘몇 장’의 가죽이 됩니다. 즉, 물질명사가 되는 것이지요. 살아있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얼마나 많은 재가 될까’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인간이 고기나 가죽 등 물질을 취할 목적으로만 사육하는 동물들은 어떨까요? 어쩌면 인간에게 그들은 살아있을 때도 물질명사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요. 땅 위의 동물들 중 특히 돼지가 그렇습니다. ‘돼지’는 그 자체로 ‘(돼지)고기’와 동의어로 인식되곤 합니다. 국내영화 중에서는 드물게 ‘반려 돼지’가 등장하는 영화 「옥자」(2017)의 봉준호 감독도 “돼지 하면 삼겹살부터 떠올리는 인식이 안타까워 주인공을 돼지로 정했다”라고 밝힌 바 있지요.

 

그런데 그런 측면에서 돼지보다 비참한 동물들이 있습니다. 아예 살아있을 때부터 인간에게 ‘식품’으로 취급받는 이들, 물질명사인 ‘고기(肉)’로 불리는 이들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가시고기’처럼 다소 개성적인 명칭으로 구분되기도 하지요. 맞습니다. 통틀어 ‘고기’, ‘물고기’라고 불리는 동물들입니다. 이들은 살아있을 때부터 ‘고기’로 불리다가, 생명을 잃고 ‘식품’이 되면 ‘생선(生鮮)’이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이 ‘생선’에 삶을 뜻하는 ‘생(生)’자가 들어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다른 나라 언어는 다를까요? 영어(Fish), 프랑스어(Poisson) 등에서도 살아있는 그들과, 죽어서 식탁 위에 놓인 그들을 구분하고 있지는 않네요.

 

이에 ‘동물해방물결’이라는 단체에서는 ‘물고기’라는 말의 ‘기괴함’을 지적하며 ‘물에 사는 존재’라는 뜻의 ‘물살이’라는 호칭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물살이 식용 금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먹을 때 먹더라도, 살아있는 동안은 ‘(물)고기’가 아닌 살아있는 존재에 적합한 호칭으로 불러야 마땅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덧붙이면 ‘물살이’보다는 ‘물에 사는 동물’이라는 뜻의 ‘물동물’이 낫다고 봅니다. 왜냐고요? ‘살이’라는 말의 어감이 썩 좋지 않아서요. ‘시집살이’, ‘타향살이’, ‘더부살이’, ‘머슴살이’, ‘첩살이’ 등에서 그 쓰임새를 보면 서럽고 불편한 느낌이 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비참한 ‘물동물’ 중에서도 특히 처참한 동물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몸이 작다고 ‘생명의 양’이 적을 수 없거늘, 작다는 이유만으로 살아서도 죽어서도 ‘한 마리’ 취급도 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흔히 우리가 접하는 예로 ‘멸치’가 있지요. ‘멸치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다’, ‘멸치 한 마리를 잡았다’, ‘멸치 한 마리 주세요’. 혹시 단 한 번이라도, 이런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저는 없습니다. 멸치 한 바구니, 멸치 몇 그램, 멸치 한 접시… 이렇게, 멸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물질명사로 취급됩니다. 카피라이터 정철은 이런 멸치의 비애를 다음과 같이 시로 표현했습니다.

 

너희가 멸치를 아느냐
너희가 멸치의 아픔을 아느냐
죽는 순간까지, 아니 죽어서도 멸치는 이 한마디를 듣지 못한다
“멸치 한 마리 주세요”
무리 속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닐 수도 있는데
일생을 무리에 섞여 뒹구는,
끝내 ‘나’로 대접받지 못하는 그에게
위로는커녕 조롱이라니
멸치다
멸시가 아니다..

 

김진주 동물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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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yp***
    어떤 분은 '물살이', '물동물'도 좋지만 '물결이'는 어떻냐고 제안하시네요.
    2023-06-26 13:00:19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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