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식물유전육종학자 한상기의 90년

100세 시대라고 한다. 현업에서 은퇴해 손주를 볼 나이에 접어든 이들은 ‘신중년’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 미디어에서는 100세가 넘은 노 철학자가 평생 체득한 인생의 지혜를 전하는 모습도 보인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먹거리, 의료기술의 발달로 수명 연장이라는 인류의 꿈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그렇게 개인은 인생 이모작, 삼모작을 계획, 실천하기도 하고, 공부, 독서, 운동 등 새로운 취미에 심취하기도 한다. 100명의 사람에게 100개의 이야기가 생겨나는 이유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지혜의 정수
여기에 90년 평생을 과학자로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아프리카 농민의 왕’, ‘한국인 슈바이처’로 불리며 아프리카 사람들의 기근을 해결하고 한국인 최초로 추장이 된 식물유전육종학자 한상기 박사(1933~ )의 이야기다. 식물육종학이라면 일반인에게는 낯설 수 있다. 한 박사는 ‘종자(씨앗) 개량 전문가’라고 쉽게 풀어 설명한다. 주식작물의 병충해로 아사자가 속출하던 1970년대 아프리카로 날아가 카사바, 얌 등의 종자를 개량해 식량난 해결에 큰 공을 세워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한 박사가 학자의 꿈을 꿨던 어린 시절, 보장된 삶을 버리고 떠났던 아프리카에서 23년, 미국에서 15년 생활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그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며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작물보다 귀한 유산이 어디 있겠는가』(지식의날개, 2023.06)를 냈다. 평생 습관이었던 메모의 산물로 남은 노트 200여 권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만난 지혜의 정수를 오롯이 사유한 흔적을 담았다.

 

책을 펼치면 먼저 80장이 넘는 사진들에서 한상기 박사 인생 궤적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한 장 한장 친절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설명이 인상적이다. 책은 그가 걸어온 인생길을 의미하듯 △도전의 길 △선택의 길 △가난의 길 △보상의 길 △지혜의 길 △사색의 길 △은퇴의 길 로 구분돼 있다.

 

“사람도 심고 가꾸고 거두는 때가 있다”
한 박사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병원도 없는 청양 칠갑산 남쪽 두메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국민학교(청남 청소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할 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서울대 농학과에 입학하던 해는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53년이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에게 학자의 꿈을 심어주고 도전을 멈추지 않게 해줬던 원동력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부모님의 가르침이었다. ‘농사의 때를 놓치면 폐농하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심고 가꾸고 거두는 때가 있다’는 가르침은 그의 인생의 채찍이 돼 향학열을 꺼트리지 않게 했다.

 

우장춘 박사처럼 위대한 식물육종학자가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은 우리 이웃의 가난을 벗어던지게 하겠다는 목적의식과 만나 더욱 단단해졌다. 

 

한국 최초 잡초학 석사. 그의 대학원 지도교수인 지영린 박사는 잡초학이라는 생소한 학문을 권했지만, 선생님의 뜻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우직하게 공부했다. 그 모습을 본 지 교수는 그를 미시간주립대로 보냈고, 거기서 식물육종학을 공부해 귀국 후 강사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 박사는 사람이 사람을 만든다고 강조한다. 철저히 준비하고 있으면 하늘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 박사과정에서 만난 그래피우스 미시간주립대 교수는 매달 50불씩 생활비를 주기도 했다. 특히 서울대 농대 시절의 류달영 은사는 그의 인생 항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교육열이 높은 부모님은 물론 이후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그에겐 모두 인생의 안내자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학문에 집중했지만, 그 길에 자신을 도와준 이들 덕분에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케임브리지대 대신 나이지리아로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로 임용된 후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나이지리아 국제열대농학연구소의 러브콜을 받는다. 먼저 나이지리아 연구소로 가서 상황을 본 후 여의치 않으면, 영국으로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무려 5일이 지나 나이지리아 연구소에 도착한 그는 구근작물 연구원 채용 제의를 흔쾌히 수락한다.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직과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소의 제안을 뒤로한 잊지 못할 선택의 순간이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내전, 자연재해, 전염병으로 매년 50만 명이 굶어 죽는 슬픈 땅 아프리카로 간다. 어릴 때부터 배워왔듯이 명예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들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이었다”라고 한 박사는 선택의 순간을 회고한다.

 

이후 그는 국제열대농학연구소에서 연구를 진행하며 병충해로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주식작물 카사바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덩이뿌리가 사방으로 처져 고구마와 비슷한 열대작물 카사바의 원산지인 브라질로 날아가 재래종 카사바 종자를 구해왔고, 새로운 품종을 만들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다. 그가 개발한 ‘내병다수성 카사바’로 나이지리아는 기근에서 벗어나게 된다. 1976년 나이지리아 국영지 <데일리 타임즈> 1면에 한 박사의 카사바 가공식품이 더 나오게 됐다는 기사가 실린다.

 

보통은 여기서 끝이다. 그렇지만 한 박사는 연구 성과가 연구소 안에 갇혀있지 않도록 트럭에 카사바를 싣고 다니며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농가에 보급했다. 얌 종자를 구하기 위해 왕복 4천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카메룬을 다녀온 여행기 부분에서는 입이 떡 벌어진다.

한 박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농학도 양성에도 매진했다. 캐나다 원조청의 도움으로 시작한 교육 사업은 이후 여러 나라로 퍼져 지원금 규모도 커졌다. 한 박사는 50여 명의 석·박사를 지도했고, 제자들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농업계에서 큰 인물로 성장한다. 인류를 먹여 살린 작물의 고향, 아프리카가 자립으로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일이었다. 명예추장이 아닌 실질적인 추장으로 추대된 사건은, 늘 아프리카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연구하고 실천해온 것에 대한 방증이 아닐까.

 

최근 노학자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건 기후위기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경고할 것이라고 말하며, 그는 후학들에게 단호한 부탁도 잊지 않았다. 인간이 만든 공해가 작물을 위협한다고, 기후위기로 다음 세대에게 식탁의 위기를 넘겨줘서는 안 된다고, 자신이 미처 못다 한 작물·종자·농학 연구를 이어 받아 다음 세대의 위기를 막아 달라고.

 

『작물보다 귀한 유산이 어디 있겠는가』를 읽으면, 절대 자신이 잘 나서가 아니라 주변의 도움으로 이룬 성취라고 강조한다는 점, 기회라는 이름의 운명이 다가올 때 잡을 수 있도록 오랜 기간 묵묵히 준비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감사함으로 세상을 대한다는 점이 느껴진다.

 

한 박사는 지금도 SNS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한 시작으로 이 책을 펴냈다고도 말한다. 그가 도전하며 걸었던 여정이 누군가에게는 지름길이 되고, 깨달음의 디딤돌이 되길 소망한다. 한상기라는 한 거인의 평생을 한 권으로 엿보고 나면, 우리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저절로 고민하게 하는 미덕을 가진 책.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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