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오전 10시, 8월 31일자로 정년퇴임을 맞는 박선희 교수(유아교육과)의 연구실을 찾았다. 연구실은 어수선함 없이 그대로 정돈된 상태였다. 그의 연구실 벽면에 걸린 두 개의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박 교수가 유학시절부터 품고 지냈던 ‘Children Learn What They Live’라는 11가지 경구(警句)를 담은, 가정상담학자였던 도로시 로 놀테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whispered words between children and trees’라는 그림 액자다. 박 교수가 이탈리아 레지오 에밀리아 유아학교를 방문했을 때 가슴에 와 닿아 계속 연구실에 걸어뒀던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이다. 유아교육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정년퇴임 소회를 들었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아쉬움도 있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더 많이 드는 것을 보면 방송대 유아교육과가 교원양성기관의 유일한 학과라는 데서 오는 짐이 부담은 된 것 같아요. 그렇지만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소신껏 연구하고 교육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앞으로 교원양성기관의
역량진단 방식도 달라질 수 있고,
유보통합과 같은 유아교육·보육계의
큰 외부변화가 예상됩니다.
학교에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좀더 많은 관심과 대외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유학 시절 육아, 일, 공부 병행
박 교수는 1980년 경북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2년 남짓 고교 교사로 근무했다. 뜻한 바가 있어 경제적 여건이 빠듯한 상황에서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선택한 곳은 뉴욕주립대(SUNY at Buffalo)였고, 전공은 자연과학 쪽이 아닌 유아교육이었다. 1992년 2월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93년 5월부터 방송대 유아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대학 때부터 평생 뭔가 학문의 길로 가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 길이 수학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어요. 하고 싶은 길을 바꿨는데, 운도 따라 준 것 같아요. 대학원 과정을 밟으며 뉴욕주립대 부속 유아교육기관에서 교사로 일을 하게 되면서 4년 6개월 동안 학비 전액 면제와 월급을 받게 된 게 큰 힘이 됐죠. 도움의 손길이 없는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자녀 육아와 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지만 그때의 현장 경력은 방송대에 임용되는 데도 큰 이점이 됐다고 생각해요.”
방송대 학생들에게 흐르는 강인한 열정이 박 교수에게서도 보였다. 유학시절 그 역시 육아와, 일, 공부를 병행하는 삶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학부에서 수학을 공부한 게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학에서 배운 논리적 사고는 유아교육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오늘날까지 많은 도움이 됐다고 귀띔한다.
여느 교수들처럼 박 교수도 학과, 학교, 학회 일로 분주했다. 특히 2015년 교원양성기관 역량진단(3주기 재평가)에서 자체평가실무위원장으로 총괄해 유아교육과 정원 유지의 결과를 이끌기도 했다. 유아교육과 학과장, 대학원 유아교육학과 학과장, 평생교육원장, 경기지역대학장 등 학내 보직은 물론 미국 터프츠대, 웹스터대, 버클리대 등지에서 객원교수로, 한국어린이교육문화비평학회 회장,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 회장 등 학회 일로 바쁜 시간을 쪼개 살았다. 이런 가운데 그는 베스트 티처, 연구·교육영역 우수교수, 교육영역 최우수 교수로 선정되는가 하면, 학회에서는 우수논문상도 자주 수상했다.
유아교육학자로 유아교육계에 ‘징검다리’ 하나를 놓고 떠난다고 말하는 박 교수가 이룩한 성과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유아학교로 인정받은 이탈리아 레지오 에밀리아 유아학교를 여러 차례 방문해 ‘유아학교의 환경과 교육과정 및 교육방법’을 살펴 국내에 접목한 대목이 손꼽힌다. 또 미국 터프츠대와 세인트루이스의 레지오협력유치원에서 공동연구를 수행한 뒤 방송대 교재에 담아내고,『유아, 공간, 관계: 유아를 위한 포괄적 교육환경 프로젝트』(2002),『기록작업을 통한 학습의 가시화: 개인과 집단 학습자로서의 어린이』(2005) 번역서를 내놓은 것도 놓칠 수 없는 성과다. 올 11월에는 그간 공들여온『유아의 마음이론과 그림책 세계』(방송대출판문화원 에피스테메)를 내놓을 예정이다.
이론과 실제, 현장 잇기 위해 노력
“유아교육의 학문적 특성은 이론과 실제가 조화를 이루고 교원양성을 위한 교육 내용도 통합성과 현장 연계를 요구하므로 유치원과 어린이집 현장 유아들과 교사를 대상으로 실천적 연구뿐만 아니라 교사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레지오 에밀리아 방문과 레지오협력유치원 공동연구는 모두 이론과 현장을 잇기 위한 노력이었죠.”
이렇듯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역량 있는 교원양성’을 중요한 책무로 생각하는 박 교수는 대학원 유아교육학과에서 이론과 실제, 현장을 잇는 교육과정과 교수법을 꾸준히 강의해왔다. 그런 그의 강의를 들은 대학원 원우들은 2019년 개정 누리과정이 발표됐을 때, ‘어, 이건 우리가 이미 공부해온 내용들인데?’라며 생소하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방송대 대학원 유아교육학과에 진학하는 원생들 가운데는 유아교육·보육 현장에 종사하는 유치원·어린이집 교사, 원장 등이 많기로 소문나 있다. 대학원 학과장을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박 교수는 이들 후학에게 ‘강의 제작이나 학생 실습기관으로서의 현장 활용 협조’를 당부했다.
“과거에는 현장 촬영도 협조가 원활해 TV 강의나 멀티미디어 강의를 통해학생들에게도 좋은 현장 사례들을 제공할 수 있었는데,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면서 더욱 폐쇄적인 일면이 있어 아쉬워요. 또한 방송대 부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 없다 보니 좋은 실습기관을 찾아서 실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관을 운영하는 대학원생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합니다.”
박 교수에게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있다. 부임하고 10여년쯤 돼 학생들과 해외로 졸업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70대 고령의 할머니 졸업생이 밤새 자신이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건네다가 기도 시간이 됐다면서 ‘학교가 있어야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며 방송대와 박 교수를 위해 기도를 했다. 박 교수는 지금도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우들의 열정과 사랑으로 방송대가 발전하고 있다고 가슴 가득 느꼈던 것이다.
“성취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길…”
박 교수는 떠나지만,
방송대에는 또 다른 신·편입생이 꿈을 이루기 위해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한다. ‘교사 양성’에 주력했던 그는 방송대 학우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방송대 학생들은 자신의 길을 어느 정도 모색한 후에 찾은 곳이 방송대일 것입니다. 저마다 방송대를 찾는 목적은 다르겠지만, 공부를 위한 공부보다 작은 목표라도 성취 가능한 뚜렷한 목표를 정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30년간 짊어졌던 유아교육의 짐을 내려놓고 이제는 홀가분하게 더 자주 음악을 듣고,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박선희 교수. 그는 새로운 50년을 시작한 학교에도 이런 조언을 빠뜨리지 않았다.
“방송대 조직개편안에서 교원양성지원센터 조직을 본 적이 있어요. 학과에서 몇 년 전부터 필요성을 강조하고 조직구성안을 보내 학교 당국에 요청해왔는데 이제 실현되는 것 같습니다. 유아교육과가 유일한 ‘교원양성’ 학과다 보니 관련 업무가 많아 부담이 매우 컸습니다. 교원양성 업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조직체가 필요한데, 이 조직이 원활하게 운영되도록 학교의 관심과 지원 당부합니다. 또 앞으로 교원양성기관의 역량진단 방식도 달라질 수 있고, 유보통합과 같은 유아교육·보육계의 큰 외부변화가 예상됩니다. 학교에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좀더 많은 관심과 대외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