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2주 동안 화해·평화·일치
란 훌륭한 말만 하시는데 나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한국의 분단은 한국 책임이 아닙니다. 미국·소련·중국·영국·일본을 포함한 각국은 한반도 분단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와 의논도 없이 동의도 없이, 그리고 우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무슨 까닭으로 남의 나라에 와서 함부로 갈라놓습니까? 이 모임에서는 세계의 평화를 이야기 합니다만, 이렇게 무책임하게 분단 상황을 만들어 놓고 어떻게 일치·연합·인류의 인권·평화존중을 요구합니까? 나에겐 여러분의 말이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가해자는 먼저 우리의 분단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여러분, 말로만 평화를 논하지 마십시오. 한반도 분단의 당사자들은 그 책임을 통감하고 본국에 돌아가서 깊이 반성하는 기회를 갖기 바랍니다. 가족과 함께 우리의 통일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벤쿠버 세계기독교협의회 WCC 총회연설, 1983, 『한국의 어머니 이태영』(허도산 지음, 자유지성사, 1999) 중에서
그의 롤 모델은 가정과 직업을 병행하면서
성공적 삶을 살아낸 마담 퀴리였다.
최초의 여성변호사에게 몰려들어오는 불행한 ‘노라’들을 만나면서
이태영은 자신의 임무를 깨달았다.
그는 딸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 충실한 인생의 열매를 맺었다.
그렇게 맺은 열매와 씨앗은 한국 여성의 희망이 됐다.
제2세대의 인형
1935년 11월 29일 오후 7시에 시작된 전조선 여자전문학교 웅변대회에는 7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조선중앙일보사가 주최한 이 대회는 서울 YMCA 강당에서 열렸다. 다섯 번째로 연단에 오른 이화여전 학생이 웅변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청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야, 집어치워. 저 이혼감 봐라.” “당장 끌어내!” 삿대질과 폭언이 난무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발을 굴렀다. 하지만 이 학생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여학생의 이름은 이태영, 나이는 22세였다. 웅변 제목은 「제2세대의 인형」이었는데, 1등을 차지한 이 웅변의 내용은 이렇다.
“제1의 인형이 입센의 ‘노라’라면 제2의 인형은 한국 여성이다. 지금까지 한국 여성은 남편의 노예이고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 여성들은 ‘노라’처럼 참고 복종하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내이며 어머니이기 이전에 인간이어야 하고 남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한국 여성 각자가 찾아야 한다. ‘노라’처럼 집을 뛰쳐나가라는 말이 아니다. … 한국의 ‘노라’는 제 집과 자녀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대처하지 않을 것이며, 차라리 아내를 무시한 남편 헬마를 밀어내어 집에서 내쫓아 버릴 것이다.”
이 당돌하고 씩씩한 여학생은 가정생활과 공적 활동 모두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그는 훗날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됐고, 라몬 막사이사이상(1975), 유네스코의 인권교육상(1982), 3·1문화상(1992) 등 많은 상을 받은 인물이 됐다.
일본 사람은 일본에 살아야
이태영(李兌榮, 1914~1998)은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 진동에서 아버지 이흥국과 어머니 김흥원 사이의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운산금광 개발로 미국, 일본, 중국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몰려온 국제적인 곳이었다. 이태영의 아버지는 광산일로 많은 돈을 벌었고 독립투사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막내딸이 첫 돌을 지났을 때, 아버지가 탄광사고로 세상을 떴다. 무남독녀인 어머니는 친정에 의탁했지만 가게를 열어 장사하면서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현명하고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여섯 살짜리 이태영은 어머니를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고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일본 남자아이에게 매섭게 쏘아 붙였다. “여긴 우리나라야. 왜 여기 와서 사는 거야. 빨리 너희 나라로 돌아가!” 아이는 눈물을 흘렸고 다음 날 순사들이 태영을 체포하러 들이닥쳤다. ‘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냐’는 순사의 질문에 태영은 답했다, ‘한국 사람은 한국에 살고, 일본 사람은 일본에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시킨 사람이 누구냐’는 물음에는, ‘아이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서 가르쳐 주었을 뿐’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이태영은 풀려났다.
이태영이 8세 때, 큰 오빠 태윤이 미국인 선교사의 비서로 취직하면서 가족은 영변으로 이사했다. 가장이 된 큰 오빠 태윤의 뒷바라지로 이태영은 평양 정의여고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진학했다. 태영의 롤 모델은 가정과 직업을 병행하면서 성공적 삶을 살아낸 마담 퀴리였다.
마리 퀴리를 꿈꾸다
1935년 크리스마스 때 정동교회에서 이화 합창단원으로 독창을 하는 이태영을 눈여겨 본 남자가 있었다. 그는 평안남도 진남포 앞바다 제도에서 태어난 정일형이다. 평양광성학교와 연희전문대학 문과를 졸업한 후 미국 웨슬리언대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한 그는 뉴욕 드류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연희전문학교 사회학 교수로 부임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대중 속에 뛰어들기로 결심해 교수직을 그만두고 평양 선교리 공장지대에 와서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마침 이태영이 학업을 마치고 평양여자성경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정일형은 이태영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두 사람은 1936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평양 정의여고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 첫 날부터 이태영은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온갖 집안일을 도맡았다. 남편이 감리교 신학교에서 강의하게 되자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고 이태영도 서울에서 여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1940년에는 내선일체를 주창하는 일제의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강요가 거세어졌다. 일제는 계략을 세워 감리교 신학교의 교장과 교수들, 학생들까지 잡아 가두었고 학교는 폐교시켰다. 남편 정일형 박사의 옥살이가 시작된 사건이다. 매일 10시간에 걸쳐 온갖 고문을 받는 나날이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는 잠시 풀려났다가 다시금 종교계 인사들과 함께 체포돼 평양경찰서로 압송됐다.
이태영의 남편 정일형 박사는 1945년 봄에 무죄 언도를 받을 때까지 5년에 걸친 감금생활을 지냈고, 생사를 헤매는 남편의 옥바라지와 시어머니 봉양, 아이들 양육은 오롯이 이태영의 몫이었다. 여학교 교사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에 누비이불을 만들어 팔면서 가까스로 생활했다. 학교가 폐교되면서 신학교 사택에서 쫓겨날 때 이태영은 만삭의 몸이었다. 1943년 12월 말, 냉혹한 겨울에 가족은 거리로 나앉았다. 이태영이 길 위에서 울고 있을 때, 어떤 할머니가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 집 안방에서 아들을 낳았다. 1945년 봄에 남편이 석방되고 여름에는 해방이 됐다. 
보따리를 바꿔 멘 오후의 시작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게 되면서 하지 중장 환영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남편도 그 일원이 되어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보, 이제 보따리를 바꿔 멥시다. 기다리던 그 세월이 바로 지금 왔으니 평생소원이던 법률공부를 하시오. 머리털 뽑아 신은 못 삼을지언정 결초보은 하겠소. 아무 미련 없이 빨리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시오.”
33세 가정주부인 이태영은 남녀공학이 된 서울대에 최초의 여학생으로 입학해(1946) 법과대학을 졸업했다(1950). 이태영은 1952년 고등고시에 합격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여성이 판사가 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반대해 법관으로 임명되지 못했다. 잠시 낙담했지만 한반도 5천년 역사 속 최초의 여성변호사에게 몰려들어오는 불행한 ‘노라’들을 만나면서 이태영은 자신의 임무를 깨달았다. 그것은 가정법률상담소의 시작이었고 뒤이은 여성백인회관의 개원이었다. 이후 김옥길 총장의 강권으로 모교 이화여대 법학대학 학장직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기본적인 인권으로서 여성의 권리에 주목했기에 이태영의 족적은 더 의미가 깊다. 가족법 개정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 데서도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가족법이 개정됐습니다. 오백 년 묵은 인간 차별의 벽이 무너졌습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으니 … 축하한다고 말해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성이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다만 ‘제 자리’를 찾았을 따름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 노릇하게 됐을 뿐입니다.”(1989년 제3차 가족법 개정 이후 이태영 박사의 소감 중에서)
이태영은 채송화로 살았다. 채송화의 비밀은 ‘혼자 또는 함께’다. 전형적인 한국의 마당에 피는 작고 귀여운 채송화는 암수술이 같은 시간에 성숙한다. 채송화는 햇빛이 강한 정오에 활짝 피는데 이때 벌들이 찾아와 수분해 준다. 타가수분하는 시간이다. ‘함께’해 씨앗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런데 채송화는 오후에 은밀하게 제2의 삶을 시작한다. 자가수분 과정이다. 아직 수분이 안 된 꽃의 수술들이 몸을 이리 저리 비벼대어 암술에 자기 꽃가루를 묻히는 것이다. 이렇게 ‘혼자’서 씨앗을 만들기도 한다.
이태영은 딸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 충실한 인생의 열매를 맺었다. 모든 것을 ‘함께’했던 나날이다.
그러다가 해방 후에는 남편의 외조로 ‘혼자’의 삶을 완성했다. 자아실현이다. 그렇게 맺은 열매와 씨앗은 한국 여성의 희망이 됐다. 그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철저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 냈고 모든 방면에서 완벽한 씨앗을 거뒀다.
참고문헌
- 허도산, 『한국의 어머니 이태영』, 자유지성사, 1999.
- 이태영 『나의 만남, 나의 인생 : 이태영 자전적 교유록』, 정우사, 19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