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독에 대한 인식이 낙인과 미화라는
양극으로 나타나는 가운데 대부분의 매독 환자는
윤리적 지탄을 받으며 숨어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숨을수록 매독의 근절은 요원해진다.
20세기 중반 항생제 페니실린의 등장으로
매독은 치료 가능한 질병이 됐지만,
매독 환자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은
적절한 치료는커녕 미국 터스키기와 과테말라의
매독 생체실험을 가능케 했다.
‘콜럼버스의 비등가 교환’으로 인해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이 구대륙에서 반입된 갖가지 감염병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있을 때, 유럽인도 이전에 겪어본 적 없는 ‘신종 감염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메리카를 초토화한 두창(천연두) 등에 비하면 덜 치명적이지만, 최초의 유행 때 100만 명 이상의 유럽인이 죽은 것으로 추정될 만큼 큰 피해를 초래한 이 감염병의 정체는 바로 매독이라는 성병이었다.
발병 기원 놓고 계속되는 논쟁
매독이 유럽에 출현한 것은 콜럼버스가 제1차 항해를 통해 서인도제도에 상륙하고 돌아온 직후인 1493년이었기 때문에 콜럼버스가 가져온 카리브해 지역의 ‘특산물’로 비유되기도 했다. 스페인의 의사 루이 디아스 데 이슬라(1462∼1542)의 기록에 따르면, 매독은 원래 히스파니올라섬의 풍토병이었으나 이에 감염된 콜럼버스 일행에 의해 바르셀로나에서 유행했고, 이듬해인 1494년 이탈리아 전쟁을 계기로 전 유럽으로 퍼졌다. 이러한 매독의 아메리카 기원설은 지금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달리 유럽 기원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마침 콜럼버스가 제1차 항해에서 돌아온 시기에 매독과 증상이 비슷한 구대륙의 프람베시아가 매독으로 변화해 유행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 외부 문명과 접촉하지 않은 아마존 열대우림의 원주민을 대상으로 매독 감염 여부를 조사한 결과, 대부분이 매독의 무증상 보균자였다. 신대륙에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매독과의 공생 과정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2008년에 이뤄진 유전자 분석에 따르면, 현대의 매독은 신대륙의 프람베시아와 근연 관계에 있는데, 이 역시 매독, 또는 매독의 ‘전 단계’였던 프람베시아의 기원이 신대륙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2020년, 중세 유럽인 유골의 DNA에서 매독균의 유전자를 분석한 연구가 등장했는데, 이에 따르면 콜럼버스의 항해 이전인 15세기 초중반에 이미 유럽에 매독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매독의 기원은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있지만, 15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유행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매독은 주로 성관계를 통해 감염되는 ‘은밀한 질병’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삽시간에, 그리고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스페인(1493)과 이탈리아(1494)를 거쳐 1495∼1499년에 이미 유럽의 상당 지역을 휩쓸었다. 볼테르(1694∼1778)가 지은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Candide ou l'Optimisme)』(1759)의 표현을 빌리자면, 캉디드의 스승 팡글로스는 파케트에게서, “파케트는 학식 높은 수도회 수사, (……) 그 수사는 나이 든 백작 부인, 백작 부인은 기병 대위, 기병 대위는 후작 부인, 후작 부인은 어느 시동, 시동은 예수회 수사, 그 수사는 (……) 콜럼버스 일행 중 한 명에게서 직접 그 병을 옮았다.”
르네상스 이후 중세적 억압에서 벗어나 분방해진 유럽의 성 문화는 매독의 전파에 안성맞춤이었다. 1509년 인구 30만의 베네치아에 매춘부가 1만1천654명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성매매도 성행했다. 그러나 매독의 확산은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6세기 초 중국 통해 조선에 전파
포르투갈 출신의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1460∼1524) 일행이 신항로를 개척해 1498년 인도에 기항했는데, 이를 계기로 인도에 퍼진 매독은 인도네시아 등을 거쳐 1505년경 중국 광둥에 상륙했다. 조선 중기의 문관·학자 이수광(李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1614)에 따르면, 중국 유래의 ‘천포창’(天疱瘡, 매독으로 추정)이 16세기 초(1505∼1521년경) 조선에 전해졌다. 1512년에는 일본 간사이(關西) 지방에 출현해 이듬해 간토(關東) 지방으로 퍼졌다.
500여 년 전, 매독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일본열도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데 걸린 시간은 20년이 채 안 됐다. 불과 40여 년 전, 미국에서 보고(1981)된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 AIDS)이 한국에 상륙하는 데 4년이 걸린 것과 비교하면, 교통의 발달 정도를 고려할 때 참으로 경이적인 속도였다. 일본 다네가시마(種子島, 현 가고시마현)에 서양식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으로, 매독 전래 30년 후의 일이었다.
조선에 매독 환자가 얼마나 발생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찍이 16세기에 조선 최초의 매독 관련 의서 『치포방(治疱方)』이 등장했고, 임진왜란(1592∼1598) 때 전국적인 유행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중원(濟衆院)의 미국인 의사 앨런(1858∼1932)과 헤런(1856∼1890)이 정리한 『조선정부병원 1차년도 보고서(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1886)에는 조선에 말라리아가 가장 흔하고 매독이 두 번째로 많다고 보고돼 있다.
일본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도시대의 대표적인 난학의(蘭學醫)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33∼1817)는 『형영야화(形影夜話)』(1810)에서 “매독만큼 세상에 많고 고치기 어려워 사람을 괴롭히는 질병은 없다”면서 자신이 “매년 1천 명 남짓 치료하는데, 그 가운데 7∼8백 명은 매독 환자”라고 밝혔다. 에도시대의 인골 조사를 통해 매독 환자의 추계 빈도가 54%였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15세기 말, ‘신종 감염병’ 매독은 병명이 없는 상황에서 돌연 크게 유행했기 때문에 유래했다고 추정되거나 적대시하는 지명이 붙었다. ‘프랑스병’(이탈리아, 독일, 영국), ‘이탈리아병’(프랑스), ‘스페인병’(이탈리아, 포르투갈), ‘기독교병’(튀르키예), ‘폴란드병’(러시아), ‘독일병’(폴란드)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병명을 통해 전파 경로를 유추할 수도 있지만, 적국에 대한 모욕의 수단으로 사용된 측면도 강하다. 그러나 1530년 이탈리아의 의사 프라카스토로(1478∼1553)가 명명한 ‘시필리스(syphilis)’가 점차 매독의 통일적인 명칭으로 자리잡게 된다.
동아시아에서도 처음에는 ‘광동창(廣東瘡)’, ‘당창(唐瘡)’이라 불리다가 ‘양매창(楊梅瘡)’, ‘미창(黴瘡)’, ‘매독(梅毒)’ 등 중립적인 병명으로 변모돼갔다. 2015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신종 감염병 명명 가이드라인을 발표해 병명에 지명을 쓰지 말도록 권고했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출현 당시 ‘우한폐렴’ 등의 명칭이 상당 기간 쓰인 것을 보면, 시공을 뛰어넘는 질병과 혐오의 밀접한 관계성이 엿보인다.
‘낙인’이 불러온 일상의 변화
매독에 대한 혐오는 주로 성병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공기나 물을 매개로 ‘일상적으로’ 전염되는 질병과 달리, 성병은 ‘비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감염돼 ‘은밀한 곳’에 증상이 발현하기에 별다른 지식이 없어도 감염 경로가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유럽에서 매독은 ‘자기 관리’의 결여 내지는 실패에서 비롯된 ‘불결한’ 질병으로 비쳤고, 매독 환자는 낙인이 두려워 자신의 질병을 숨기려 했다. 매독이 진행되면 코가 함몰되거나 탈모가 생기기 때문에 코 가리개(선글라스의 원형)와 가발 등을 착용해야 했다.
반면 매독에 걸리지 않은 여성은 피부에 발진이 없다는 것, 즉 자신이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가슴과 등이 파인 드레스를 착용했다는 설도 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매독이라는 명칭을 입 밖에 내는 것조차 터부시돼 ‘매독’이라는 단어를 인쇄한 신문 매체가 ‘외설적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은 정반대였다. 16세기에 일본에서 활동한 포르투갈인 가톨릭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는 매독이 “불결하고 파렴치한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남녀 모두 보통의 일로 여기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18세기 이후 성매매 시설이 확대돼 성(性)이 대량으로 소비되는 환경이 조성됐고, 18세기 말, 의사 나카가미 긴케이(中神琴, 1744∼1833)는 승려를 포함한 인구의 6∼7할이 매독에 걸려 아무도 그 질병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한탄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매독에 대한 시선은 점차 부정적으로 변화해 빈곤 및 향락과 관련지어졌고, 유녀가 감염원으로 지목되며 성차별적인 멸시의 대상이 됐다. 20세기 전반 남성 문인들 사이에는 빈곤, 여성, 질병 등 세 가지를 갖춰야 진짜 문학이 가능하다며 일부러 유곽을 찾아 매독에 걸리는 풍조도 있었는데, 이는 “매독에 걸리지 않으면 천재일 수 없다”던 19세기 유럽 예술계의 모습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
이처럼 매독에 대한 인식이 낙인과 미화라는 양극으로 나타나는 가운데 대부분의 매독 환자는 윤리적 지탄을 받으며 숨어
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숨을수록 매독의 근절은 요원해진다. 20세기 중반 항생제 페니실린의 등장으로 매독은 치료 가능한 질병이 됐지만, 매독 환자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은 적절한 치료는커녕 미국 터스키기(Tuskegee, 1932∼1972)와 과테말라(1946∼1948)의 매독 생체실험을 가능케 했다. 총 2천 명 이상이 동원된 일련의 생체실험에서 기존의 감염자가 치료받지 않고 관찰되거나 비감염자가 강제로 감염됨으로써 211명 이상이 사망했다. 윤리적 지탄의 대상이 누구여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