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이란 용어를 일반화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은 영국의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Hebert Butterfield)다. 그가 1949년에 펴낸 책『근대과학의 기원: 1300-1800』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다. 그는 과학혁명이 당시 서양인의 세계관을 유기체적 세계관에서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바꾸는 데 일조했다고 말한다. 이런 세계관의 변화가 르네상스나 종교개혁보다 더 또렷이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 지었다고 지적한다.
한편 토머스 쿤(Thomas 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는 과학혁명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쿤은 1959년에 발표한 학술회의 논문에서 ‘패러다임’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사실은 핸슨(Norwood Russell Hanson)의 책『발견의 패턴』(1958)에서도 패러다임이란 단어가 반복해서 제시된다. 폴라니(Michael Polanyi)의『개인적 지식』(1958)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쿤은 이를 부인했다.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엔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론과 문제를 표현하는 용어조차 다르다. 즉 서로 어떤 패러다임이 우월한지를 판정하기 위한 공통의 기준이 없는 것을 ‘통약(通約)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라고 한다. 근자의 노벨상 수상자 업적 가운데 특히 생명 현상을 둘러싼 과학 혁명적인 업적을 통해 이러한 통약 불가능성이 깨지고 있음을 본다.
생명을 대하는 인류의 시각은 다윈이 펴낸『종(種)의 기원』(1859) 전후로 갈린다. 다윈은 생명체를 창조한 것이 조물주가 아닌 자연이라고 했다. 지구상의 개체들 가운데 생존에 유리한 개체만 살아남는 ‘진화의 법칙’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살아남는 게 뭐고 그게 어떤 식으로 진화할지 미리 알아내기는 불가능하기에 자연의 선택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봤다.
그런데 2018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프랜시스 아널드(Frances Hamilton Arnold)는 1993년 단백질을 생성하는 박테리아를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유도 진화’ 기술을 개발하면서 다윈의 진화 법칙을 깼다. 자연의 진화에는 수만 년 또는 수억 년이 걸리지만, 아널드는 불과 몇 주 만에 실험실에서 이를 이뤄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세인에게 수용될 때까지는
그가 죽고 1세기 이상 걸렸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도
발표된 후 반세기 지나서야 인정을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최근 과학혁명의 시차 인정에서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노벨상 시차의 축소는 인류 진보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미국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아널드는 말썽꾸러기 소녀였다. 유명 핵물리학자인 아버지 윌리엄은 아널드가 열다섯 살 때 “계속 부모 속을 썩이면 함께 살 수 없다”라고 경고하자 아널드는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나이를 속여 피자 가게 아르바이트, 청소 대행, 재즈 클럽 바텐더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가 청소를 한 곳에는 당대 최고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의 집도 있었다. 그가 과학혁명의 주인공이 될 운명이 여기에서 싹 텄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연치고는 기묘하다.
그는 남다른 학창 시절의 경험을 담은 자기소개서를 앞세워 프린스턴대에 입학했다. 그의 유도 진화 기술은 검색 가능성이 핵심이다. 그는 DNA에 무작위로 인위적 돌연변이가 만들어지도록 한 뒤 이를 박테리아에 삽입했다. 이 박테리아는 특정한 반응을 유도하는 열쇠인 촉매 역할을 할 효소를 생산한다. 아널드는 이렇게 만든 효소를 대량으로 모아 일종의 도서관을 구축한 뒤 원하는 기능을 가진 효소만을 빠르게 검색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실험실에서 대량의 진화를 구현한 다음 그 가운데 필요한 것만 취하면서 진화의 방향성을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37세에 이룬 업적이었다.
그래서 자연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많은 효소를 진화시켜 원하는 단백질과 물질을 만들어 내는 ‘생물 공장’을 연구하는 학문인 대사공학(Metabolic engineering)을 탄생시켰다. 그는 업적 발표 후 25년 만에 노벨상을 받았다.
역대 노벨 과학상(생리의학상, 화학상, 물리학상) 수상자를 보면 거의 절반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발견을 한 뒤 상을 받기까지 20년 이상의 ‘노벨상 시간 격차’가 발생한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두 명의 과학자도 2005년 mRNA를 통해 항원 단백질 생성과 면역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면역(Immunity)〉에 발표한 지 18년 만에 수상했다. 코로나 백신은 그들의 업적에 기반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세인에게 수용될 때까지는 그가 죽고 1세기 이상 걸렸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도 발표된 후 반세기 지나서야 인정을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최근 과학혁명의 시차 인정에서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노벨상 시차의 축소는 인류 진보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막스 플랑크(Max Karl Ernst Ludwig Planck)는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를 설득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빛을 보여줌으로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자가 멸종하고 새로운 세대가 성장해 그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질 때 비로소 승리한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막스 플랑크는 “과학은 장례식만큼 진보한다”라고 했다. 이 말은 한 세대가 사라질 때 비로소 새로운 이론이 옛 이론을 뿌리 뽑을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다. 진리 반대자의 멸종이 인류에겐 진보를 안겨준다는 통찰인 셈이다. 멸종의 시차가 줄어들고 있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