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질병과 세계사

약 220년 전 일본의 이야기다. 야마토(大和, 현 나라현) 지방에 사는 60세 여성 아이야 간(藍屋勘)이 기이(紀伊, 현 와카야마현) 지방의 의사 하나오카 세이슈(華岡靑洲, 1760∼1835)를 찾아갔다. 유암(乳巖, 유방종양, 특히 유방암) 환자인 자신을 치료해 주려는 의사가 없기에 “항상 어려운 병을 고치는” 것으로 알려진 하나오카에게 진료를 청한 것이다. 당시 유암은 걸리면 “백 명 중 백 명이 반드시 죽는” 질병이었다. 외과의 근대성을 규정하는 마취술이 서양에 40여 년 앞서 ‘극동의 변방’에서 먼저 확립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를 ‘매장’하고 서양, 특히 독일 마취술의 수입을 고집한 일본의 ‘근대의학’은 이후 얼마나 발전했는가? 패전 직후 일본의 의학 수준은 구미 선진국과의 격차가 컸지만, 그중에서도 마취과학이 크게 낙후돼 외과 분야의 격차를 더 크게 벌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19세기초 ‘마불산’으로 진행한 외과수술하나오카도 처음에는 고사했지만, 죽어도 좋으니 치료를 시험해달라는 아이야의 ‘각오’를 듣고 한방의학의 전통에서 시도된 적 없는 유암 수술을 결의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단지 ‘명의’라고만 불릴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1804년 10월 13일(양력 11월 14일) 아침에 실시한 ‘성공적인’ 수술에 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의 마불산(麻沸散)을 복용시켰다. (환자는) 잠시 후 정신이 몽롱해지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결국 전신이 마비돼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 크로머 메스(kromme mes, 구부러진 메스)로 덩어리 위 3촌(寸) 정도를 세로로 절개했다 (……) 좌우 손가락을 넣어 덩어리와 살을 벗기듯 떼어냈다.” 적출 후에는 상처를 소주로 소독하고 절개한 피부를 실로 꿰매고 나서 고약을 발라 처치했다. 전신마취 하의 외과수술이 세계 최초로 이뤄진 것이다.‘마불산’은 하나오카가 고안한 내복용 마취제로, 만다라화(蔓陀羅華), 초오두(草烏頭), 백지(白芷), 당귀(當歸), 천궁(川芎), 천남성(天南星) 등 6가지 한약재로 조제됐다. 만다라화에 함유된 스코폴라민(scopolamine)은 중추신경계에 작용해 의식의 저하 또는 소실을 일으킨다. 초오두에 함유된 아코니틴(aconitine)은 강한 진통 효과를 내며, 빈맥(잦은맥박)을 일으키는 만다라화에 대해 서맥(느린맥박) 효과로 길항작용을 하므로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낸다. 1987년에는 인체 실험을 통해 ‘마불산’의 마취 효과가 실제로 입증되기도 했다. 이후 하나오카는 150여 차례의 유암 수술뿐만 아니라, 일반외과, 정형외과, 비뇨기과, 산부인과, 안과 등 외과 전반에 걸친 다종다양한 수술을 집도했다. 그의 문하생은 전국적으로 약 2천 명에 달했고, 그의 마취술이 각지로 계승됐다. 하지만 전신마취 수술의 리스크를 잘 알고 있던 하나오카는 ‘마불산’의 처방을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일부에게만 전수했다. 그 처방은 사후인 1862년이 돼서야 이마무라 료안(今村了庵, 1814∼1890)에 의해 공개된다.그런데 어떻게 ‘근대화’ 이전인 에도 시대 일본에서 메스를 사용한 외과수술이, 그것도 전신마취 하에 가능했을까? 당시 일본의 의학은 중국 유래의 한방의학이 주류였지만, 네덜란드를 경유한 서양의학의 지식이 제한적으로나마 수입되고 실제로 연마돼 ‘난학(蘭學)’의 전성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일본인 의사가 인체 해부를 직접 실시해 해부학서를 발간했고, 서양 외과를 계승한 외과 학파도 형성돼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오카는 1782년 교토로 유학해 내과 중심의 한방의학과 더불어 외과 위주의 난방(蘭方)의학을 섭렵하며 ‘한란절충의(漢蘭折衷醫)’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당대의 ‘한란절충의’는 중국 정골술(整骨術, 정형외과)의 전통을 계승하고 서양 유래의 외과 지식을 받아들이면서 마취술을 독자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는데, 하나오카는 이러한 기존 마취제의 처방을 개량함으로써 ‘마불산’을 완성했다. 세계 최초의 전신마취 수술에 성공하고 외과 전반을 일신한 그의 업적은 물론 대단한 것이었지만, 한 천재의 독창적인 산물로만 치부될 수 없는 시대성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전통과의 공존 대신 단절 선택 한편으로 당시 서양의 외과수술은 어땠을까? 잉글랜드의 작가 프랜시스 버니(Frances Burney, 1752∼1840)는 59세 때인 1811년에 받은 유암 수술에 관해 이렇게 묘사했다. “무시무시한 칼이 내 가슴을 파고들어 정맥과 동맥과 살과 신경을 가를 때 (……) 울부짖기 시작해서 절개가 지속되는 내내 비명을 멈추지 않았어요.” 비슷한 나이 때 수술을 받은 일본의 아이야와는 정반대의 경험이었다. “아아, 얼마나 유쾌한 일인지. 치료받는지도 몰랐고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러나 마취제가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1839년, 당대 프랑스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명이었던 벨포(Alfred-Armand-Louis-Marie Velpeau, 179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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