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힘줄은 늘어지고, 쥐는 힘은 약해지며, 관절은 뻣뻣해진다. 세상에는 땅거미가 깔린다.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게 된다. 세상이 멈추어 선다. 가족들의 소리는 희미해진다. 새소리에 잠이 깨고, 산을 오르는 것은 옛일이 되며 내리막길을 걷는 일마저 겁이 난다. 머리털은 사과꽃처럼 희어져, 성냥개비처럼 부러질 듯 힘없는 몸을 장식할 뿐이다. 그러다가 너는 영원한 안식으로 가는 길에 거의 이르렀고, 친구들은 네 장례 계획을 세운다. 근사했던 삶이 조만간 마무리된다. 값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끝난다. 몸은 그 출처였던 땅으로 되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불어넣으신 하나님께 되돌아간다.” 구약성경 전도서의 일부분이다.
필자는 신문의 여느 기사보다 먼저 읽는 게 ‘부고란’이다. 부고 기사를 통해 죽은 자와 산 자의 삶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 출생해 몇 살에 타계했는지를 알면 그의 삶의 궤적이 역사의 수레바퀴와 어우러지는 걸 느끼게 된다. 살아생전에 무엇을 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을 유추할 수도 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 부고란에 주목하는 이유다.
부고 기사는 신문사의 베테랑 기자가 쓴다. 우리나라 신문사에서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는 그렇다고 알고 있다. 『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윌리엄 맥도널드 편저, 2019)은 1851년부터 2016년까지 사망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게다가 2016년엔 〈뉴욕타임스〉의 부고 담당 기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오빗(Obit)」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7년간 총 800명의 부고 기사를 써온 〈월스트리트 저널〉 부고 전문기자인, 제임스 R. 헤거티는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2023)에서 생전에 직접 부고를 써 둬야 한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내 부고를 나보다 잘 쓸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부고 작성에서 세 가지를 염두에 두라고 조언한다. 첫째,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가? 둘째, 그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 목표를 이뤘는가?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시녀들」(1656)을 보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1899)를 작곡했다. 왕녀는 「시녀들」에 나오는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다. 레오폴드 1세와 결혼한 마르가리타 공주가 4명의 자녀를 낳고 6년 만에 22세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라벨은 곡으로 마르가리타 공주 부고를 쓴 셈이다.
2017년 2월 11일자 〈뉴욕타임스〉 부고란에는 뉴욕시립대학 교수인 레이먼드 스멀리언(Raymond Merrill Smullyan)의 사망 소식이 실렸다. 부고 담당 기자는 “그는 97세까지 즐겁게 살다 죽은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였다”라고 썼다. 생전에 그가 했다는 말도 인용했다. “죽는 걸 왜 걱정해? 살아 있는 동안엔 죽지 않을 텐데.” 고인의 재치와 유머가 번득이는 기사다.

로마 공동묘지 입구에는 이런 글이 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고,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해석된다.
이쯤에서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혹자는 ‘삶은 곧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키케로는 “지혜로운 사람은 삶 전체가 죽음의 준비다”라고 말했다. 동양에선 죽음을 ‘조용한 변화’라고 본다. 침묵 속에 이어지는 삶의 또 다른 단계로 본다. 물리학적 관점에서 죽음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원소로 분해되는 과정이다. 마치 물 분자가 두 개의 수소와 한 개의 산소로 쪼개져 존재하는 것처럼 유기물에서 무기물로 분해된다. 이렇듯 죽음은 단지 원소로 나뉘는 단계다.
필자도 최근 3년 동안 매년 양가 부모님이 타계하시는 걸 지켜봤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자기와 죽음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생명공학기술의 발달로 이제 죽음의 문제는 형이상학적 신비의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 문제로 인식하게 됐다. 기술적 문제에는 기술적 해법이 있게 마련이다. 의사도 암 환자에게 ‘암입니다’라고 말하지 절대 ‘죽음에 걸렸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 죽음은 소송과 수사의 대상이 된다. 기술적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로마 공동묘지 입구에는 이런 글이 있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고,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해석된다.
일과 놀이, 갈망, 노력, 사랑 등 인생을 풍부하게 만드는 모든 요소는 다양한 실로 짠 직물처럼 우리의 삶 속에 치밀하게 엮여 있다가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이를 두고 ‘기쁨의 원천에 서식하는 벌레’라고 했다.
결혼식장에선 박수가, 장례식장에선 악수가 주를 이룬다. 나를 위한 축가는 서서 듣지만, 나를 향한 진혼곡은 누워서 듣는다. 그게 인생이다. 생전에 쓴 부고가 장례식 참석자들에게 고인의 재미있는 버릇이나 익살스러운 말과 행동을 상기시킴으로써 즐거움의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면 산 자에 대한 최후의 보답이 될 것이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