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식물성의 사유로 읽어낸 역사 속의 여성

“우리는 생명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 이렇게 펜타곤에 모였다. 우리가 사는 이 행성, 지구와 우리의 미래, 아이들의 생명에 두려움을 느낀다. … 우리는 남자들이 느끼는 분노는 무엇인지, 파괴 행위를 통해서만 충족되는 공포가 무엇인지,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차가운 심장과 야망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남을 지배하려는 태도는 국제관계에서 착취와 살인을 불러오며 집에 있는 여자와 아이들에게도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 우리는 지금 진행되는 군비경쟁을 끝내려 한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기 위한 놀라운 발명은 없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동물과 식물의 생명과 작용이 이 행성에서 양분을 얻고 또 양분이 되어 이곳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안다.
 ―『페트라 켈리, 희망은 있다』(2004) 중에서

전쟁이 낳은 사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독일의 한 병사가 미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서독행을 원했으나 연합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병사는 펜팔친구로 지내던 서독 여성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녀는 거주지 보증에 협력해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집에 머물렀고 얼마 후 결혼하게 됐다. 포로였던 병사는 지그프리트 레만, 서독 여성은 마리안네 비를레였다. 곧 그들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이름은 페트라 레만, 우리가 페트라 켈리로 부르는 인물이다.
페트라 켈리(Petra Karin Kelly, 1947~1992)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독일에서 가장 부유하고 보수적인 지역이다. 젊은 병사였던 아버지 지그프리트 레만은 가정에 정착하지 못했고, 두 젊은이의 결혼생활은 일찍 막을 내렸다. 마리안네는 아이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생활전선에 들어갔다. 외할머니는 나치에게 남편을 잃었기 때문에 극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고, 손녀딸에게 진보사상의 영향을 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안네는 서독에 주둔한 미국 군인인 존 E. 켈리와 결혼했고, 모녀는 미국으로 전출가는 새아버지를 따라 조국을 떠났다. 외할머니는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이들을 위해 집을 팔아 아낌없이 지원했다.


페트라 켈리는 성장기에 평화와 비폭력이라는 태양을 좇았다.

고국으로 돌아와 녹색당을 창당하고 의원생활을 하면서
촘촘한 씨앗은 살뜰하게 피어났다.
태양처럼 당당하게 거침없이 살아온 켈리는

44세라는 젊은 날, 연인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그녀의 용기 있는 발걸음은

전 세계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귀한
해바라기 씨앗 그 자체다.


거침없는 독일인 여학생
가족은 조지아 주 콜럼버스에 자리를 잡았다. 켈리가 조지아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존 F. 케네디를 선망하게 됐다. 새로운 미국을 만들어가던 태양처럼 빛나는 젊은 대통령은 이 똑똑한 독일 소녀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인 1963년에는 인종차별철폐와 자유를 요구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저항 운동과 만났다. 하지만 떠오르는 태양인 케네디 대통령과 비폭력의 영웅 킹 목사의 저격에 직면하면서 이 소녀는 폭력에 관한 선명한 깨달음을 얻었다. 켈리는 새아버지를 따라 버지니아 햄턴으로 이사했는데, 이 지역은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섞여 살고 백인과 흑인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곳이었다. 햄턴고등학교 시절 켈리는 디자이너, 카피라이터, 만화가, 학교 신문 기자, 토론 동아리 대표 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66년에는 아메리칸대학교 국제관계학부에 입학했다. 워싱턴에 자리한 이 대학은 유명 정치인과 고위 관료의 특강이 많은 곳이었다. 켈리는 1학년 때 좋은 성적을 거뒀고 남은 3년의 장학금을 보장받지만, 독일국적자라서 장학금을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켈리에게 차별이란 단어는 없었다. 거침없는 이 여학생은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에게 편지를 썼다. 로버트 케네디는 포기하지 않는 이 독일 학생의 끈질긴 편지 공세에 관심을 갖게 됐고, 켈리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아메리칸대학교에는 외국인 장학금 제도가 생겼다.
학창시절 켈리는 외국학생들을 위한 국제주간 행사를 만들고 소련 대사관을 설득해 이 행사에 소련의 철갑상어를 지원받아 화제의 인물이 됐다. 크리스마스 때 독일행 비행기를 탈 돈이 없던 켈리는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독일 총리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고, 티켓을 제공받았다. 이 맹랑한 여학생의 기이한 행적은 워싱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켈리는 허버트 험프리와의 토크쇼에 초대받는데, 준비된 대사를 무시하고 베트남 전쟁의 부당성을 거침없이 제기해 부통령을 쩔쩔매게 만들었다.    

생명의 원천인 태양을 직시하다
켈리에게는 소아암 환자인 열두 살 아래 여동생 그레이스가 있었다. 그레이스는 미국 이주 후 한쪽 눈을 떼어냈으나 소생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켈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게 동생에 관한 편지를 썼고, 교황은 자신이 집전하는 미사에 온가족을 초대했다. 얼굴의 절반을 붕대로 감은 일곱 살짜리 환자는 희망의 미소로 교황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켈리는 탈퇴서를 직접 교황에게 보내는 방식으로 교회를 떠났다.
소녀시절 킹 목사와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지켜본 켈리는 교황 알현 후 체코에 들러 좌절된 ‘프라하의 봄’이 남긴 처참함을 목격했다. 비폭력과 평화라는 주제가 대학생 켈리의 뇌리를 관통했다. 197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한 켈리는 브뤼셀에 있는 유럽공동체 임시직을 거쳐 유럽공동체 산하기구인 경제사회위원회(WSA)의 자문역이 됐다. 이즈음 켈리는 사민당에 입당했고, 평화와 비폭력, 여성주의 신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가 워싱턴의 한 행사에 참가하면서 핵무기개발 반대에도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을 떠난 동생이 방사선 치료로 시달린 기억도 한몫했다. 이후 독일, 유럽, 일본, 미국, 호주를 넘나들며 환경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켈리는 BBU(시민주도 환경보호 전국연합)에 가담했고 1977년에는 BBU 상임위원으로 선출됐다. 1980년 1월에는 헬무트 골비처, 하인리히 뷜 등과 함께 독일 녹색당을 창당했다. 녹색당은 1983년 총선에서 5.6%의 지지를 얻어 켈리를 포함한 27명이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환경 관련 문제는 정치적인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켈리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해 5월, 서베를린에서 개최된 유럽 핵무기 철폐 총회에 참석했던 켈리는 동베를린으로 무작정 건너가 몇몇 녹색당 의원들과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 면담을 요구했다. ‘칼을 녹여 쟁기를!’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서. 서독인들은 이 돌발행동을 비난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동독 공산당 호네커 서기장이 켈리에게 동독 방문을 정식으로 요청해온 것이다. 핵무기 문제 논의가 의제였다. 물론 켈리는 이 초청을 수락했다.
그런데 초청 일자가 다가오면서 동독에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대사관 주변에서 반체제 인사들이 평화기원 촛불시위를 개최했는데 이들이 폭력적으로 연행된 것이다. 동독에 도착한 켈리는 이 사태를 규탄하는 것으로 호네커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호네커는 크게 당황했다. 켈리는 호네커에게 세 가지를 제안했다. 양국의 무력사용 금지, 적대행위 금지, 단계적 무기 감축이었다. 호네커는 세 번째 항목만 빼고 동의했다. 환경, 평화와 비폭력이라는 태양만을 바라본 켈리의 거침없는 돌진, 해바라기의 생태가 가져온 큰 결실이었다.

해바라기의 최후
켈리의 행동반경은 국경의 울타리를 넘었다. 독일 연방의회에 미국 호피 인디언과 나바호 인디언을 초청해 원주민과 소수민족 문제에 관심을 촉구했다. 켈리는 영국이 남호주 사막에서 핵폭탄 실험을 한 후 원주민들이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는 것을 목격했고, 소수민족 문제가 평화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됐음을 알았다. 자신이 할 일이 많이 남아있음을 직감한 켈리는 녹색당 연방의원들에게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 문제로 정치적인 공격을 받고 고립됐다. 녹색당은 의원직 2년 임기 순환제를 원칙으로 했기 때문이다.
아웃사이더로 지내던 켈리에게 돌파구가 생겼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의 원전 폭발이다. 체르노빌에서 1천500km 떨어진 스웨덴에서도 방사능이 감지돼 서독을 포함한 이웃나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사람들은 녹색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고, 유럽 전역을 다니며 반핵운동을 하던 켈리는 다시금 크게 주목받았다. 당내에서는 임기 순환제를 폐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고개를 들었다. 해바라기 페트라 켈리의 열정이 열매를 맺는 일만 남았다.
해바라기는 ‘태양의 꽃’으로 불린다. 모습이 해를 닮았고 해를 따라 움직이는 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바라기는 성장다방면에 학문적 관심이 많은 동양철학 연구자이며 칼럼니스트이다. 방송대 농학과 늦깎이 학생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는『식물처럼 살기』,『유학과 사회생물학』,『식물에서 길을 찾다』 등이 있다. 기에만 해를 향하고, 꽃이 활짝 피면 더 이상 해를 따라다니지 않는다. 키가 유난히 커서(4~8m), 씨앗이 익으면 무거운 머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목이 부러져 죽는다. 씨앗은 기름을 짜거나 식용으로 사용한다.
페트라 켈리는 성장기에 평화와 비폭력이라는 태양을 좇았다. 고국으로 돌아와 녹색당을 창당하고 의원생활을 하면서 촘촘한 씨앗은 살뜰하게 피어났다. 태양처럼 당당하게 거침없이 살아온 켈리는 44세라는 젊은 날, 연인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그녀의 용기 있는 발걸음은 전 세계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귀한 해바라기 씨앗 그 자체다.

 

참고문헌
- 페트라 켈리 지음, 이수영 옮김,『희망은 있다』, 달팽이출판, 2004.
- 새라 파킨 지음, 김재희 옮김,『나는 평화를 희망한다(페트라켈리)』, 양문, 2002.
- 모니카 스페어 지음, 환경운동연합 편 옮김, 『녹색혁명가 페트라켈리』, 나남,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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