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씻기가 개인위생의 기본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손만 잘 씻어도 폐렴, 설사병, 인플루엔자부터 콜레라, 에볼라출혈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감염병을 상당한 정도로 예방할 수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는 손 씻기를 ‘셀프 백신(do-it-yourself vaccine)’에 비유했고, 유엔(UN)은 2008년부터 매년 10월 15일을 ‘세계 손 씻기의 날’로 제정해 전 지구적 캠페인을 펼치고 있으니 그 효용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감염병에 시달려 온 인류의 긴 역사를 생각하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사실 손 씻기 자체의 역사는 길다.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는 종교적 의식과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고, 일본에서 신사(神社)나 절에 참배하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도 고대에 형성됐다. 그러나 이러한 오랜 관습은 대체로 종교적·문화적인 행위로, 감염병 예방이라는 위생의 목적이 뚜렷하게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산욕열에 의한 산모 사망률의 비밀 19세기 중엽,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Wien)은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의학의 메카였다. 빈 의학의 중심지인 빈 종합병원(Allgemeines Krankenhaus der Stadt Wien)에는 유럽 굴지의 산과(産科) 병원(빈 산과 병원)이 설치돼 있었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여성 조산사와 조산 교육을 받는 여학생이 분만을 담당한 제2 병동에 비해 남성 의사와 남성 의학생 등이 할당된 제1 병동에서 산욕열(産褥熱)에 의한 산모의 사망률이 유난히 높았던 것이다. 특히 통계상 1846년에는 제1 병동의 산욕열 사망률(약 11.4%)이 제2 병동의 산욕열 사망률(약 2.8%)의 4배에 달했는데, 제1 병동의 중증 환자는 종합병원으로 이송돼 통계에서 빠졌기 때문에 실제 사망률은 더 높았다. 1842년 12월의 경우 제1 병동에 입원한 산모의 약 3분의 1이 산욕열로 사망했을 정도다. 이런 사실은 빈의 일반 시민에게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제1 병동을 선택하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닌가? 당시 출산은 자택에서 조산사의 도움을 받아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는 임부는 자선사업으로 운영되는 빈 산과 병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24시간마다 두 병동에 번갈아 배정됐고, 그들에게 특정 병동을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두 병동의 사망률 차이는 의사들 사이에서도 고민거리였지만, 그 원인은 오리무중이었고, 당연히 해결책도 낼 수 없었다. 제1 병동과 제2 병동의 의료 환경은 담당 의료진 외에는 큰 차이가 없었으니 산도(産道)를 이리저리 헤집는 남성 의료진의 ‘거친 손’ 때문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의 ‘더러운 손’이 문제였다. 이를 밝혀낸 이는 1844년 빈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1846년 빈 산과 병원에 임시조수(이후 조수)로 채용된 헝가리 출신의 독일계 산과 의사 제멜바이스(Ignaz Philipp Semmelweis, 1818∼1865)였다. 당시 산욕열은 모성 사망의 주요 원인이었지만, 발병 원인에 관해서는 갖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지구·대기·우주의 변화에 따라 발생한 ‘나쁜’ 공기 즉 장기(氣, miasma)가 유행병을 일으킨다는 이른바 ‘미아스마설’이다. 미아스마는 실체가 없는 모호한 개념이었지만, 원인 불명의 질병에 갖다 붙이기만 하면 누구나 수긍하는 2천 년 전통의 ‘만능’ 이론이었기 때문에 제1 병동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이도 적었다. 제멜바이스는 이런 전통과 권위에 반기를 든 것이다.기존 학설에 반기를 든 제멜바이스 만일 산욕열이 유행병이라면 계절이나 기후에 따른 변동이 보여야겠지만, 7년간 월별 사망률의 추이를 보니 그런 경향은 나타나지 않았고, 빈 내의 다른 병원에서는 제1 병동만큼 사망률이 높지 않았다. 한편, 제2 병동과 달리 제1 병동의 임산부는 시체 안치소를 향하는 사제의 종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이로 인한 심리적 영향으로 산욕열이 발생한다는 설도 있었다. 제멜바이스의 요청으로 사제의 이동 경로가 바뀌고 종소리도 들리지 않게 됐지만, 상황은 그대로였다. 1846년 11월에는 제1 병동의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가 설치됐다. 위원회는 검사 시 생긴 산도의 상처가 산욕열의 원인이라며 남성, 특히 외국인 남성 의학생은 진찰이 거칠고 위험하므로 인원을 줄이라고 권고했다. 이후 남성 의학생의 수가 42명에서 20명으로 줄고 외국인 수도 2명으로 한정됐지만, 사망률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