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음식과 권력

아프가니스탄 카불을 무척 좋아한 유목민 군주가 있었다. 그는 바부르다. 그의 아버지는 티무르의 후손이고, 어머니는 칭기즈칸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1497년, 당시 14세 소년에 불과했던 바부르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접경지역인 페르가나 분지의 왕으로 즉위한다. 사정을 모르는 이에게는 뜻밖의 사실이겠으나 문제의 바부르는 후일 인도에 내려가 무굴제국의 개창자가 된다. 칭기즈칸과 티무르(1336~1405)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 유목민 군주에 의해 중앙아시아의 역사는 거세게 요동친다.무굴제국(1526~1857)은 북인도에 존재하던 이슬람 왕조다. 왕실 혈통은 인도 북방의 유목민이다. 15세기 말 중앙아시아 트란스옥시아나는 티무르 왕조의 후예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트란스옥시아나란 ‘옥수스강 너머’라는 뜻으로 흔히 ‘하중 지방’이라 번역된다. 당시 페르가나의 군주이던 토후(土侯) 우마르 샤이흐(1469~1494)가 어린 왕자 바부르를 남겨놓고 숨을 거뒀다. 무수한 난관을 극복하고 그가 세운 제국의 이름 무굴이란 말은 페르시아어로 ‘몽골’의 와전이다. 무갈이라고도, 모굴이라고도 한다. 무굴인들은 스스로를 구르카니라고 하는데 그 말뜻은 사위, 부마다.바부르의 고손자가 타지마할을 지은 샤자한 황제다.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인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은 우아함이다. 건축미의 백미 타지마할, 이 완벽한 대칭의 대리석 건축물을 짓는데 연인원 2만 명의 노동력을 동원해 22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죽은 왕비를 못 잊어, 그녀를 위한 죽음의 궁전을 지은 이가 바로 세상의 왕 샤자한이다.샤자한은 많이 먹거나 식탐이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향신료를 상당히 좋아했다. 그가 좋아한 음식은 고기에 향신료를 듬뿍 넣고 밤새 푹 고아 만든 스튜인 니하리다. 샤자한은 타지마할 뒤편을 돌아 흐르는 야무나 강의 물로만 음식을 만들게 했다. ‘세상의 제왕’을 사로잡은 아내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자한(1592~1666, 재위 1628~1658)은 페르시아어로 ‘세상(자한)의 황제(샤)’라는 의미를 갖는 칭호다. 그의 본명은 길다. 알라 아자드 아불 무자파르 샤 아붓딘 무함마드 쿠람. 이렇게 긴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이름을 통해 잘난 척하는 것이다.샤자한은 바부르, 후마윤, 악바르, 자한기르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됐다. 부친인 전임 황제 자한기르(세상의 정복자)와 모친인 라지푸트 씨족 출신의 타지 비비 빌키스 마카니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 ‘세상의 제왕’ 샤자한에게는 나이가 한 살 아래인 뭄타즈 마할(1593~1631)이라는 이름의 왕비가 있었다. 1607년 샤자한은 당시 14세의 페르시아 귀족 가문 출신의 아르주망 바누 베굼과 약혼을 한다. 이 약혼녀가 후일 샤자한의 두 번째 부인이 되는 뭄타즈 마할이다. 페르시아어로 ‘아름다운 요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이 둘은 5년 뒤인 1612년에 결혼한다.샤자한 왕의 첫 번째 부인 역시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딸인데 이름은 ‘칸다하리 숙녀’라는 의미의 칸다하리 베굼(1593~1650)이다. 나이는 뭄타즈와 동갑인데 38세에 유명을 달리한 그녀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그녀는 죽어서 고향인 칸다하리 언덕에 묻혔다.뭄타즈는 무려 14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중 7명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녀는 부르한푸르라는 곳에서 38세에 죽었다. 14번째이자 마지막 딸 고하라 베굼을 낳다가 난산 끝에 사망한 것이다. 무려 30시간의 산고를 겪었다니 그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어도 알 만하다. 참고로 엄마와 딸 두 여인 이름 말미에 붙은 ‘베굼’은 투르크어에서 파생된 페르시아어로 왕족이나 귀족 집안 여성에 대한 경칭으로 쓰이는 말이다. 남성에 대한 투르크어 경칭 베그나 베이(고관이라는 뜻)에 상응하는 표현이다.왕비 뭄타즈에 대한 샤자한의 애정은 각별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던 걸까? 19세에 결혼한 페르시아 공주가 얼마나 좋으면 거의 매년 자식을 낳게 하고 종당에는 14번째 자식을 출산하던 중 세상을 뜨게 만든 걸까? 죽은 왕비의 영묘와 ‘왕자들의 난’남편인 샤자한에 대한 왕비의 사랑 또한 깊었다. 궁정시인들은 왕비의 아름다움, 우아함, 자비심을 앞다퉈 칭송했다. 왕과 왕비는 서로 신뢰하는 동반자로 사이좋게 무굴제국 곳곳을 여행했다. 심지어는 전쟁터까지 함께 다녔다. 왕비에 대한 믿음이 워낙 대단해서 왕은 자신의 왕비에게 무르우자라는 영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궁궐의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정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믿고 사랑하던 아내가 죽자 샤자한은 1년 동안 칩거하며 그녀를 애도했다. 그가 슬픔을 추스르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의 등은 굽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는 온통 허옇게 세 있었다. 부르한푸르에 일시적으로 묻혀 있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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