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식물성의 사유로 읽어낸 역사 속의 여성 - 마지막회

“도산 선생 앞에. 20여 년 구속받던 아픈 마음과 쓰린 가슴 상제주께 후소하고 공중여왕 면류관을 빼앗으러 가나이다. 길이 사랑하여 주심 바라 삼가 이 글을 눈앞에 올리나이다. 사랑하시는 기옥 올림. 4257년 7월 5일 운남에서.” ―첫 단독비행 성공 후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대한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옥』(2016) 중에서딸이라서 서운한 존재1901년 1월 11일, 대한제국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설매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권돈각과 장문명의 네 번째 자녀로 태어난 이 아이는 아버지에게 ‘갈네’라는 이름을 받았다. 부부는 7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첫 딸과 둘째였던 아들은 출생 직후 죽었다. 두 아이가 죽고 나서 얻은 딸에게 부모는 길하게 살라는 ‘길네’라는 이름을 주었다. 하지만 4년 후 낳은 둘째 딸은 ‘가라’, ‘죽어라’는 의미로 ‘갈네’라고 불렀다. 아버지에게 환영받지 못한 이 ‘갈네’가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이며 독립운동가인 권기옥(權基玉, 1901~1988)이다. 갈네가 8세 때 장티푸스로 다 죽게 돼 다음날 묻으려고 했는데, 새벽에 기적처럼 살아난 일이 있었다. 이웃 장대현교회에서 찾아와 기도해 준 덕분에 딸이 살아났다고 확신한 갈네의 부모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은단공장에 여공으로 취업했던 11세 갈네는 다음해 장대현교회에서 운영하는 숭현소학교에 입학했고 ‘기옥’이란 이름이 생겼다. 소학교 시절 기옥은 몸이 약한 어머니 대신 집안 살림을 도맡고 동생도 키웠다. 성적은 항상 1등이었다. 특히 수학과 과학이 뛰어났다. 18살이 된 1918년, 기옥은 5년제 숭의여학교에 편입했고 송죽회에 가입했다. 송죽회는 국외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의 군자금을 지원하고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돕고 학생들의 실력을 기르는 비밀결사였다. 숭의여학교 학생들은 광무황제의 붕어 소식에 흰 댕기와 소복으로 애도했고,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태극기 제작과 애국가 등사를 하며 평양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3·1만세운동 이후 기옥은 체포됐다가 3주후 풀려났다. 조직을 통한 활동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한 기옥은 혼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에 뛰어들었다. 여학생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어머니의 패물을 팔아서 마련한 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1919년 10월에 평양에서는 또 한 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기옥은 체포돼 혹독하게 고문당하며 임시정부공채 판매의 배후를 추궁 받았다. 수십 번 기절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6개월간 수감됐다가 1920년 4월에 풀려났다. 이후 여자전도대의 일원으로 전국을 돌며 합창과 연설을 했는데, 이 또한 일제경찰의 탄압으로 지속할 수 없었다.  권기옥은 어디든 틈새만 있다면, 약간의 흙이나 습기만 있다면 발아하는 단단한 풀이었다. 보도블록 사이에서 자라는 풀은 보행자에게 밟히거나, 차량에 치이거나, 도로 표면의 열로 고통 받는다. 권기옥의 삶도 그랬다. 하지만 그녀의 꿈인 독립과 비행은 조금씩 자라났다. 마침내 권기옥의 비행은 대한민국 공군을 키워냈다. 임시정부의 당당한 딸평남도청 폭탄 투척 관련 혐의까지 받으며 일제의 체포대상이 된 기옥은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없게 됐다. 결국 기옥은 임시정부 사람들의 도움으로 고향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했다. 1920년 11월말의 일이다. 기옥은 안창호의 흥사단 모임에 참여했고 하와이에서 상하이로 온 노백린과도 만났다. 노백린은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선임됐는데, 1920년 캘리포니아주 북부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공군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노백린의 비행기학교는 임시정부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기옥에게 새로운 꿈을 불러 일으켰다.  마침 기옥이 숭현소학교 재학하던 시절, 미국 비행사 아트 스미스가 평양에 와서 비행시범을 했던 적이 있었다. 16세 소녀는 구름을 희롱하는 비행사의 묘기를 보았고 저절로 비행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하지만 그 꿈을 실현할 방도는 하나도 없었다. 1921년 봄에 기옥은 중국 항저우 홍따오여학교에 입학했고, 독립운동을 위한 실력을 키우고자 노력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주로 난징에서 공부했는데 기옥은 한국인이 많은 난징에서는 중국어 학습이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항저우로 향한 것이다. 중국어뿐 아니라 영어도 필요하다는 것을 안 그는 교장선생님에게 특청을 넣어 방학을 활용해 선교사 집의 가사를 도우며 영어를 배웠다. 비행학교 입학에는 어학 실력이 필수인데 지원자들이 어학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고 외국어 공부에 열중한 것이다. 기옥은 1923년 6월 상위권의 성적으로 홍따오여학교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항저우에 간 한국인 유학생 중에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단 두 사람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권기옥이다. 하늘을 가르며 독립에 매진하다기옥이 비행학교 입학을 힘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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