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질병과 세계사

지금은 어느 정도 잊힌 존재이지만, 한번 유행하면 온 나라가 들썩인 감염병이 있었다. 바로 콜레라다. 이로 인해 해마다 세계적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고 있고 한국에서도 21세기 초입까지 유행이 발생한 바 있으므로 여전히 경계의 대상이다(제2급 감염병). 사회 혼란 시 위생 상태가 열악해지면 언제든 유행의 불씨가 되살아날 수 있는데, 세계보건기구(WHO)가 ‘극히 치명적’이라 수식할 정도로 전파와 증상 발현 속도가 빠르고 치명률이 높다. 물, 음식물, 환자의 배설물로 전염되는 급성 수인성(水因性) 감염병으로, 감염돼 증상이 발현하면 쌀뜨물 같은 설사가 쉴 새 없이 배출되고 구토와 다리 경련이 동반되며, 치료받지 않으면 대개 수일 내 사망에 이른다. 이런 무시무시한 감염병이 19세기에만 다섯 차례 팬데믹을 일으켰다면 믿어지겠는가? 실로 한 세기의 대부분이 팬데믹 상황이었던 19세기는 말 그대로 ‘콜레라의 세기’였다. 원래 콜레라는 인도 아대륙 갠지스강과 브라마푸트라강 하류의 삼각지대에서 기원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벵골 지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3∼4세기부터 풍토병으로서 존재했다. 갠지스강 유역은 힌두교의 성지이기도 해 콜레라균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시기와 종교 행사가 겹치면 크게 유행하곤 했다. 이를테면 1783년 4월, 갠지스강이 산간부에서 구릉지로 유입되는 지점인 하리드와르에서 힌두교 제례가 열렸을 때, 신자 사이에 콜레라가 발생해 8일간 2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경우 순례자가 귀향하는 과정에서 콜레라를 퍼뜨리기 때문에 인도 각지의 유행병으로 번지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인도 내의 유행에 한정된 일이었다. 인도는 지리적으로 히말라야산맥에 가로막힌 고립된 세계로서 육로로의 접근이 곤란했고, 인도 아대륙은 수많은 국경선으로 분단돼 있었다. 또 힌두교도는 종교적인 이유로 해양에 나가는 것을 기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콜레라는 어떻게 전 세계를 휩쓸며 ‘19세기의 감염병’이 됐을까?콜레라는 인도 밖 어느 지역에서든 ‘신선한 공포감’을 선사했고, 전 세계 근대화 과정의 진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제국주의가 쏘아 올린 전 지구적 변화의 신호탄은 인류의 안녕에 큰 위기를 초래했지만, 질병과 인류의 관계는 일방적인 적이 없었다.  풍토병과 식민지 그리고 철도1817년 8월, 콜카타의 북동쪽 교외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9월에 콜카타에 침입한 후 벵골 지방 전역으로, 나아가 갠지스강을 따라 확산했다. 인도인은 물론이고 인도에 주둔해 있던 영국군도 유난히 위세가 강했던 콜레라의 손아귀를 피할 방도가 없었다. 1817년 11월 13일, 인도 중부 분델칸드에서 마라타 세력과 전투를 벌이던 워런 헤이스팅스(Warren Hastings, 1732∼1818)가 지휘 하는 부대에도 콜레라가 직격해 약 1천 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발생 하루에만 약 5백 명이, 12월 초까지 3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인도 중부를 덮친 콜레라는 이듬해인 1818년 8월, 서해안의 뭄바이에 도달했다. 당시 인도 사상 최악의 콜레라 유행이라 일컬어질 정도의 전국적 대유행이었다. 독성이 특히 강했고, 사망자 수도 유례없이 많았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콜레라는 여세를 몰아 벵골 지역에서는 동쪽으로, 뭄바이에서는 서쪽으로 국경을 넘어 퍼져나갔다. 제1차 팬데믹의 시작이자 ‘콜레라의 세기’의 서막이었다. 문제는 영국군이었다. 당시 영국은 1775년부터 이어진 마라타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인도의 종주권을 거의 확보함으로써 세계사의 중대한 국면을 초래하고 있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벵골을 지배한 지 60년이 됐지만, 그 통치 영역이 남북으로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년 전의 일이었다. 1817년부터 1818년에 걸쳐 영국군은 벵골에서부터 북인도를 경유해 대규모 이동을 감행했고, 유행이 서인도로 번진 1818년 7∼8월은 마라타 세력이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영국에 대한 무력투쟁이 소멸한 시기였다. 1820년에는 영국군이 오만으로 파견됐는데, 아마도 이를 계기로 콜레라가 아라비아반도에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아랍의 한 역사가는 그해 오만에서 발생한 역병이 기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나 바그다드 등지에서 유행한 감염병 즉 페스트와는 다른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40년 후인 1857∼1858년의 세포이 항쟁 때도 인도 내 콜레라 전파는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영국군의 이동은 곧 콜레라의 행군이었던 것이다.제국 영국의 팽창주의는 더욱 본격화했다. 경제적·군사적 목적으로 인도 전역에 철도를 놓았는데, 이로 인해 성지순례의 규모가 확대돼 1867년에는 인도 각지로부터 약 3백만 명의 순례자가 하리드와르에 쇄도했다. 철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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