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음식과 권력

식탐은 타고나는 것일까? 서태후는 먹는 것을 즐겼다. 단순히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틈만 나면 먹고, 배불리 먹고 난 뒤 이내 또 먹을 것을 찾았다. 사치와 미식을 원 없이 즐겼던 그녀를 오래 모셨던 만주 귀족 가문 출신의 여관(女官)이 지은 『어향표묘록(御香標錄)』을 보면, 태후의 고향 봉천을 찾아가는 봉천행계(奉天行啓)에 대한 기사 중에 청나라 황실의 음식과 문화가 인상적으로 기술된 부분이 있다.봉천행 열차에는 주방차가 4량이 연결돼 있고, 상설 화덕이 50대, 일급요리사 50명, 하급요리사 50명, 허드렛일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가다가 원하면 어디에서든 열차를 세우고 그 자리에서 100가지나 되는 요리를 만들어 냈다. 디저트도 100종을 준비했다. 황제와 태후의 식탁에는 반드시 100그릇을 채우는 것이 전통이었다.속설에 ‘나라님도 가난 구제는 못한다’는 말이 있다. 과거 왕조시대에는 한 나라의 국세가 기울 무렵이면 이곳저곳에서 난이 일어나고 가뭄에 흉년이 들어 민초의 삶이 처절의 극에 달하곤 했다. 그런데도 통치 세력은 자신들이 누리는 호사스러운 삶의 쾌락에 중독돼 몰락의 길을 재촉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피지배계층 중에는 생존을 위협하는 극심한 빈곤과 기아를 견디다 못해 식인이라는 통한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재앙은 또 다른 양상으로 인간 삶을 처절하게 만든다. 펄 벅(1892~1973)의 『대지』에 묘사된 메뚜기떼의 습격이 초래한 황망한 현실과 그에 따른 두려움이 그렇다.“남쪽 하늘에 작은 먹구름이 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온 하늘을 뒤덮었다. 세상이 온통 밤처럼 캄캄해지고 메뚜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로 천지가 진동했다. 그리고 밭으로 소낙비처럼 떨어져 왔다. 메뚜기떼가 내려앉은 밭은 잎사귀 하나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중국인들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를 해야 할 천자와 통치 계급이 부패를 일삼고 권력을 남용하며 백성들을 핍박할 때 하늘이 이를 응징한다는 징표로 메뚜기떼가 도래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메뚜기를 벌레 ‘충’변에 임금 ‘황’자를 써 황충(蝗蟲)이라고 했다. 서태후가 특정 음식을 즐겨 먹었다는 점에서는 미식가라 할 수 있지만, 자주 많이 먹었다는 점에서는 대식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녀의 한 끼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지출된 금액은 대략 백은(白銀) 100냥 정도였는데, 이는 당시 서민들의 1년 치 수입을 초과하는 돈이었다고 한다. 사정이 이쯤 되면 서태후의 음식 사랑을 단순히 식도락이라거나 음식 애호라고 할 수 없다.  황제조차 마음대로 폐위만주족의 나라 청나라 말기 최고의 절대 권력자, 동시에 나라를 망국의 길로 이끈 주역은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 통칭 서태후(西太后, 1835~1908)라 불린 여걸이다. 인류역사상 세상을 지배한 권력의 중심 또는 배후에는 늘 여성이 있었다. 어찌 보면 인간사의 지배자는 여자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클레오파트라, 제노비아 여왕, 측천무후, 비잔틴제국 나약한 공동 황제들의 아내(황후)와 섭정하는 모친 황후들이 그러하다. 조선 태종은 처가인 민씨 일가의 도움으로 왕이 됐으나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 공을 세운 처남들을 숙청했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결혼을 하지 않고 신분상 노예에 속하는 하렘의 여인을 취해 첩으로 삼은 것도 권력의 도전을 막기 위한 방책의 하나였다. 옛날에는 조혼(早婚)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조혼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노동력의 확보를, 지배계층에게는 자손 번창을 위한 중요한 일이었다. 중국 황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청나라는 황자의 혼인 연령을 15세로 규정했다. 그래서 15세가 되기 전 황실의 어린 남자들은 임시로 여인을 두고 방사(房事)를 익혔다. 이런 시혼(試婚)을 명문 규정으로 제도화한 왕조가 청나라였다. 청나라 궁중에는 두 종류의 시혼 제도가 있었다. 하나는 황자의 혼인 사전 연습과 확인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주의 혼인을 위해 시혼 꺼꺼(格格)들에 의해 이뤄지는 사전 대리 시험용이었다. 전자의 경우, 꺼꺼 즉 선발된 시혼 궁녀들이 신부(미래의 황비)를 대신해 황자와 잠자리를 갖는다. 후자 즉 공주의 혼인인 경우에는 선발된 시혼 궁녀가 공주 대신 미리 부마 예정자와 합방해 문제점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이런 역할을 담당하는 궁녀 8명을 엄선하여 시침(侍寢) 궁녀라 하고, 4개의 궁중 여관(女官) 명칭인 사의(司儀), 사문(司門), 사침(司寢), 사장(司帳)으로 구분해 불렀다. 청나라 9대 황제 함풍제(1831~1861)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다. 이들은 수도인 북경 자금성 내의 거처에 따라 동태후, 서태후, 중태후라 불렸다. ‘살구’라는 뜻의 행아(杏兒) 또는 행정(杏貞)이라는 한자 이름을 지닌 서태후는 대단찮은 지방 관리의 딸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중은 물론 귀족 집안의 아녀자 대부분이 문맹이었음에 비해 그녀는 글을 알았다. 남편인 황제와 함께 정사를 의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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