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오전에는 해녀, 오후에는 고깃집 사장님, 저녁엔 줌 수업 듣는 이유정 학우(관광 4)

 

해녀는 물질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분수껏 물질하되 경쟁도 금지다.
위험한 상황에서 도와줄 이는 동료밖에 없다.
동료를 존중하고 위하는 마음이 해녀 문화의 정수다.

 

“안녕하세요! 오전에는 제주바다에서 물질하고, 오후에는 식당 ‘해녀고기’에서 맛있게 고기를 구워드리는 해녀 이유정입니다. 저는 현재 어릴 적 꿈이었던 해녀가 됐고, 고깃집 사장님도 됐으니 두 개의 꿈은 벌써 이뤘네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꿈이 많아요. 방송대도 졸업해야 하고, 그림도 배우려 제주대 미술학과도 편입했거든요. 물질도 더 잘하고 싶고, 수중 정화활동도 알리고, 책도 쓰고 있어요. 저 사람처럼 살면 어떨까 하는 매력이 느껴지면서 ‘모범’이 되는 해녀가 되고 싶습니다!”

 

고교 관악부에서 튜바 불며 폐활량 늘어
매일 제주 바다로 출근하는 사람이 있다. 올해로 해녀 5년차에 접어든 이유정 학우(관광 4)다. 큰 눈망울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도레미파솔에서 ‘솔’ 높이의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이 학우를 제주지역대학에서 만났다. 인터뷰 내내 넘치는 에너지가 고스란히 기자에게 전달되는 느낌이 들었다. 고연봉 회사원으로 살던 이 학우가 해녀가 된 건 서른한 살 때였다. 하지만 돌고 돌아 어릴 적 꿈이었던 해녀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 여정도 만만치는 않았다.

 

친구들과 노는 게 그저 좋았던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시절, 악기를 너무 배우고 싶어 관악부에 들어갔다. 키도 크고 통통한(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건강한’) 체격이었던 그에게 선배들은 가장 큰 관악기 튜바를 추천했다. 악보를 못 외워 지적받기도 했지만, 타고난 폐활량이 더 늘었다. 친구들이 하나둘 바이올린, 클라리넷을 전공한다는 소릴 들었지만, 고가의 악기값을 감당할 수 없어서 연주자의 꿈을 접었다.

 

긍정적이고 사교성도 높은 그녀는 그후 중국어로 관심을 돌렸다. 13억 중국인이 친구가 된다는 생각으로. 고3 때 악기를 사달라는 말 대신 중국어학원에 보내달라고 부모님께 말했다. 한라대 중국어과에 입학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에는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워낙 고기를 좋아하는데 고깃집에서 일하면 원 없이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성적도 잘 받아 중국 연태로 연수도 다녀왔다. 그는 “호돌이가 마스코트였던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 태어난 아이가 20년이 지나서 2008 베이징 올림픽이 열린 중국으로 갔다는 사실이 너무 재밌더라고요”라며 웃었다.

 

졸업 후 공부에 대한 로망이 있었지만, 제주의 여느 청춘들처럼 육지에 대한 동경이 더 컸다. 그래서 상경을 결심했다. 오전에는 학원으로 출근하고, 오후에는 전단지를 돌리고, 밤에는 좌판에서 악세사리를 팔며 밤낮없이 일했다. LG전자 공장에서는 배터리 조립 2교대 근무도 했다. 1일 5식 하며 하루 3시간만 자고 일하는 날이 반복됐다. 그때 든 생각이다. “세상 직업에 귀천은 없는 것 같더라고요. 어떤 일은 단순노동인데 월급도 많이 주기도 하고요. 어떤 게 나에게 맞는 일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고된 육지 생활이 재미는 있었지만, 과연 인생에 어떤 의미일지 고민됐다. 어부 아버지, 농부 어머니가 당신처럼 살지 말라고 곱게 키운 장녀였다. 4년 만에 객지 생활을 정리하고 그렇게 제주도로 돌아갔다. “엄마, 아빠 정말 감사합니다.” 부모님 앞에서 펑펑 울었다.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든 하겠다며.

제주도로 중국인 입도가 늘면서 전공을 살려 외국인을 담당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부모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더운 여름엔 시원한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고,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사무실이었다. 게다가 고연봉!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고민이 고개를 내밀었다. 과연 이것이 내가 원했던 삶인가? 이렇게 살기 위해 고향으로 온 것일까? 이 직장이 내게 맞는 평생 직업일까?

 

바다로 산책을 나갔다. 서울에서 돌아와 바라보는 바다는 너무 좋았다. 윤슬 사이로 둥둥 떠 있는 주황색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해녀 삼촌(성별 구분 없이 웃어른을 일컫는 제주말)들이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광채가 났어요. 테왁(해녀가 가슴을 얹고 헤엄칠 때 쓰는 부표의 일종)을 메고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맞다. 내가 해녀가 된다면? 이란 생각이 든 순간이에요.”

 

해녀는 특별한 기계장치 없이 내 호흡으로 넉넉한 바다가 내어주는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아간다. 또한 물질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분수껏 물질하되 경쟁도 금지다. 위험한 상황에서 도와줄 이는 동료밖에 없다. 동료를 존중하고 위하는 마음이 해녀 문화의 정수다. 독특한 공동체 문화를 가진 ‘제주해녀문화’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잠수할 수 있는 수심, 어획량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구분한다.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해녀 될 수 없어

해녀가 되는 길은 녹록지 않다. 해녀학교 졸업 후 인턴과정을 거쳐야 한다. 1년간 물질 60회 또는 120만 원의 위탁판매 실적이 있어야 한다. 해녀회, 어촌계, 수협 조합원 가입도 필수다. 특히 해녀회 가입은 모든 해녀의 만장일치로 결정된다. 한 명의 해녀라도 반대하면 아무리 실력이 좋더라도 해녀가 될 수 없다. 해녀학교를 졸업하고도 짧게는 2년, 길게는 9년까지 기다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외지인일 경우 ‘지켜보겠다’는 기존 해녀들도 많다.

 

예상처럼 큰 벽은 부모님이었다. 평생 바다에서 일하면서도 딸은 절대 배에 태우지 않았던 아버지는 등을 돌렸다. 위험한 바다에 나간 남편 생각에 평생을 가슴 졸였던 어머니는 눈물을 쏟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결국 부모님이 졌다.

 

아버지 손을 잡고 해녀회장, 어촌계장을 만났다. 2019년 4월, 한수풀해녀학교에 등록했다. 3개월 해녀학교 수업은 입문반(취미반) 토요일 하루, 양성반(취업반)은 토, 일 이틀 수업으로 진행된다. 무턱대고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어 일과 병행했다. 어릴 때부터 바다 수영이 익숙했기에, 물질도 빠르게 습득했다. “‘저는 취업반으로 들어왔지만, 가장 잘 배우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제가 좀 ‘요망지게’(‘야무지게’의 제주말) 잘 했어요.”(웃음)

 

국내에 프리다이빙 대가인 노명호 선생에게 숨참는 방법도 배웠다. 바다를 누비며 실제 물 속도 탐험했다. 해군해난구조대 SSU 선배들께 인명구조를 배우며 자격증도 취득했다. 배운 아이가 왜 해녀가 되려냐는 해녀삼촌의 물음에는 “제가 삼촌들 보디가드 해드릴게요! 망사리(채취한 해산물을 담는 그물)도 다 들어드릴 거예요!”라며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결과는? 90세 삼촌까지 만장일치! 2020년, 31세에 마침내 해녀가 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수영하는 기분!

해녀는 겨울에도 물질을 나간다.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뿔소라가 철이다. 상군해녀들은 40kg씩 잡지만, 절반인 20kg 정도 잡는다. 매일 물질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는 ‘무료로 헬스장, 수영장 다니는 기분’이란다. 특히 눈이 오는 겨울 바다에서 물질할때면 대단한 일 하는 사람임을 새삼 느낀다고 했다. “바깥기온은 영하지만, 제주 바다는 10℃ 안팎이에요. 바닷속에 들어가면 오히려 따뜻함이 느껴지죠. 마치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수영하는 기분이라니까요?”

 

매일이 위험한 바다지만, 하루는 갑자기 바뀐 조류 때문에 오리발을 차고도 휩쓸려갔다 옆 동네 해변까지 떠내려 가면서 원래 나오던 자리로 못 돌아갔는데, 마침 그곳에 어머니가 있었다. 아버지에 이어 바다로 나간 딸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해녀청년분과위원으로도 활동한다. 새로 들어오는 해녀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봉사다. 주변에서는 MZ세대라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테왁에 나이키 로고를, 신발에 샤넬 로고를 매직으로 그리고 다닌다. 2021년 12월 2일부터 2023년 10월까지 해양수산부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귀어귀촌센터의 귀어귀촌 홍보모델로도 활약했다. 화사하게 웃는 그의 사진은 제주공항에 걸리기도 했다. 사진을 본 해녀삼촌들이 “유정이 사진이 왜 저깄노? 출세했네”라고 말한다며 웃었다.

 

바다 정화 활동도 매일 한다. 직장이 바다인 그는 반려견 두 마리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한 시간씩 쓰레기를 줍는다. “직장 평수가 워낙 넓어서 청소가 힘들어요!”(웃음)

 

이 학우는 힘 닿는 한까지 해녀로 일하고 싶다. 하지만 요즘 상황이 많이 아쉽다. 1970년 1만 4천명이던 제주해녀가 2023년 기준 3천명 아래로 떨어졌다. 이 학우가 속한 해녀회도 작년까지 21명이었는데 올해 15명으로 줄었다. 건강, 가족 권유로 그만뒀다. 신입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아진다.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제주 해녀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해녀 수입만으로는 경제적으로 충분치 않아 오래 전 꿈이었던 고깃집 사장을 실천에 옮겼다. 2020년 7월 22일 식당 ‘해녀고기’를 오픈했다. 예전 해녀들이 물질 후 뭍으로 나와 불턱에서 고기와 해산물을 익혀 먹던 방식을 그대로 재현했다. 단 하루 쉬는 날 없이 연중무휴다. 고무로 된 해녀복 이전에 입던 전통 해녀복에 수경을 끼고 손님들에게 고기를 구워 대접한다. 해녀의 역사와 가치를 알려주면서. 귀가길 제주공항에서 손님들은 그의 사진 옆에서 인증샷을 찍어 그에게 보내기도 한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제주홍보대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우연히 찾아온 방송대
그렇게 정신없이 살던 2022년 1월 5일. 노형동을 함께 걷던 지인이 방송대를 졸업했는데 쉽진 않았다는 말을 건넸다. 잊고 지냈던 공부 로망이 되살아났다. 한달음에 제주지역대학으로 달려갔다. ‘꿈은 꿀 수 있는 거잖아’라는 생각으로 관광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중국어를 전공한 데다 관광도시 제주도를 더 전문적으로 배워보겠다는 포부였다.

 

온라인 수업에서 20명이 넘는 학우들과 만나면서는 공부에 재미가 붙었다. 처음에는 수강신청도 놓칠 뻔 했는데, 그럴 때마다 선배들의 도움을 받았다며 그 따뜻한 마음에 감동했다. 2023년에는 관광학과 4학년 과대표로 봉사했다. 현재는 문화부장이다.

 

오전에는 물질, 오후에는 고깃집. 공부할 시간은 도대체 어떻게 찾는 걸까? “저는 오늘 할 일을 다 적어요. 그중에 가장 쉬운 것부터 먼저 합니다. 시간을 들여야 하는 건 마지막에 집중해서 해요. 미루다 보면 쉬운 것조차 못하니까요. 제가 좀 긍정적이거든요. 날씨가 궂어 손님이 없는 오후에는 이어폰을 끼고 형성평가 들으면서 공부를 했어요. 과제를 하는 중에 손님 들어오면 고기 굽는 게 좀 힘들었죠.”(웃음)

제주어촌특화센터에서 미래리더로 활동하면서 이 학우는 교육 측면에 눈을 돌렸다. “현직 해녀가 아이들에게 생존수영을 가르쳐주면 어떨까요? 제주도로 수학여행도 많이 오는데, 아이들에게 추억도 남기면서 슬픈 사건도 잊지 말자는 의미도 있고요. 이걸 어떻게 펼쳐볼지가 요즘 제 고민이에요.”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에 눈에 들어오면 바로 실천하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호동 해녀(태어난 이호바다를 딴 해녀삼촌들이 부르는 별명)는 방송대가 더 알려지길 바란다.

 

“해산물 잡는 해녀도 꿈꾸고 배우는 걸 보세요. 저보다 훨씬 뛰어난 분들이 많은데, 조금만 투자해서 도전하면 여러분의 배움도 많아지겠죠? 멋진 선후배도 만날 수 있고요. 이제는 손 내밀면 악수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인데, 익숙치 않아도 먼저 인사해주는 곳, 그 따뜻한 곳이 바로 방송대입니다. 학우와 동문이고요.”

제주=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4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0
댓글쓰기
0/300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